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그림에는 수선화가 자주 그려진다.
특히 [책가도]나 [백물도]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꽃이기도 하다. [책가도]는 엄청난 미술적 능력과 공력이 있어야만 그릴 수 있는 작품이어서 주로 왕실이나 권세가 높은 양반집을 장식했다.
또한 [백물도百物圖]는 오원 장승업이 완성시킨 미술 갈래로 사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즉흥적인 표현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어려운 그림이다.
이렇듯 수선화는 고급스런 그림에 주로 들어가는 귀하신 몸이었다.

▲ 책가도 속에는 빠짐없이 수선화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수선화의 상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책가도는 그야말로 왕실이나 권세 높은 양반집을 장식하던 그림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책은 선비의 상징이자 전유물이었다. 책가도에는 조선 지배계층의 사상과 정서가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수선화도 진달래나 연꽃과 마찬가지로 선비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담겨있을 것이다.
18세기 김홍도나 신윤복, 정선의 그림에서는 수선화가 등장하지 않는다. 수선화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수용되면서 상징이 붙은 것으로 추정한다. 특별히 골동품이 많이 등장하는 책가도에 빠짐없이 수선화가 등장하는 점도 중국의 금석학과 추사 김정희와 무관하지 않다. 책가도에 표현되는 수선화는 땅이 아니라 접시처럼 생긴 곳에 담겨있다. 당시 수선화를 접시에 담아 키웠는지, 물로만 키워도 되는 식물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미술적 관점에서 보면 책장에 넣기 위한 의도적 표현방법이라고 본다. 자료사진 - 심규섭]
 

그럼에도 수선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이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여러 자료를 찾아봐도 그저 길상(吉祥)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물이 길상적인 상징을 가지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한 법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원들이 적절히 타협하고 조절한다고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이었던 선비들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수선화에 관해 인터넷을 뒤져보면 대략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온다.
수선화는 내한성이 강해 12월에서 3월에 꽃을 피우고 물가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수선화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전래되고, 다시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우리나라에서는 수선, 설중화, 지선, 견산, 금잔은합, 금잔옥대, 옥령롱, 제주수선 따위로 부른다.

수선화의 속명인 나르키수스(Narcissus)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나르키소스)라는 청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나르시스는 연못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은 나르시스라는 미소년의 전설에서 '자기주의(自己主義)' 또는 '자기애(自己愛)'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민담에서도 나르시스 이야기의 변형으로 보이는 쌍둥이 남매이야기가 전해진다.
무함마드의 가르침 중에 수선화가 등장하는 것이 유명하다. 그 중엔 “두 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그 한 조각을 수선화와 맞바꿔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슬람교 같은 경우도 수선화는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하고, 고대 그리스는 수선화로 사원을 장식, 장례용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수선화에 붙은 상징은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수선화라는 제목으로 영화, 시, 소설, 그림, 연극,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갈래의 여러 작품들이 창작되어 왔다.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글을 보면, 그 당시 서울에는 수선화가 없었고 추사 김정희에 의해 제주도에서 발견했다고 기록한다. 동시에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수선화의 상징이 절대미인, 선녀(仙女)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제주수선화나 일본수선화보다는 중국 수선화가 더 멋있다고 전한다.
중국의 수선화에는 주로 미인, 여선, 부부사랑, 어머니, 자손 따위의 길상적 상징이 붙어있다.

