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기는 김홍도의 아들이다.
호는 긍원(肯園)이고,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은 연록이다.
김양기를 궁중화원을 지냈으며 산수, 인물, 풍속, 회조, 영모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작품은 많지 않으며 행적에 관한 기록도 별로 없다.
다만 선비화가였던 조희룡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김양기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희룡은 가법(家法)을 이어받아 산수와 집과 수목을 잘 그렸으며 아버지보다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김양기가 가법을 이어받은 것은 틀림없지만 아버지보다 뛰어난 미술적 기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김양기는 김홍도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김홍도 나이 48세 때 후손이 없어 조령산 상암사에 있는 불상개금과 탱화조성에 큰 시주를 하고 치성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805년, 62세의 김홍도가 15세 된 아들 연록 김양기에게 쓴 편지가 전한다.

아들 연록 보아라.

날씨가 이토록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히 지내며 너의 공부는 한결 같으냐?
내 병의 상태는 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 자세히 썼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김동지(金同知)가 직접 가서 이야기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너의 선생님 댁에 보내는 월사금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는 쓰지 않는다.

을측년(1805) 섣달 19일 아버지 씀

정조의 화가였던 김홍도는 1800년 정조가 급작스럽게 죽으면서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을 것이다. 정조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나 환갑의 나이에 김홍도는 녹취재 시험을 보기도 한다. 이미 김홍도는 전설적인 화가로 추앙받았지만 한참이나 어린 제자뻘 화원들과 경쟁을 한 것이다. 아들의 학비를 대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서 15세면 다 큰 나이다. 동시에 사회로 나아가 활동을 준비할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에 아버지 김홍도의 어려움을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김양기는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의 아들이다.
당연히 김홍도에게 그림을 배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제자들보다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엄격하게 그림을 가르쳤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홍도가 아들 김양기만은 그림을 그리지 않기를 바랐다고 한다. 뭐, 왕과 양반을 위한 그림만을 그려왔던 김홍도의 고통 때문이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희망사항이다. 중인과 선비를 이간질하려는 계략이다. 이런 허접한 계급논리를 이용한 이간질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잘 써먹던 방식이다. 여기에 수많은 지식인이 넘어가 친일을 했다.
김홍도는 선비의 삶을 꿈꾸었던 중인이었다. 선비의 풍모와 지조와 절개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했다.
또한 아들 김양기가 그림을 빼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인맥과 명성은 김양기가 활동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다. 이것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우측-김양기필/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122*40.1/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좌측-김양기/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91*55/19세기/일본 유현재. [자료사진 - 심규섭]

이 그림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송하맹호도]이다.
그림 하단에는 [조선-김긍원]라는 글귀와 낙관이 있는데...나는 김양기의 글씨체나 낙관을 감정할 능력은 없다. 아무튼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김양기의 진품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그림 속에 '조선'이라는 글을 넣은 것은 주로 수출용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필요한 물품을 요구하여 무역을 했는데 이를 구무품이라고 한다. 주로 동래왜관이나 초량왜관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상인에게 인기가 있었던 물품 중에는 호랑이그림과 매그림이 있었다.

김홍도의 호랑이그림이 일본 귀족에게 비싼 값으로 팔렸던 경험이 있다. 대표적인 그림이 [죽하맹호도]이다.
특히 김홍도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들 김양기의 작품도 인기가 있었다. 실제 일본에는 김양기 그림과 비슷한 호랑이그림이 제법 발견되는데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것은 김양기의 호랑이그림이 인기가 높고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림 속의 호랑이의 자세는 아버지의 그림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반적인 부분에서 아버지 김홍도의 그림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김홍도의 호랑이는 치밀한 묘사와 안정된 구도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온몸에서 풍기는 위용과 총명한 표정은 압권이다.
하지만 김양기의 호랑이의 표정은 조금 야비(?)해 보인다. 무섭지도 않고 총명하지도 않다. 호랑이의 위용을 잃어버리면 곧바로 고양이나 살쾡이가 되어 버린다.

이 그림을 김양기가 최선을 다해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판매용이라 대충 그렸을 수도 있다. 특히 호랑이그림에서는 아버지 김홍도의 영향이 너무 강했다. 가끔 왼쪽 그림처럼 온몸이 앞쪽을 향해 있는 자세를 그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어쩌면 김양기는 호랑이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인신분이었던 김양기도 결국 치열하게 먹고 살아야했다. 말년의 김홍도가 학비를 대기 힘들만큼 가문의 경제적 상황은 어려웠다.
그림주문을 받기 위해서는 더운밥 식은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 김홍도의 호랑이그림을 요구하면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서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독창적인 화풍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했을 김양기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이 된다.

김양기는 화원을 지냈다.
화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어쨌든 김양기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하여 화원이 되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 김양기의 실력이나 작품세계를 평가하기는 부족하다.

▲ 김양기/유압도/종이에 담채/92.4*49.3/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김양기가 그린 [유압도]는 봄날 오리가 노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안정감 있는 구도와 농익은 필선은 과감한 구도는 아버지 김홍도에 못지않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양기는 아버지 김홍도의 명성과 능력을 넘을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김양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비록 아버지의 명성을 넘지 못했지만 김양기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화원을 직업으로 가진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김양기의 능숙한 붓질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유압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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