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59회부터는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앙의 계보와 맥을 이어오고 있는 북측 가정교회(처소교회, 가정예배처소)를 다룰 것이다. 또한 북측 기독교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기관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과 ‘평양신학원(평양신학교)’을 참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북측 기독교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남측이나 서구식 기독교의 일방적 관점이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 교회’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 필자 주 

 
북측 ‘가정교회’를 가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이 시작되자 기존 기독교 신자들과 조기련(조선기독교도련맹) 측은 기독교를 믿는 인민들의 신앙생활 유지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격동기와 과도기를 맞아 종교문제가 매우 절박한 문제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성급히 처리해서는 안 될 문제이기 때문에 일시적 대안이 아닌 본질을 붙잡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가정교회’였으며 이로써 북측 기독교 공동체는 전 세계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독특한 교회 형태인 가정교회 제도를 정착시키며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며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정교회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45년 8.15 해방 직후 북조선 인민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태동되었다. 해방 정국 이후 6.25 전쟁 직전의 기간에도 새로운 교회 제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가정교회는 전쟁 직후에는 이전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조기련(조선기독교련맹)의 주도로 가정교회가 재정비 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북측의 ‘가정교회’는 그 명칭이 ‘처소교회’, ‘가정예배처소’, ‘가정예배소’등 여러 가지로 불려진다. 가정교회는 분명히 당과 정부, 조기련(현재 조그련) 등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교회이며 이와는 별도로 조그련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 형태로 모임을 갖는 다양한 종류의 처소교회 공동체들도 연이어 생겨났다. 제도화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자 형성된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은 지금은 연대활동을 하고 있으나 초창기에는 주로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이 북측의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음성적이고 불법적인 ‘지하교회’가 아니며 북측 당국에서 승인한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교회 공동체들이다.
    
필자는 그 동안 방북시 봉수교회, 칠골교회 외에도 형제산구역, 옥류구역, 순안구역 등에 전 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가정교회들을 방문해 북녘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북측 당국은 1970년대부터 해외동포와 남측 목회자들이 방북할 때마다 부분적으로나마 가정교회 예배처소를 간간히 공개했으며 이때 공개했던 교회들은 주로 평양지역과 평안남도 그리고 강원도 원산지역에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다.
   
1997년 당시 가정교회 현장을 직접 탐방한 백종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처소교회를 담당한 교역자들의 명단까지 확보됐다. 대략 살펴보면 평양 낙원동 처소교회는 김용거 전도사(82년)가 책임을 맡았으며 경상골 예배처소는 변소정 전도사(82년), 대동강 구역 예배처는 김운봉 전도사(87년), 성천구역 처소교회는 조성철 전도사(88년), 남산구역 처소교회는 백봉일 전도사(97년) 등이 담임을 했었다. 교회 분포는 평양특별시에 30개소를 비롯해 남포직할시 30개소, 개성직할시 30개소, 평안남도에 무려 60개소가 있었으며 기타 지역에 40개소가 있었다. 당시에는 양강도, 자강도 지역에는 가정교회가 없었으나 2016년 현재는 몇 군데 세워져 있다.
   
그 후 봉수교회당과 칠골교회당이 건축되면서 가정교회 신자들이 두 교회당으로 유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며 완공 이후로도 가정교회들은 변함없이 왕성하게 활동해 오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는 남측의 한국교회협의회(KNCC) 관계자들이나 해외교포 목회자들이 방북하면 주로 평양 시내에서 가까운 평양 순안구역, 옥류동 구역, 형제산 구역 등의 처소교회와 가정교회들 위주로 공개했다.
 

▲ 평양 순안구역 가정교회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모습(2011년 12월). [사진제공 - 최재영]

 

▲ 가정교회 주일예배도 가급적 여성신자는 조선옷(한복), 남성은 인민복이나 양복을 입고 참석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아코디언, 구성지고 흥겨운 찬송가를 연주하다
    
가정교회란 기존 교회의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북측 영토의 각 지역별로 조직된 기독교 공동체에 소속된 신자들이 교회당 대신 신자의 주택을 빌려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가정교회는 정식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현재 남측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는 구역예배나 목장모임, 셀 조직 모임과는 다른 차원의 조직이다. 각 가정교회 책임자는 예배 장소로 제공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주택을 선택해 매주 일요일마다 모여 주일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를 하며 주중에도 신자들의 각종 모임을 주관하기도 한다.
    