수선화가 언제부터 우리그림 속에 표현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기록에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생활을 할 때,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실제 수선화는 대부분 추사 김정희와 연관되어 있고 추사 김정희의 꽃이나 진배없다.
추사 김정희가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에부터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는데 그의 나이 55세에서 63세까지이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 수선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절강성 이남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는 촌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서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에 많게는 10여 송이에 꽃받침이 8~9개, 5~6개에 이릅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토착민들은 수선화가 귀한 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함부로 짓밟아버리며, 또한 수선화가 보리밭에 잡초처럼 많이 나기 때문에 시골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보자마자 호미로 파 내어 버리는데, 파내고 파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이를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수선화가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 수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거제도에서 나는 것을 수선화라고 부르고, 제주도에서 나는 것은 금잔옥대, 또는 제주수선이라고 부른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수선화를 귀하게 여기기 전까지는 그저 소와 말의 먹이로 사용되는 쓸모없는 꽃이었다. 아무튼 제주수선은 김정희를 위한, 김정희에 의한, 김정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이 편지를 살펴보면, 중국 절강성 이북, 즉 북경(베이징)에서는 수선화가 귀하고 보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실제 김정희는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절강성 이남은 제주도와 기후조건이 비슷할 수도 있기에 어떤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김정희는 중국에서 수선화를 보았고, 관련 예술작품을 감상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제주도 원주민이 호미로 파내서 소나 말의 먹이로 사용한다는 것은 수선화라는 이름조차 몰랐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 수선화의 상징을 기존의 선비들이 알고 있었다면 유배를 온 선비들에 의해 제주 원주민도 알았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 한양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수선화는 생소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추사 김정희가 지은 수선화라는 시(詩)이다.
이 시에는 수선화에 대한 김정희의 감정과 상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수선화

추사 김정희

한 점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에 냉철하고 영특함이 둘러있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한 송이 환한 얼굴
신선의 인연 그득하여 끝내 아낌이 없네
호미 끝에 베어 던져진 예사로운 너를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두고 공양하노라

시에서는 매화와 수선화를 비교한다.
알다시피, 매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 신념의 상징이다.
선비가 신념이나 정치적 양심을 가지려면 공부가 깊어야 한다. 학문을 통한 철학적 깊이와 정치적 양심은 숱한 선비들을 불러 모으기 마련이고 이것이 곧 정치적 힘으로 연결된다. 결국 매화는 단순히 지조와 절개가 아니라 선비 그 자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뜨락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매화는 당시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권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담담한 기품, 냉철하고 영특함,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지칭하는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유배는 사실상 죽으라고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9년간의 유배생활을 버틸 수 있는 힘은 바로 자신의 학문적 가치와 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선화의 상징은 인내, 신념, 지조와 절개를 가진 매화나 대나무, 진달래와 다르지 않다.
다만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훨씬 혹독한 시련을 담고 있다.

수선화의 또 다른 이름인 설중화(雪中花)는 설중매와 견주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수선(水仙)은 물가에 자라는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신선의 반열에 올리고자 했던 의도가 보인다. 이 모두가 제주수선화와 연관이 있다.

▲ 오원 장승업의 백물도에 표현되어 있는 수선화이다. 장승업은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후반까지 활동했던 화가이다. 장승업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는 말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수선화의 상징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수선화가 표현되어 있는 이형록(1808년~1863년 이후)의 [책가도] 작품도 대략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난다. 또한 수선화를 표현한 오원 장승업(1848년~1897년)의 [백물도]는 19세기 후반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18세기 이전의 그림에서 수선화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단언컨대,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에 의한, 김정희를 위한, 김정희의 꽃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입장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수선화는 이러한 당파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선비의 지조와 절개, 신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조선시대에서 학문적 신념과 정치적 양심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고통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 탄압을 받거나 재야를 지키는 일은 선비가 성숙해가고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사회적 삶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살아서든, 죽어서든 출세를 하고 명성을 얻는다.

결과만 중시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수선화는 분명 출세의 꽃이다. 아니 매화, 연꽃, 국화, 대나무 따위는 모두 출세를 상징하는 사물로 볼 것이다.
학문적 신념과는 별 관련이 없는 책거리와 같은 민화에 선비를 상징하는 소재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선화는 본래의 인문학적 내용은 사라지고 하얀색(옥색) 꽃잎에 노란색 부화관의 모양을 차용하여 높은 관직과 많은 재물을 뜻하는 금잔옥대(金盞玉帶)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