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바 ‘새내기’라 불리던 시절. 나름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심히 부끄러운 짓을, 당시에는 거침없이 저지르고 다녔고, 그야말로 철이 없다는 것과 무지하다는 것의 엄중한 차이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자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시간이 결국 신(神)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지금도 ‘미국’이란 단어를 끄집어내면 자연스레 딸려오는 기억이 있다. 맞다. 바로 그 새내기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갓 생겨난 학과의, 무려 제1기라는 부담과 원인모를 자부심을 함께 지니고 있던 나는, 이른 바 ‘직속 선배’의 부재가 얼마나 큰 손실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물론 훗날 뒤늦게 휴학-입대-제대-복학생의 수순을 밟아가며, 매일 털리는 지갑을 통해 ‘선배’의 운명과 애환을 절감케 되지만. 암튼 선배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알기에는 아직 덜 자란 녀석이었다.

당시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음주가무를 통한 호연지기가 주된 활동이었고, 시를 끼적거렸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곳은 선배가 있었다. 선배의 좁은 자취방에 구겨 앉아 다른 친구의 어느 시 구절에 그만 울컥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벌게진 눈을 끔뻑거리곤 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당연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런데 당시 내 어리석음과 치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오줌을 누러 밖에 나가, 먼 산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였다.

“이 자식, 영 글러먹은 녀석 아냐?”
따라 나온 한 선배가 ‘툭’ 하니 던진 말이었다.
“네? 선배 무슨 말이에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며 오줌을 갈기는 나의 삼중 동작에 왜 기함을 한단 말인가. 순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생각이 있는 자식이냐? 양담배에 지포 라이터까지. 네가 양키냐, 이 새끼야?”

솔직히 취기가 번쩍 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게 당최 뭔 소리지?’하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물론 품질 좋은 국산담배도 있고, 삼백 원짜리 일회용(이라 쓰고 수백 번 사용 가능한 놈이라 부른다.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라이터도 있다(거의 다 중국산입니다요!).

나도 안다.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을 이유로 나를 ‘양키’라 폄하하는 선배에게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고작, 기껏, 겨우 담배와 라이터로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평가해도 되는 것인가. 나를 그렇게 매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울 엄마도 아니면서 어따 대고 새끼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내 침묵의 의미가 아마도 자신의 지적에 대한 부끄러운 수긍이자, 반성의 표현이라 느낀 것 같은 선배는 오줌을 시원스레 갈기고, 역시 시원스레 담배를 빠끔거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빨랑 들어와 인마! 더 마셔야지!” 한마디와 함께.

스스로 납득을 하지 못했음에도 그 자리에서 선배에게 제대로 된 반박 또는 항의를 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정작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스르르 느껴지는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 설명하기 힘들다.

학교에 오기 전 공부와는 담을 쌓고 대신 조그만 구멍을 뚫어 그 사이로 ‘딴따라 짓거리’에 매진해온 나.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온전한 사색 따위도 전무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난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육박해온 선배의 힐난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부당한 지적이었다. ‘양키’인 것과 ‘양담배, 지포라이터’는 언뜻 연결되는 것 같지만, 과도한 일반화였다. 지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케 마신다고 모두 ‘쪽바리’로 매도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난 부끄러웠다. 아무리 뇌 속에 들어있는 것이 빈약한 놈이었다 해도 양담배와 지포 라이터의 상징성을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억울해도 참았고, 슬그머니 반성 비스무리한 것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당시 ‘나쁜 선생’을 만나 우리의 참담한 현대사를 비로소 깨우쳤고, 고교 시절 얌전하고 홀로 고독을 씹고 다니던 한 녀석이 건네준 ‘5·18’ 비디오 테잎으로 내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주 의식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존재의 복잡 미묘함을.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나름 고민했던 시간을 조금은 가질 수 있었다.

난 이른 바 양키 음악을 좋아해서 딴따라 생활을 했다. 헤비메틀, 락앤롤, 하드락,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트래쉬 메틀, 스피드 메틀, 프로그레시브 메틀, 고딕 메틀, 바로크 메틀, 데쓰 메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양키 음악’을 섭렵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급기야는 ‘쪽바리’의 음악까지 다양하게 들었다. 음, 생각해보니 맞아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인 것일 수도….

곧 죽어도 변할 수 없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분명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고, 인종도 없고, 빌어먹을 증오와 적대감 따위도 가질 수 없다고. 나에게 감동을 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음악이라면, 그 어떤 노래든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편견과 차별 따위의 단어와는 애초부터 쿨하게 이별할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무작정 추종하거나, 묻지마 애호가 아니었다. 지금도 변함없고.