또한 책임자는 조그련과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가정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거나 형편을 돌아보며 조그련과의 행정적인 관계가 지속되도록 하고 있다. 북측의 가정교회는 전통적인 교회 구조에서 탈피해 신약성경의 가정교회나 중국의 처소교회처럼 조직화되어 정치적 상황에 협력하거나 대처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매우 조용히 신앙인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필자가 볼 때 처소교회는 주일예배 시간에는 피아노나 오르간을 대신해 아코디언으로 찬송가 반주를 한다. 기존교회들이 반주자를 두는 것처럼 반드시 아코디언 연주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평소 피아노와 오르간에 익숙한 나는 구성지고 색다른 아코디언 연주가 더 신기하고 은혜롭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설교자와 인도자가 별로도 조직된 경우도 있지만 아예 책임을 맡은 목사, 전도사, 장로가 직접 설교와 예배인도를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1990년대 말까지는 가정예배를 마치고 나면 VCR에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비디오테이프를 넣는 기계는 이미 단종되고 최근에는 DVD, CD를 넣는 콤보 플레이어가 유행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북측 가정교회를 후원하려면 콤보 플레이어와 아코디언 지원이 절실하며 DVD로 제작된 신학교재와 성경공부 교재도 필요한 실정이다.
   
가정예배소는 지금까지 대부분 장로, 집사 등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책임자는 거의 전도사와 목사들이며 한 사람의 교역자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관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목회자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라 가정교회 예배는 질적인 부분에서 열악하며 지방으로 갈수록 더하다. 열악한 지방의 가정교회들의 경우에는 설교자도 없이 인도자에 의해 성경 본문만 신자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주일예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1972년 평양신학원 건립 이후 그 동안 100명이 넘는 목회자들이 배출됐으나 그래도 아직까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따라서 일부 가정예배소는 책임자가 직접 설교할 수 없는 경우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담임목사들의 설교 테이프를 시청하며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과거 조그련 관계자들은 국제회의 석상에서 남측과 해외동포 목회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정교회에서 사용할 VCR(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 지원을 요청해온 적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KNCC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측 교단), 감리교 등이 VCR 수백 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2002년도에는 KNCC 대표단이 형제산 지역과 옥류 지역 가정예배처소를 참관할 때 서울 감신대 총장 김득중 박사의 ‘마가복음 강해’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성경공부 교재로 활용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었다. 
    
이들이 목격한 테이프는 1980~90년대에 남한에서 초교파적으로 운영한 ‘성서통신대학’의 교재로 제작됐던 것이며 ‘한국비디오선교회’가 제작했던 것이다. 테이프 안에는 남측 교회의 여러 유명 목사들의 설교와 신학 교수들의 성경강해가 한 편당 20분짜리 분량으로 담겨져 있었으며 당시 재미교포 한인목사가 북측 조기련에 50개를 전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이 테이프들은 전국의 각 가정교회에 복사판을 보급했으며 가정교회 뿐만 아니라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 봉수교회 등에서 신학교재용과 성경공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 특송을 부르는 신도들의 찬송가에 맞춰 반주를 하는 가정교회 아코디언 연주자(순안구역 가정교회). [사진제공 - 최재영]

 

▲ 남측의 ‘성서통신대학’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를 김일성종합대에 기증하는 모습. 좌측에서 두 번째가 당시 조그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전후 ‘미제 타도’ 열기 속에 ‘소단위화’로 신앙유지
      
