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북한 김일성 주석이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주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1990년 5월 북한을 방문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의장은 김일성 주석에게 "나의 가장 친근한 형님"이라고 불렀다. 2004년 11월 북한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이 사망하자 3일간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북한은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두고 '전투적 우의와 연대성'이라고 표현한다. 1966년 4월 13일 북한은 국가상태가 아니었던 PLO와 국교를 수립했다. 올해로 수교 50돌을 맞았다. 북한과 팔레스타인은 어떠한 관계였는가.

'반미, 반제국주의'로 뭉친 북한과 팔레스타인

북한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북한의 자주외교노선과 관련있다. 중국과 소련 중심외교였던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중.소분쟁이 심화되자 주체사상체계를 수립하고 자주외교노선으로 대외기조를 바꿨다. 여기에는 반둥회의로 대표되는 제3세계 국가와의 국제적 연대와 교류협력 강화를 통한 반미, 반제국주의 연대의식이 자리매김했다.

김일성 주석은 1955년 4월 반둥회의에 참석하고 이듬해 열린 당 3차 대회에서 "식민주의를 반대하며 공고한 평화를 지향하는 수억만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의 한결같은 염원을 표명했으며, 이 지역 인민들의 단결을 뚜렷이 보여줬고, 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줬다"고 말했다.

이러한 반미.반제국주의 연대의식은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지역은 1947년 유대인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영국의 정책에 따라 유엔에서 분할결의가 통과됐다.  그리고 1948년 팔레스타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건국됐으며, 1964년 이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들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결성됐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역사는 북한에게 큰 관심사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미.소에 의해 38선으로 분할되고 유엔이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결정했던 역사가 북한 자신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반미, 반제국주의 국제연대를 위한 가장 가까운 친구로 팔레스타인이 다가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결성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PLO와 1966년 4월 수교를 맺었다. 당시 국제법적으로 국가로 인정받지 않던 PLO를 북한은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국제법의 당사자' 범위로 '자주적 독립국가를 창건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혁명조직 또는 전민족적 대표기관'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민족해방운동단체로 해석된다.

물론, 민족해방단체를 국가로 봐야하느냐의 논란이 있지만, 북한은 항일투쟁운동을 예로 들며 "국제법의 당사자는 다른 나라들이 그를 국제법의 당사자로 승인한 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주독립국가, 자주적인 인민정권, 전민족적 대표기관으로 출현한 그 사실 자체로서 국제법의 당사자로 된다"고 설명한다. 

즉, 북한에게 있어 PLO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국가는 아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 영국 등 서방에 맞선 반미, 반제국주의 노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임으로 국가의 자격을 지닌 것이다.

▲ 1993년 북한을 방문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김일성 주석. [자료사진-통일뉴스]

북 김일성 주석과 팔레스타인 아라파트의 일화

수교 이후 북한은 팔레스타인에 게릴라 훈련, 일반군사훈련, 조종사훈련, 장교단교관훈련 등을 지도하고 비밀자금을 지원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PLO의 국가수립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온 것이다.

1969년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이 PLO에 대한 군사훈련 실시 및 무기제공 등 군사적 지원을 공식 표명했으며, 압둘 지하드 PLO 부총사령관이 1975년, 1980년 평양 방문해 군사적 원조를 약속받은 데서도 알 수 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PLO 소탕을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당시, 북한은 정부성명을 통해 PLO에 대한 지원병  파견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지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여기서 북한은 △사회주의와 비동맹권의 공동행동, △반제, 자주 공동전선의 형제로서의 국제주의적 의무인 지원병 파견 의사를 그 이유로 들었다.

북한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김일성 주석과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0년 5월 아라파트 의장의 북한 방문 일화가 대표적이다. 아라파트 의장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이 건조한 선박을 선물받기 원했지만, 실무자들의 사전논의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아라파트 의장이 김 주석을 만나 "가장 친근한 형님이기 때문에 외교적 관례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배를 선물해달라고 했다는 것. 이에 김 주석은 '진달래'라는 배를 건조해 보냈다.

1993년 7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자격으로 방북한 아라파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국가수립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음을 김 주석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 주석은 "조선말에 네 떡이 하나면 내 떡도 하나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한쪽 뺨을 맞고 다른쪽 뺨을 내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적들이 우리의 뺨을 치면 맞받아 그들의 뺨을 칠 것이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다른 출로는 없다"고 말했다. 이를 북한은 김 주석이 아라파트에게 준 교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과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2004년 11월 아라파트 사망에서도 알 수 있다. 북한은 3일 동안 일부 기관에 조기를 게양하는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중국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소련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유고슬라비아 요시프 티토, 시리아 하페즈 알 아사드 사망과 같은 예우를 보인 것이다.

김일성 주석과 아라파트 수반 사후 양국은 여전히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현재 김일성-아라파트 시대 만큼의 관계는 아니지만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친선협조관계"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앞으로도 팔레스티나 인민의 정의의 위업에 변함없는 지지와 연대성을 보낼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중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정치역학관계가 복잡한 속에서, 북한과 팔레스타인이 언제까지나 한결같을 지는 알 수 없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2004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2000년 12월 평양을 방문해 북.미 관계개선을 하려고 비밀리에 움직였지만, 아라파트가 평화협정 관련 회담을 요청해 취소했다는 일화처럼, 반미를 기치로 뭉쳤던 형제국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의 관심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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