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향한 과거로의 회귀는 퇴행이며, 이상적 자아에 대한 과잉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이고 진정성의 상실은 분노로 표출된다. 이것들은 IMF 이후 진정성의 토대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확장되면서 부상했다. 우리는 지금 허기사회에서 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에 대한 저자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할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스스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허기’를 애써 부정할 이유도 여력도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우리는 명백히 지치고 또한 허기져있다.

▲ 주창윤, 『허기사회 -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 글항아리, 2013. 5.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한국 사회가 마치 식탁에서 밥을 먹은 뒤, 빈 밥그릇을 보면서 허기를 느끼는 ‘빈 밥그릇의 허기’가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 허기는 욕구의 배고픔이 아닌 ‘갈증의 배고픔’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문화적 특징 아래 깔려 있는 ‘정서적 허기’를 말하고 있다.

정서적인 허기는 경제적 결핍과 관계적 결핍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경제적 결핍은 말 그대로 경제적 관계로부터 야기되는 허기이고, 이것은 다시 관계적 결핍을 부르는 토대가 된다. 저자는 지금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관계적 결핍의 현상들을 살펴본다. 그것들은 퇴행적 위로, 나르시시즘의 과잉, 속물성에 대한 분노, 관계 맺기의 집착 등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살아가기 힘든 사회라면, 누구나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신의 근면함이나 성실함이 사회 전체의 불의나 부정으로 인해 그야말로 ‘무시 혹은 부정’당한다면, 이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분노와, 또한 그에 못지않은 체념의 모습은 지금 우리네 삶이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힐링이라는 문화코드의 확산과 위로의 문화. 또한 가벼운 즐거움에 빠지는 사람들이 첨단 디지털 문화에 빠져 추구하는 ‘스낵 컬처’. 사람들은 ‘초미세한 지루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또한 정작 잘못은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채, 힐링과 위로를 받으며 안도한다.

위로의 문화는 언뜻 자상하고 따뜻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을, 혹은 잘못된 문제를 온전히 자아의 성찰로만 극복하라는 또 다른 폭력을 가져온다는 점은 무시된다. 사회적 인과관계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온전히 정서적인 결정으로 그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는 것. 이것 역시 명백한 폭력이다.

저자는 또한 상대를 배제하며 동시에 모방하는 ‘과잉사회’를 허기사회의 다른 형태 중 하나로 설명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모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위기감. 이는 사이버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누군가를 그야말로 ‘신상털기’를 통해 매장시켜야 끝을 맺는다. 연예인 타블로의 학력을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광기와 ‘김여사’ 조롱 등은 사이버 희생양 메커니즘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초고속 광랜보다 빠른 신상털기의 공포 앞에 누구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상. 이는 최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유행을 통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특정 인물과 그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지켜본다. 그게 정작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알면서도.

또 하나의 현상은 앞서도 언급한 ‘분노’다. 이는 타자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속물사회를 만들어낸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속물적 지배를 선택했다. 가리려고 해야 도저히 가릴 수 없는 치부를 안고 있던 이를, 단지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말만 믿고 대통령으로 뽑아버렸다. 스스로 속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그 허탈감과 자괴감은 대한민국을 분노와 수치의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대중은 과거의 불의, 부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정작 오늘의 불의는 외면하려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듯한 각종 복고적 문화와 드라마가 유행하고, 수백 만이 오디션 프로에 참가해, 스스로 불행했던 과거를 경쟁하듯 내보이며 스타가 되려 한다. 승자독식의 룰을 스스로 철저히 추종하며, 이율배반적으로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경제적 결핍으로 오는 관계적 결핍을 SNS를 통한 무의미한 관계 맺기의 확장으로 만회하려 한다. 무의미한 ‘좋아요’ 누르기로는 그러나, 결핍을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과잉의 표출일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확대와 연관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양극화,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결핍 현상은 대중의 심리적 억압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면서 “계층, 분야, 지역,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경계와 폐쇄성, 기계적 효율성만을 내세우는 성장주의”는 오늘도 견고하게 대중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게릴라 되기와 눈부처 주체를 말하고 있다. 권력의 허위를 무너뜨리는 게릴라 담론의 형성은 ‘나는 꼼수다’를 시작으로 수많은 팟캐스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서 확인된다. 세상을 현실의 공간으로 인정하면서도 또한 하나의 놀이터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게릴라 되기의 시작일지 모른다.

아울러 희망버스를 통해 새롭게 인식된 눈부처 주체. 이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쳐다보면, 그 속에 비춰진 내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진정한 실체를 상대방을 통해 찾는 인식,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실천적 행위까지를 말한다.

밀양 송전탑을 두고 싸웠던 할머니들을 위한 전국적 연대의 움직임,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변함없는 연대의 모습에서 우리는 눈부처 주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짧은 분량이지만, 책이 전해주는 묵직함은 남다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철저히 발가벗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허기가 가득한 사회에서는, 결국 연대와 솔직함을 통한 ‘채움’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적이 아닌 ‘우리’로 보는 자세, 불의 앞에 최소한 솔직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는 마음,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그 눈에서 비로소 나를 찾는 연습.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 채워지지 않을까.

무언가에 끊임없이 허기져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정호승, <눈부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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