6.25 전쟁 후 북의 각계각층 전 인민들로부터 빗발치듯 몰아치는 ‘미제 타도’의 열풍 앞에 미국의 브랜드 종교처럼 여겨지는 기독교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신앙을 유지하려는 기존 신자들과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루터기로 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소(小)단위화’가 필수적이었으며 그렇게 시작된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변함없이 정착되면서 매우 익숙한 형태의 ‘북조선 사회주의 가정교회’로 정착됐다. 이와 관련해 1985년 방북한 세계교회협(WCC) 관계자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실 연맹(조기련)은 평양에 교회 한 곳을 건축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기련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가정교회 공동체 그룹들과 가정교회 신자들이었다 …(중략)... 북조선 신자들은 30여년 이상을 개인들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것은 편법만이 아니었다 …(중략)...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별 쓸모없고 외형만 번지르르한 교회건물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기존 평양의 가정교회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벽돌 건물로 지어진 교회당은 ‘손님을 맞이하고 행사를 개최하는 회관’의 의미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내가 만난 가정교회 신자들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기존 서구식 기독교가 유지한 전통적인 형식을 탈피하고 이미 달관한 듯 보였다. 이와 같은 가정교회 형태는 비단 북측만이 아닌 중국과 러시아 등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한 곳의 가정예배소는 신자들이 대략 10-12명 단위로 모이며 매우 가족적이고 단합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들이야 말로 북측 기독교의 중추적인 기둥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남측 교회가 ‘건물 중심의 교회’라고 한다면 북측 교회는 ‘가정교회 중심’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80년대 말 들어서 봉수교회가 건축되고 90년대 초 들어서 칠골교회가 연이어 건축되면서 북측 기독교의 흐름과 무게 중심이 건물교회 형태로 옮겨진 듯 보이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가정교회는 그 후로도 두 교회당과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건재하며 유지되고 있다.
    
교회와 신자들의 수치에 민감한 필자는 매 방북 시마다 조그련 오경우 서기장에게 꾸준히 질문한다. 오 서기장의 말에 의하면 현재 북에는 5백 20여 곳의 가정예배소가 있다고 못을 박았으며 85년에는 󈬉개 가정예배소가 증가했다”, 93년에는 󈫺여개소의 가정예배소가 새로 생겼다”는 등 예배처소의 지속적인 증가를 주장해 왔다. 그 후 97년에는 당시까지  5백여 곳으로 알려졌었으나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에 의해 5백 20여 곳으로 수정 발표됐고  2010년도에 들어서 최근 5년 동안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520개의 통계수치는 큰 변동 없이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알려진 바로는 평양특별시, 남포직할시, 개성직할시 등 특별시 또는 직할시에 30여 곳씩, 평안남도에 60여 곳, 그 외 도시에 40여 곳씩 존재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양강도와 자강도에도 가정교회가 조직되어 운영 중이다. 평양지역의 경우, 한때 50여 개소까지 늘어났으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건립됨에 따라 이곳으로 흡수돼 현재 30여 곳이 있으며 특히 강원도 원산지역의 경우 시내에만 8곳의 예배처소가 있다. 지금까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원산지역에 많은 신자들이 밀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심지어 개신교의 조그련 측에서는 봉수, 칠골교회에 이어 제3교회 설립 부지로 원산시를 강력히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을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 평안남도 지역의 가정교회 주일예배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강원도 원산지역의 가정교회 주일예배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1997년도 평양 인근의 홍선길 씨 아파트에 마련된 가정교회. [사진제공: 백종현 기자]

 

가정교회와 기존 교회당 조직과의 관계
     
봉수, 칠골교회처럼 가시적인 건축물로 지어진 교회와 일반 주택에서 드리는 가정교회는 어떤 관계인가? 내가 볼 때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는 독자적으로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서로 협력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봉수교회당이 완공되면서 그 텅빈 교회당 좌석들을 평양시 광복거리에 밀집된 가정교회 신자들로 채웠으며 칠골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기존의 가정교회가 문을 닫고 폐쇄된 것은 전혀 아니다.    
     
