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가랑비가 내리던 날 숙소로 돌아가던 북한 응원단의 시야에 비에 젖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걸린 플랜카드가 들어왔다. 이들은 플랜카드를 떼어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품었다. '태양상'이 비에 젖었다고.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은 남북의 체제 간극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일은 지금까지도 일부 보수인사들의 우스갯감으로 활용되고, 북한이 독재국가임을 증명하는 소재로 써먹히고 있다.
2016년 3월. 북한 김일성.김정일의 사진과 초상화인 '태양상'을 두고 손가락질하는 한국사회에서 때아닌 '존영(尊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최근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들에게 '대통령 존영을 반납하라'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존영'은 사전적 의미로 '남의 사진이나 화상 따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말 그대로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사진을 높이 부르고 싶을 때는 '존영'이라고 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존영'은 단순한 높임말을 넘어선다. 일제강점기 당시 1930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 교체를 보도하면서 '양폐하어존영(兩陛下御尊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도 이들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존영'은 단순히 남의 사진을 높이 부르는 의미가 아니라 권위와 독재를 상징하는 단어인 셈이다.
그렇기에 1987년 6월항쟁 이후 군부독재의 때를 벗고 싶어했던 노태우 정부는 출범과 함께 '존영', '재가', '하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님'에서 '님'이라는 꼬릿말을 떼라고도 했다. 군사독재를 경험한 국민에게 탈권위를 보여주려한 시도였다.
그래서 이번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두고 새누리당이 '존영'이라고 붙인 표현은 듣기 거북할 뿐만 아니라 독재로의 회귀를 느끼게 하는 소름을 준다. 게다가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나라라며 '태양상'을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 떠받드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현지지도 사진을 보면 주위 인물들이 하나같이 수첩을 들고 뭔가 적고 있다. 그런데 청와대만 들여다봐도 대통령이 말을 하면 국무위원이나 수석들이 하나같이 수첩에 적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야하는가.
'태양상'에 침을 뱉고 '존영'에 무감각하며, 독재 찬양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득실거리는 이 사회가 몸서리치게 무섭다.


'태양상' 손가락질하더니 '존영'이 웬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