▲ 레이먼드 챈들러,『하이 윈도(The High Window)』, 북하우스, 2004.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게는 『슬립』이후 두 번째 만나는 챈들러의 작품. 원래 그의 <말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은 『안녕 내 사랑』이지만, 국내엔 『하이 윈도』가 먼저 소개되었고, 나 역시 이 작품부터 만날 수 있었다.

하드보일드 장르를 뛰어넘어 일반 문학으로의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있는 챈들러는 그야말로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려왔다.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불멸의 캐릭터 ‘필립 말로’ 역시, 이후 탄생되는 수많은 탐정, 하드보일드 장르 주인공들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차가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고 늘 감정 없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탐정 필립 말로. 하지만 그는 약자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는 ‘낡은 기사도’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작품의 해설을 통해 ‘말로’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만날 수 있다. 아마 누구라도 작품을 읽은 후에는 그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냉소적이면서 인간미가 있는 사람’ ‘혼돈되며 본질마저 뒤집히는 세계 가운데 우뚝 서서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

말로의 탄생 이후 챈들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후배 작가들도 자신들의 작품에서 역시 또 다른 말로를 창조해냈고, 비열한 도시 차가운 거리에서 야수 같은 인간들과 싸워나가는 고독한 남자의 캐릭터는 영원한 로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챈들러의 작품은 복잡하고 모호한 플롯으로 자칫 독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멋진 문장 하나하나는 그러한 고통을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지난 작품 《빅 슬립》에서 무심결에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감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색다른, 그러나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필립 말로는 고독한 도시를 지키는 탐정의 면모를 다시 한 번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과 차별을 갖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아닌 물건을 찾는다는 점이다. 바로 ‘브라셔 더블룬’라는 실제 존재하는 고가의 옛 주화이다. 이 주화의 도난을 둘러싸고 스토리가 진행되고, 결국 추악한 범죄가 드러나게 된다.

필립 말로의 눈빛은 지극히 차갑다. 그렇지만 그가 모든 이들에게 같은 ‘눈빛’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분노와 적대감이 담긴 눈빛, 그리고 그들에게 짓밟히고 고통당하는 약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다르다.

게다가 『하이 윈도』에서는 사회와 정의에 대한 말로의 신념이 그의 입을 통해 그대로 표현된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신네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가지기 전까지는 내 영혼도 가질 수 없을 거요.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들이 언제나 진실을 구하고, 결과야 어찌 되든 진실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라고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때가 올 때까지는, 나는 내 양심을 따르고 나의 의뢰인을 최선을 다해서 보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들이 진실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내 의뢰인에게 해를 더 끼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는요. 또는 누군가 내 입을 열게 하려고 체포할 때까지는 말이죠.”

또한 다음과 같은 표현도 필립 말로의 표현 스타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차양을 걷고 포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밤은 온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부드럽고 조용했다. 흰 달빛은 차갑고 맑았다. 우리가 꿈꾸지만 찾을 수 없는 정의처럼 말이다.

필립 말로는 언제나 외로워 보인다. 단지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비정한 도시, 속고 속이는 비열함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나가고 있는 그의 끈질김이 조금은 처량하게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는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삶, 시간들 속에서 더 많은 정의가 사라지고, 더 많은 상식이 무너지고, 더 많은 약자들이 고통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혼돈되며 본질마저 뒤집히는 세계 가운데’ 서 있다. 이미 떠난 이들의 이름마저 더럽히며, 그 잘난 생명을 이어가려는 이들, 아니 자신들의 하찮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 이들에겐 이미 염치나 자존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지난 정부 이후 어쩜 우리에겐 더 이상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가 허락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린 얼마나 속물이 되었을까. 본질은 얼마나 더 뒤집혀질까.

이런 구차하고 무참한 시대, 필립 말로의 거친 숨소리가 그립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체면 없는 시대,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를 통해 위로를 받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은 다르지만, 필립 말로와 함께 떠오르는 또 한 명의 남자. 그의 무심한 담배 연기가 문득 사무친다.

정의를 소설 속에서나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시대. 달빛이 그립다.
그리고 다시 오월이다.

“토니는 잘 웃지 않지요.”
팔레르모가 말했다.
“이 땅은 잘 웃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팔레르모 씨.”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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