칠골교회의 경우는 기존 광복거리 가정교회 신자들을 흡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정교회 신자들에 의해 칠골교회당이 건축된 케이스였다. 칠골교회당이 세워진 직접적인 계기는 그 동안 가정교회나 처소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던 다수의 신자들이 광복거리 새 아파트촌으로 이주하면서 교회당 건축 민원을 제기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민원을 접수한 김일성 주석이 1989년 5월, 김정일 비서를 대동하고 광복거리를 현지지도 하면서 칠골교회 건축이 가시화됐다. 이때 김 주석은 유년시절에 다녔던 교회들을 떠올리며 “칠골 창덕학교 뒤에 교회가 있었는데 만일 교인들이 요구하면 그 자리에 교회당을 하나 세워도 좋겠다”라고 최종 승인하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 후 과거 ‘하리교회(下里敎會)’가 있던 자리를 물색해 적당한 장소에 건축하면서 그곳 지명을 적용해 ‘칠골교회’라 명명한 것이며 현지지도에 동행한 김정일 비서(국방위원장)가 칠골교회당 건축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하리교회’는 6.25전쟁 이전에는 300여 명 정도의 신자들이 출석했으나 전쟁 중에 교회당이 파괴되며 교인들이 흩어졌다. 이들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각자 삼삼오오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처소교회 중심의 신앙을 유지해 오다가 이곳 광복거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며 옛날 교우들이 모여들자 새로 규합되며 다시금 옛 교회당 재건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거의 대부분의 남측 교회와 해외 한인교회들은 북측의 가정교회를 지하교회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니 다시금 말하거니와 필자가 언급한 가정교회는 지하교회가 아니니 혼동하면 안 된다. 지하교회는 외국에서 입국한 사역자들이 북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비합법적으로 교회를 조직해 음성적으로 선교와 목회를 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북측 정부와 당의 승인 하에 조그련에 소속된 합법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말한다.

이승만 목사와 경상(慶上)골 예배처소
     
동평양 쪽 대동강에서 강 건너 서남쪽을 바라보면 경상골과 만수대의 경치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 속에 위치한 경상골(慶上) 인근의 평양시 중구역에는 독특한 형태의 가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한 평생 미주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북측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이승만 목사는 타계하기 전에 가정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증언들을 필자에게 전해준 적이 있다. 이승만 박사는 주류사회인 미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지낸 명망 있는 목회자였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봉수교회가 건축되기 훨씬 이전에도 이미 규모가 큰 새로운 형태의 가정교회들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1986년 봄에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단과 방북한 이 목사는 일정 중에 시간을 내 가정교회들을 탐방했다고 한다. 방문단장 엡스 목사를 비롯한 미국 목사 일행들은 이승만 목사와 함께 평양의 ‘경상골(慶上) 예배처소’를 방문했는데 이 교회는 과거 해방 전 평양에 있던 ‘창동(倉洞)교회’와 ‘성곽(城郭)교회’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였다고 한다. 이 경산골 예배처소는 일반교회당 신자들 규모보다는 작고 가정교회 신자보다는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창동교회는 1905년 1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교회인데 설립 당시 출석신자는 40명이었으나 1930년대 들어서는 교인 수가 무려 2천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목사가 방문한 교회는 경상골 언덕 위에 있었는데 ‘경상골’이라는 지명은 원래 모란봉 남쪽 기슭에 있는 골짜기 이름인데 그 유래를 살펴보면 원래 평양사람들은 을밀봉에 오르는 것을 경사스럽게 여겼는데 이 봉우리에 오르는 첫 어귀라 하여 ‘경상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상골 막바지에는 ‘청년공원’이 있고 대동강 기슭을 따라 내려오면 현대적인 아파트들과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이 나온다.
    
경산골 예배처소는 그 주변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신자들의 믿음도 열정적이고 매우 진실해 보였으며 일반 교회들처럼 그 역할과 기능을 다하고 있어 미국 방문단 일행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방문단 일행은 귀국길에 서울을 들려 1986년 4월 30일, 엡스 목사와 함께 종로에 있는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방북 보고회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 만수대 부근 경산골 경치. 이 부근에 경산골 가정예배 처소가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가정교회 신자들이 남측 장로교(통합 측) 대표단과 예배를 드린 후 기념 촬영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봉수교회 담임으로 새로 부임한 송철민 목사와 대화하는 이승만 목사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한국 정부로부터 두 차례 입국 금지를 당한 후 50년 만에 독일에서 귀국하는 이영빈 목사 내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이영빈 목사와 강원도 원산의 가정교회
   