그러니 양담배와 지포 라이터도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 고교 2년 당시 나에게 담배를 가르쳐준 아주 아름다운 친구 녀석이 건네준 최초의 담배가 ‘말보로 레드’였다는 구차한 변명도 여기에 덧붙여 본다. 고마운 새끼, 아주 그냥….

미국은 분명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국가다. 맹목적인 친미와 반미 사이에서 대충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같잖은 양비론을 들이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객관적이고,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미국이란 국가를 평가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선망의 대상. 피로 맺어진 동맹. 동시에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입각해 한반도를 분단시켜버린 국가. 지금도 한반도의 운명을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다루는 국가. 여전히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를 놓지 않으면서 전 세계를 이익 관철의 장으로 삼고 있는 국가. 암튼 미국은 단순한 평가가 불가할뿐더러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미국을 잘 알고 있을까? 이 땅 대부분의 먹물들이 미국 유학 출신이라는 것을 가장 큰 벼슬로 삼고 있고, 그를 바탕으로 카르텔을 형성해 권력의 중심부에 진출하고 또 승계하는, 아주 진부하고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자면 분명 그 중 아주 조금이라도 ‘미쿡 전문가’는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지하게 찾기 어렵다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미국을 추앙하고 숭배하고 우러러 마지않는 이들은 널렸으나, 정작 미국을 꿰뚫어보는 이들은 찾기 어려운 현실. 뭐 어쩌랴. 이게 약소국의 팔자려니 해야지, 하면서도 가끔 울화가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 크리스 헤지스 지음 / 김한영 옮김 / 『미국의 굴욕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의 5가지 불편한 진실』/아름드리미디어 출판 /2011년 9월.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언론인이다. 50개국 이상을 취재한 경험이 있고, 나름 글발도 인정받은 이다. 이런 그가 미국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5가지는 많은 부분 한국의 현실과도 겹친다. 대중연예문화, 포르노그래피 산업(이건 우리에겐 성매매 문제로 더 심각하다), 엘리트주의 교육, 당최 의심스러운 돈벌이 긍정심리학 그리고 금융위기다. 5가지 주제에 대한 소제목만 보아도 저자가 느끼고 있는 심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의 환상 - 대중문화의 덫과 문맹의 부활, 사랑의 환상 - 포르노그래피와 인간성의 종말, 지혜의 환상 - 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행복의 환상 - 긍정심리학의 허구와 조작된 행복, 미국의 환상 - 법인형 국가의 실체와 껍데기뿐인 제국.

그의 비판은 신랄하다. 프로 스포츠, 연예 산업과 유명인 문화, 리얼리티 예능 프로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홀리고 일상을 규정하는 나라,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과 돈,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용해먹는 나라. 우왁, 어디서 어인 일인지 상당히 친숙하다.

어느 새 우리도 그렇다. 이 엿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스마트폰에, TV에 얼굴을 처박는다. 심각하고 골치 아픈 것은 싫다. 바로 그 심각하고 골치 아픈 것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좌우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으면 된다.

아울러 그는 지적한다. 자유 시장과 세계화가 한때 전 세계의 번영을 약속했지만, 결국 손쉬운 사기의 두 부분임이 폭로되었다고. 전체주의는 신념의 시대라기보다 정신 분열의 시대라고. 그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한다. “사회의 구조가 극악하게 인위적으로 변할 때, 그 사회는 전체주의가 된다. 이때 통치 계급은 자신의 기능을 잃고 무력이나 사기를 이용해 권력에 집착한다.”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 지위를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국민들이 행복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며 살아온 이들도 이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미국의 저력인지도 냉철히 인식해야겠지만, 무엇이 미국을 무너지게 만들고 있는지도 분명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붕괴 역시 막을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몇 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과 죽음을 덮고 있을까.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신이고, 그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악의 탄생이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 내면을 돌아봐야 한다.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을 보라. 무엇이 보이는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어느 정도 미국물이 들어있다. 자의든 타의든. 하지만 그 물에서 어떻게 놀지는 각자의 책임이자 권리가 될 것이다. 아님 뭐 스타일이라도.

아, 여전히 난 양담배를 즐겨 태우고 지포 라이터를 가지고 다닌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지만, 순수함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순수 상태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괴물로 변한다.”
- 제임스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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