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Daum영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붐비는 뉴욕의 맨해튼 백화점 장난감 매장. 매장의 점원 테레즈는 여느 날처럼 출근하여 분주하게 개장 준비를 한다.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밀려드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는데 문득 인파 사이로 한 손님이 눈에 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바라보는 테레즈. 이것이 테레즈의 시작이다.

어린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간 캐롤. 장난감을 고른 후에 그만 계산대 위에 장갑을 놓고 오는 실수를 한다. 친절하게도 점원이 장갑을 부쳐주었는데, 산타 모자를 쓴 그 앙증맞고 풋풋한 점원을 캐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운명처럼 다가온 기회 앞에 망설일 겨를도 없이 전화를 걸고, 식사를 대접하고, 집으로 초대하고, 둘만의 여행을 제안하기까지 캐롤은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는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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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 두 사람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이끌려든다.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에게 끌림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감정이 늘 서로에게 등가로 교환되며 유지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는 테레즈와 한 사람에 대한 열망에 모든 것을 거는 캐롤, 두 사람의 미묘하고 위태로운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숨막히게 아름답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은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테레즈에게는 이미 그녀만 바라보는 남자 친구가 있다. 캐롤은 남편과 아이가 딸린 유부녀이다. 물론 둘 다 파트너와의 관계가 견고했던 것은 아니다. 테레즈는 자꾸 들이대는 남자친구가 왠지 부담스럽고, 캐롤은 억압적인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테레즈의 남자친구와 캐롤의 남편은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불운한 사나이가 되어 버렸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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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테레즈와 캐롤로 하여금 서로를 사로잡게 했으며 기존의 파트너와 완전한 결별에 이르게 했을까. 테레즈의 남친과 캐롤의 남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상대의 감정이나 욕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고, 또한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 주기를 바란다. 테레즈의 남친은 유럽 여행 생각뿐이다. 물론 테레즈한테 함께 가자고 조르며 안달이 나 있다. 캐롤의 남편은 가정보다 사업이 우선이다.

캐롤의 자유분방함을 못마땅해 하는 시집 식구들이 캐롤을 압박하는 상황에도 수수방관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아내를 소중한 액세서리처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 일방적인 관계가 수용되지 않았을 때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상대를 어떻게든지 붙잡아두려고 겁박하고, 비열한 수를 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대비된다. 테레즈와 캐롤은 서로를 관찰하고, 서로의 관심사나 취향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세심하게 배려한다. 말이 통하는 관계이다.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들기까지 유리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내딛는 사랑의 발걸음은 보는 이도 가슴을 졸이게 한다. 사랑은 고도의 소통 과정이다. 자주적인 인격의 만남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랑이란,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두 사람이 기존 파트너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랑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성보다 동성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계, 즉 진짜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랑은 없다. 교과서적인 사랑도 없고, 사랑의 정석이라 할 만한 모범 답안도 없다. 그러기에 모든 사랑 이야기는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예측 불허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영화는 바로 이 사랑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낯설고 불안하고 종잡을 수 없으며 위험하기까지 한 길이다. 첫 번째 사랑이 아니라도 그렇다. 매번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는 여정이 펼쳐진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이다. 사랑에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사랑에 임하는 보편적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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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와 캐롤의 사랑에는 더욱 결정적인 난관이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은 동성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뉴욕은 동성애에 대해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이성애를 당연시했던 테레즈는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이 특별한 감정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미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확연히 자각하고 있던 캐롤조차, 비록 파국을 맞긴 했지만, 이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선택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캐롤의 동성애 취향을 문제 삼아 아이의 양육권을 박탈하고 심리 치료를 요구하는 법원의 판결은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태도는 1950년대 뉴욕보다도 못하지만 말이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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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으로 둘러싸인 이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영화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랑은 인간을 무엇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영화는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애와 시련 중의 한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 그리고 시련은 사랑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사실 시련 없이 자라난 사랑은 그것이 정말 사랑인지, 그 진심의 굳기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시련은 사랑을 성숙시키고, 목숨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걸어 본 사랑의 진정성은 삶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의 생은 사랑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테레즈의 안온한 삶은 캐롤을 만나 격랑으로 쓸려 들어가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매사 순응적이고 수용적이던 테레즈는 단단하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그리고 용감해진다.

캐롤은 강한 여성이지만 비열한 공격과 사회적 편견은 그를 절망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인간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커밍아웃이란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에 대한 침해에 맞서는 인간성 옹호의 선언이다.

캐롤이 울며 매달리거나 변명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나는 두렵지 않아!”라고 외칠 때, 나는 감격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녀는 분노하고, 그 분노를 현명한 의지로 제어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 인간으로서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이며, 결코 타인에 의해 통제되거나 용인이나 허락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감정 ‘사랑’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통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더구나 이러한 공격이 ‘윤리’의 이름으로 그녀의 ‘행실’을 지적하는 모욕을 가할 때, 그녀는 그 추악한 싸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우리는 법정으로 가게 될 거고, 일은 추해질 거야. 근데 우리는 추한 사람들이 아니잖아.” 분노를 억누르며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기 노력하는 캐롤의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찬란한 장면이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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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름답고 눈부시다. 순진한 테레즈와 도발적인 캐롤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시선과 분위기만으로도 그 떨림과 요동을 느끼게 한다. 테레즈 역의 루니 마라는 순수하고 사랑스럽다. 캐롤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의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모습은 관객의 심장을 떨리게 할 만큼 고혹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감정의 혼란과 외부적 장애를 그리면서,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랑의 시작은 자신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힘은 바로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배려와 용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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