독일에서 거주하는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소속 이영빈 목사는 “남과 북이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처음 만나 교류하기 훨씬 이전부터 북에는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1981년 처음 방북한 이영빈 목사는 당시 원산의 가정교회 예배에 직접 참석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가정교회는 내가 북에 사시는 아버지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미 확인했던 바라 큰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교회들은 곧 자연 소멸될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평양에 10여 곳, 원산에 4-5곳이 있다는 가정교회들은 약 5천명 교인들 중에 가장 연소한 사람이 55살이라고 하더군요. 또한 나는 평양과 원산에서 조기련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가정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신자들이 아닌 당원들도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서 기대 이상이었어요. 그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당신만 같다면 우리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훗날 평양 봉수교회를 담임했던 이성봉 목사님은 그 당시 내가 설교했던 원산 가정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고 계시면서 가정교회를 이끄셨던 분인데 나중에 봉수교회로 발령받으셨습니다.”

이 목사가 우려한 부분은 신자들의 나이가 모두 고령이라 신앙의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1981년에 이어 95년에도 방북했는데 두 차례의 방북을 비교하면서 첫 번 방문 때보다 기독교 상황이 아주 좋아지게 달라졌다고 증언했다.

“처음에 저희가 방문했을 때 교인들이 묻더군요. ‘이 목사님, 앞으로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그래서 ‘지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그저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드리는 일이 전부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정말 내가 보니 신자들의 성경책은 귀퉁이가 반질반질 닳아 없어질 정도였어요. 그들은 더 이상 전도하는 것도 어렵고 심지어 자식조차 설득시킬 수 없는 형편에 이른 것을 답답해하면서 ‘우리가 이런 상태를 대비할 준비가 있었나요?’라고 반문하더라구요. 그때 나는 ‘여러분들 스스로 국가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안을 찾아보라’는 말만 해줄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 후 95년도에 다시 방문해보니 이북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어요. 전에는 교인이라고 나서는 것이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부끄러웠고 또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미국숭배자가 아님을 일부러 밝혀야 했는데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서기도 하고 또 기독교련맹이 북조선 외무성이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 사회단체 중에서도 기독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영빈 목사의 증언처럼 북측에는 가정교회가 못자리 역할을 하며 신앙 1세대들의 안식처 역할을 감당했으나 세대교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가정교회는 그 후 5백 곳으로 확산되었고 1972년 평양신학원이 개교하며 제1기 신학생을 선발한 뒤 졸업생들을 배출해 가정교회 책임자로 파견하고 있다. 그 후 학교는 운영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잠시 중단된 후 2000년 9월에 재개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7명의 교수진이 12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신학생들의 출신지역은 대부분 평양, 해주, 원산, 청진 출신이 가장 많았으며 이들은 졸업 후 다시 자신들의 고향이나 새로 발령받은 사역지로 파견되어 가정교회 목회를 해왔으며 지금까지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담임한 목사들은 이성봉, 백봉일 목사를 비롯해 대부분 가정교회 출신 목회자들이다. 

그 후 1988년 6월 15일 WCC(세계교회협의회)에서 아시아 국가를 담당하던 박경서 박사는 만경대구역의 ‘성천 가정예배소’를 방문했으며 2005년은 남측 감리교 서부 연회가 윤연수 감독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이 평양 ‘순안구역 가정예배 처소’를 직접 방문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때 함께 참석한 오경우 서기장은 “지금 우리 공화국에서 신앙생활 하는 기독교인들은 매우 성실하고 번영한 모법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이런 모습을 보고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인민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는 그 동안 명맥이 유지되는 차원에 머물며 때로는 활성화되거나 때로는 침체되는 양상을 반복해 왔다.
    
