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설가의 글에서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온 이들에겐 그 어떤 첨단 기술과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도 갈음할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러한 지혜와 경륜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권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능률과 속도, 눈에 보이는 하찮은 성과만을 중시하는 비인간적인 사회 시스템은 노인(특히 경제적 능력이 없는)을 다만 처치 곤란한 ‘밥벌레’ 따위로 간주하려 한다. 무례하고 참을 수 없는 망발임에 분명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그러한 망발과 폭언, 무시와 억압을 일상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매년 약 1만 5천여 명의 생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 매일 마흔 명이 넘는 이들이 스스로 생을 접는 것이다. 이미 포성 없는 전쟁을 벌인 지도 오래다. 참 잘난 대한민국이다.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하나 둘 생을 포기하지만, 이를 사회적인 문제, 공동체 전체가 고민하고 풀어야 할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도 자살을 단지 나약한 멘탈을 가진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는, 무지하고 간악한 정치인들이 존재한다. 그런 인간들이 먼저 죽어야 한다.

그런데 더 충격인 것은 이러한 자살자 중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이 무려 25%를 넘는다는 사실이다. 전쟁과 가난, 독재의 폭압을 견디며, 오직 자식새끼들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고생한 노인들이 왜 이리 허망하게 삶을 접는 것일까. 물론, 우리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들을 낭떠러지로 몰고 있다는 것을.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된, 혹은 문제라고 인식한 척들 한 ‘어버이연합’ 스캔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금 서글펐다. 특히나 거센 집회 후 사발면을 둘러 앉아 드시고 있는 모습에서는, 분노마저 일었다. 노인들이 문제라기보다 그 어떤 개자식들이 죽이고 싶었다.

▲ 쓰쓰이 야스타카,『인구조절구역』, 북스토리, 2011. 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파프리카』의 원작자인 츠츠이 야스타카가 “나도 나이를 70세 이상 먹은 다음에야 쓸 수 있었다”고 말한 이 작품은, 그야말로 우리사회가 모른 척 외면해온 문제를 정면으로 들이댄다. ‘급속한 노령화 사회’, ‘노령화 문제’라는 단어들을 남발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회.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결국 이들이 죽어야 하는 것일까.

작품은 노령화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근원부터 따라가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노년층 각자의 ‘자력갱생’에 맡기거나, 시간이라는 방패막으로 막으려 하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결국 죽는다. 어느 누구도 예외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최소한 행복하게,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최소한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 것을 하라고 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에게 국민의 권력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급속한 노령화 사회 진입에 있어, 실질적인 해법이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노인들을 위한 복지 확충을 약속하지만, 이번 정부에서도 알 수 있듯, 선거가 끝나면 공약도, 노인들의 삶도 폐기처분된다. 그들은 다만 거수기 역할만 하면 족하다.

작품의 배경은 당연히 일본이다. 고령화 시대로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몰린 일본 정부는, 중앙인구조절기구라는 기관을 만들고, 노인 인구의 증가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시무시하게도 실버 배틀, 즉 노인 상호처형제도의 실행이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에 한해, 지정된 지구 내의 노인들은 인구에 상관없이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 정부가 정한 기한 내에 두 명 이상의 노인이 생존한다면, 중앙인구조절기구에서 파견된 공무집행자에 의해 모두 처형된다. 해외 도피나 이사는 물론 허용되지 않으며, 노인 외의 사람은 살해할 수 없다. 이제 어제까지 친구이자 동료였던 노인들은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또 죽는 지옥에 뛰어들어야 한다.

블랙코미디라는 표현이 이렇게 강하게 다가오는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 서로가 치밀한 작전 하에 때론 협력하고 때론 혼자서, 같은 연배의 노인들을 하나 둘 살해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함 그 자체다. 때로는 이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때로는 도망치려 하지만, 결론은 오직 죽음뿐이다. 내가 살려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오만해질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돌아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잔악성과 오만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보인다. 자연에 대한 경시와 착취는 그대로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에게 이어지고, 결국 같은 종인 인간에게 향한다. 우리는 행복과 자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또한 가치도 없는 이익과, 역시 풍요라는 이름으로 덧칠해진 과잉생산과 과소비에 물들어 서로를 죽이고, 스스로 죽어간다. 이 지옥의 끝은 어디일까.

지금의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원금 몇 푼을 올리거나 의료혜택을 확대하는 것 따위로는 부족하다. 노인은 늘어나고 아이들은 줄어드는 현실. 결혼은 줄어들고 이혼은 급증하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최소한의 자존감을 느끼며, 최소한의 생존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복지의 확대와 안정화는 그 시작일 뿐이다.

노인들이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느끼게 만들고, 결국 생을 끝내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라는 비정한 표현에 앞서, 엄연한 살인이자 학대다. 노인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세상은 오직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 나라,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하다.

츠츠이 야스타카가 그려낸 지옥은 물론 소설 속 허구의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지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종로3가 지하철역 안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는 수많은 노인들, 파고다 공원에 앉아 하루 종일 삶의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치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누명과 오욕과 불명예를 안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노인들은 이 비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없었다면 당연히 지금의 우리들도 없다. 공경이나 존경은 둘째 치고 일단, 그들이 인간으로서 여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빌어먹을 정치인들이나 국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책임과 임무다.

우울하고 때론 기가 막히는 장면들이 적지 않지만, 한 번쯤 양심에 찔려가며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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