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씩, 아니 제법 자주, 무참한 장면을 목격해야만 한다. ‘로드 킬’이다. 덩치가 작은 짐승부터 제법 큰 것들까지 길 위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인간인 것이, 자동차라는 괴물을 타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지곤 한다.

본래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심성이 있는 것인지, 나는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물론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그렇다고 동물들이 나를 무조건 좋아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끔 선의로 다가가도 무서운 이빨을 왕왕 드러내며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운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 녀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에게 당해야만 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나는 장난으로, 혹은 재미로 동물을 학대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빼앗는 인간들을 볼 때면 무섭도록 놀라운 살의를 느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인간이 실험했거나 현재도 유지하고 있는 사상이나 체제를 보면 안타깝게도 자연이나 동물, 생태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찾아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물론 녹색당이나 생태주의를 추구하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세계질서나 국제사회의 방향을 흔들고 있지는 않다.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조차 자연은 그저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 세계가 만약 미국처럼 에너지를 사용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살아간다면 지구가 6~8개 정도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때도 난 막연하지만 무서운 살의를 느꼈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막돼먹은 짓거리를 하는 것일까? 조금 편하겠다고? 조금 빨리 가거나 조금 시원하게 살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인간이란 이름으로 이 지구상에 현재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던 자연을 무참히 파괴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문학동네, 2012. 1. [자료사진 - 통일뉴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 생전의 마지막 출판 작품이다. 그 전에 세상에 내놓은 『강을 건너 숲속으로』가 독자와 비평가들에게 냉대를 받자, 절치부심하여 1년여 만에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제 세계문학사상 불후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불굴의 의지로 역경 속을 헤쳐 나가는 위대한 인간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듯하다. 언제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는 이런 고전을 최근에야 제대로 읽었다.

올 초에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다. 이 작품에도 역시 인간과 자연의 치열하고도 위대한 대결이 펼쳐진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는 유사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연애소설…』이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에 따른 자연의 복수 또는 처절한 저항이 주된 모티브라면 『노인과 바다』는 말 그대로 산티아고 노인과 거대한 청새치와의 생을 건 사투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줄거리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단순한 줄거리의 작품이 이토록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무엇보다 헤밍웨이 특유의 문체와 인생관이 작품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단문 위주의 ‘하드보일드’적인 어법은 감정의 과잉이 없기에 더욱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위대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공존, 또한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는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죽여야 할, 혹은 자신을 위해 죽어야 할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소중한 벗이자 형제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청새치를 잡는 것이기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고, 또한 오만한 승리감에 빠지지도 않았다. 승리와 패배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연은 산티아고에게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모든 생명체들에게 한없이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노인과 바다』가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의 사투에서 끝내 승리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줬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없이 미약한 인간이 위대한 자연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서도, 또한 자연을 존중하고 한없이 겸손한 존재 그 자체의 인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하기에, 수많은 생명들과 함께 하기에,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눈물겹게 고마운 사실을, 이젠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지속가능한 발전 따위에 거짓 선전은 그만하고 말이다. 위대한 작품을 행복하게 읽었다.

조금 생뚱맞긴 하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어쩌면 기쁨에 취해있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이 말은 해주고 싶다. 언제나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국민을 받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그들을 선출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극복의 대상이나 이겨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면, 불행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세월호 2주기가 다가온다. 이제 세월호는 그만 잊자고 떠드는 몇몇 상종 못할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이들의 정당한 슬픔과 비통과 분노를 담아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20대 국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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