또한 10여 년 간 전국에 있는 가정교회를 다니며 지도를 하다 최근 평양 칠골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백봉일 목사는 가정교회 책임자 시절을 회고하며 “주일에 출석하는 가정교회 교인 수는 평균㺊~15명 정도이며 보통 가정교회에 새로 출석하는 교인은 1년에 고작 1~2명 정도이며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 공화국 인민들은 자기 자신을 믿는 주체사상과 하나님을 믿는 신학의 차이 때문에 쉽게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북측 기독교에 대한 허정숙의 증언
   
오래 전 북을 방문한 재미교포 홍정자 여사(홍동근 목사 부인)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이며 조선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팔순의 허정숙 여사와의 만남을 가졌다. 홍정자는 고령의 할머니가 된 허 위원장과의 대화를 통해 북측 기독교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허정숙은 1981년 이래 통일을 위해 해외 목회자, 학자 그리고 사업인 등 해외동포들과 연대해 통일운동을 펼치며 지도해온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허정숙은 기독교 학교인 배화여고를 다녔는데 세월이 흘러 원로 여성 혁명가의 모습으로 홍 여사와 대면한 것이다.

“세간에서는(서방세계) 우리 웃사람들(북조선 사람들)이 종교를 탄압한 줄로 잘못 알고 있다. 전쟁 중에 교회당이 벽돌 하나 안 남고 파괴된 것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것이었고 하층 극렬분자들에 의해 더러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백 년이 걸려도 재건 못하리라고 미국이 야유할 만큼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는 가장 먼저 인민들이 먹을 것, 입을 것, 어린 것들 공부시키는 일이 현실에선 너무도 긴박한 문제들이라 교회당 먼저 지어 줄 겨를이 없었다. 그 대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예배할 수 있도록 ‘가정예배처소’가 마련되었으며 이때 수령님도 신자들을 직접 보살펴 준 경우가 상당히 많았지.”

허정숙은 그 중 한 예를 들어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누이동생 안신호 권사의 경우를 들었다고 한다. 미주 독립운동가로 존경받는 도산 안창호는 북측 입장에서 볼 때 ‘민족개량주의자’혹은 ‘친미주의자’로 오랫동안 비판해 온 인물이었다. 안신호는 해방 후 북조선 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로서 매우 철저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북 당국으로부터 종교인으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홍정자의 설명에 의하면, 1945년 해방이 되자 평양으로 귀국한 김일성은 환영대회가 끝난 후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이끌던 중 안신호와 그 일가족을 찾아보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 안신호가 남포(진남포)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자 안신호에게 ‘남포시 여맹위원장’직책을 비롯해 ‘조선민주려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등에 요직에 임명했다. 이듬해인 1946년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협의회에 참가해 김 주석을 만난 안신호가 그 자리에서 평범한 종교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그처럼 중책을 맡겨주고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불러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자 김 주석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한다.

“공연한 이야기를 다 하십니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지식인 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인민의 참다운 민주주의 정권이기 때문에 인민 정권을 수립하는 회의에 응당 애국적인 종교인도 참가하여야 합니다. 남포시 여맹위원장이야 일제 놈들에게 오빠인 안창호 선생도 잃었고 아들도 잃었으며 지금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높은 애국심도 가지고 헌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인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미국 놈들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바에야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지 무엇 때문에 ‘미국의 하느님’을 믿겠습니까. 미국 놈들을 믿었댔자 얻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안신호는 교회밖에 모르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으나 그 후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민주 인사가 되어 북조선의 건국 사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국가와 김 주석으로부터 크나 큰 정치적 신임을 받은 안신호는 여러 차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국사를 논하는 큰 대회 또는 회합에 참석했는데 어느 날 김 주석이 동석한 자리에서 동료들로부터 우스갯소리 아닌 비웃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안신호)는 식사를 받고서는 왜 졸군(졸고 있는)하십니까? 이제는 해방이 되었는데 예수 믿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주석은 그들의 빈축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십 년 믿어 오던 예수를 어떻게 갑자기 그만두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만 빌면 일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그가 지니고 있는 애국심의 깊이와 건국 사업에 어떻게 나서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다고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멀리하며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북측의 종교 정책이나 김일성 주석의 종교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사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대목이다. 그 후 가정교회 정책을 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안신호 권사는 중요 직책과 고위 간부를 지내면서도 성경책을 끼고 살다시피 하면서 가정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평생 유지했다.
 

▲ 해방 직후 허정숙이 북측 각 지역에서 보내 온 축전을 낭독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노년의 허정숙 위원장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국가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성경책을 끼고 살은 안신호 권사
    
1884년 11월 남포에서 태어난 안신호(安信浩) 권사는 1963년 2월 6일, 약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북측의 교육자, 사상가로서 또한 기독교 정치인으로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해방 이후 안신호가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여성동맹 일을 잘 수행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해방 직후 남포 방면에 안신호가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 위원장은 안신호를 먼저 찾았다.

“그 당시 남포지구에서는 김경석 동무가 파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안신호를  찾을 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며칠 후 남포에서 안신호를 찾았다는 통보가 올라왔다. 김경석 동무에게 전화로 그 녀자의 경향이 어떤가고 물으니 그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 다니는 녀자인데 독실한 신자 같다고만 대답하였다. 나는 안신호가 이름난 애국렬사의 동생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어도 애국심만은 있을 것이니 당적 영향을 주면서 잘 이끌어보라고 김경석 동무에게 말하였다. 김경석 동무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시답지 않아 하였다. 신자들이라면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때여서 우리가 그렇게 루루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경원시하는 폐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 달 후 김경석 동무는 나에게 안신호가 입당하였다는 것과 그가 성경책 속에 당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새 조선 건설에 헌신 분투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 주석의 설명처럼 사회주의 크리스천이 된 안신호를 비롯해 영향력 있는 여러 저명한 인사들에 의해 북측의 기독교는 가정교회 형태로 명맥을 이어갔으며 이들이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전 조선노동당 간부였던 신평길의 보고서에도 1960년대 이후 북 당국은 기독교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계속 해온 기독교인들에게 소위 ‘풀어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가정예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당시 50대 이상의 연령을 지닌 신자들 위주로 모인 가정예배소는 선천, 평남. 황해도 신천 등 해방 전 기독교가 부흥했던 지역에 200여 개가 허용되었으며 평남 남포에는 안신호가 주도하는 가정예배처소, 강원도에는 도당위원장 김원봉의 모친 김모 씨가 운영하는 가정예배처소, 평양 만경대지역은 김일성 주석의 외가 친척인 칠골 강선녀 권사가 주도하는 가정예배처소, 함경남도는 영흥의 장관급 간부 문만옥의 모친 황모 씨 중심의 가정예배처소등 모두 200여 곳이 활발히 운영되었으며 이 가정교회들이 모체가 되어 2016년 현재는 513개의 가정교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초창기에는 저명인사나 고위 간부급 인사 혹은 그들의 부모를 위시한 가족과 일가친척 혹은 친지들 중심의 가정예배소가 많았으며 아울러 당시는 그들 자신이 가정교회의 자생적인 리더가 되었다. 안신호 권사는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으로서 백범 김구와 맞선을 보고 약혼까지 했으나 곧 파혼했다. 백범의 아내가 될 뻔 했던 안신호 권사는 그 후 세월이 흘러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백범을 수십 년 만에 만나 옛 연인으로서 동지로서 그의 안내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가정교회 터를 닦으며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 온 안신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통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교회를 위해서도 열정적으로 헌신하며 힘든 정치적, 사회적 여건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꿋꿋이 신앙을 지켜나간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가 생애를 마치고 타계하자 북 당국은 국가차원에서 배려해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누워 있는 국립묘역인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안장토록 했다.
 

▲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시절의 안창호(좌)와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백범(우). 안신호는 안창호의 여동생이며 백범은 안신호와 옛 교회학교 동료 교사이자 약혼관계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 권사의 가족사진. 남편은 김성탁, 딸은 김선덕. [사진제공 - 최재영]

 

▲  남북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백범을 안내하는 안신호 권사. 50년 만에 만난 백범을 안내해 대보산 영천암을 방문한 모습(흰옷 여성이 안신호, 흰옷 남성이 백범).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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