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Daum 영화]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영화 <내부자들>에서 정치 깡패 안상구가 하는 말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 중 최초로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하여 화제가 된 <내부자들>뿐 아니라 근래의 흥행작들은 대개 정의 없는 대한민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2015년도 흥행순위 1위인 <베테랑>에서는 안하무인 재벌 3세가, 흥행 2위를 기록한 <암살>에서는 후안무치 친일파들이 정의롭지 못한 세력으로 응징의 대상이 된다. <내부자들>에서는 부정의의 중심이 정치 질서에 맞춰지며 정계, 재계, 언론의 추악한 공모에 의해 창출되는 권력 체제가 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의 지배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미 800만 관객을 넘겨 2016년 첫 흥행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 <검사외전>은 <내부자들>의 말랑말랑한 버전쯤으로 볼 수 있다.

▲ [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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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검사 변재욱은 불법 정치 자금과 연루된 리조트 개발 회사를 잘못 건드린 죄로 누명을 쓰게 된다. 15년 받고 감옥에서 5년을 썩었을 때 우연히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해 줄 수 있을 듯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자가 허우대만 멀쩡하고 사기 전과 9범에 입만 열면 거짓말과 허세인 날건달이다. 하지만 결백을 증명할 기회만 노려 온 변재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신뢰할 수 없는 사기꾼이 그래도 머리는 좋은 고로 열심히 교육시켜 감옥 밖으로 내보내 주고 원격 조종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변재욱의 억울한 감옥살이 사연이 정색하고 전개되고, 사기꾼 한치원의 등장부터는 대비되는 두 캐릭터의 밀당이 진중한 큰형과 말썽쟁이 아우가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영화적 재미를 돋운다. 후반부는 한치원의 유쾌한 원맨 쇼, 처음에는 변재욱에게서 벗어나려고 앙탈을 부리지만 변재욱에게 엮인 이상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변재욱 살리기에 나서게 된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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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사라지고 복마전 같은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결국 그 주역의 자리를 꿰차는 것은 사기꾼. 그러나 “즐겁게 살자”가 생활신조인 한치원에게 정의 구현에 대한 사명감 따위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렇다면 변재욱을 위해서? 나 하나 살기 바쁜 한치원에게 그런 오지랖은 결코 없다. 변재욱을 위해서가 아니라 변재욱이 살아야 자기가 살기 때문이다. 한치원의 동력은 오로지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의 실종 사태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그냥 대명천지에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기를 쓰고 애국심을 호소하고, 총리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줄 알아야 애국자라고 한다. 공무원 면접시험에서조차 애국가 테스트를 하는가 하면, 개정 공무원법에서는 공무원이 추구해야 할 공적 가치에서 총리의 지시로 민주성, 도덕성, 투명성, 공정성, 공익성, 다양성이 삭제되고 애국심, 청렴성, 책임성만 남았다.

민주주의, 법치, 다양성, 평등, 자유 등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지만 ‘애국’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렇듯 지고의 가치로 ‘애국심’을 부르짖는 나라에서 그 애국의 대상 ‘대한민국’이 정의가 사라진 지옥이라 전혀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설하는 것은 천기누설의 중범죄로 다스려야 마땅할 법한데, 정의 없는 대한민국 담론은 건재하기만 하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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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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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 다른 결로 정의 없는 현실을 그린 영화들이 있다.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소수의견>은 공권력의 폭력성을 부정의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쟁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카트>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우리가 해결해야 할 부정의한 상황으로 제기했다. 정의 없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포착한 이런 영화들은 그러나 정작 상업영화로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현실의 부정의에 통쾌한 일격을 가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수의견>과 <카트>처럼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영화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현실에서 맛본 무력감과 패배감을 곱씹고 싶지는 않으리라. 영화는 대리만족의 도구이다.

또는 <소수의견>의 양심적인 변호사든 <카트>의 비정규직 노조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의지도 불의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서 이기기 어렵다는 깊은 패배의식이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아니,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주는 불편함과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거대 권력과 싸워 정의를 바로잡는 일은 너무나 요원하여 우리는 저항의 손을 놓았다. 정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권력을 향해 “국가의 주인은 국민입니다!”라고 일갈(영화 <변호인>)하는 대신, 이 정의 없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걸머진 이들은 이제 깡패, 사기꾼 같은 범죄자들이 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없는 암울한 무법천지를 평정할 힘을 또 다른 범죄자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처지는 옹색해졌다.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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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테랑>의 주인공은 평소 범인 검거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문제 있는 경찰인데,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며 경찰로서의 위신을 지키려고 재벌 3세랑 맞장까지 뜨게 된다. <내부자들>에서 상황은 더 심각해져, 한때 출세를 위해 검찰 조직에 충성을 다 바치다 좌천된 인물과, 욕심 한 번 잘못 부려 인생 망친 정치 깡패가 뒤늦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의기투합하여 반전의 복수극을 꾀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애초에 정의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영화 <검사외전>에 이르면, 피의자 인권에 대한 의식이 아예 없는 폭력 검사와(이걸 ‘거친 수사 방식’이라고 표현하다니!), 멀끔한 얼굴과 잔머리에 말발로 순진한 여자들과 선량한 사람들을 등치고 살아온 사기꾼이 한 팀이 되어 벌이는 복수극의 결과, 정의는 덤으로 얻어지게 된다. 오락물이 되어 버린 현실 고발 영화는 현실에서 눈을 돌린 영화보다야 낫겠지만, 더 이상 위험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폭력 검사 변재욱이 자신의 폭력적인 피의자 조사 과정이 누명의 빌미를 제공했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하였으며 감옥 가서 자신 또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게 했다는 사실을 성찰할 줄 안다는 점이다. 5년의 수감 생활을 억울해하기보다는 폭력 검사로서 치른 죗값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최후 진술은, 조금 엉성하고, 그래서 <내부자들>이 잘 차린 정찬이라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패스트푸드 같은 이 영화의 아쉬움을 덜어 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사진출처-Daum 영화]
▲ [출처-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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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이유가 어디 주제의식에만 있을까. 비장하거나 슬픈 배역을 주로 연기하던 강동원이 저런 면모가 있었나 싶게 한없이 가벼운 남자가 되어 나타나 발산하는 매력은 그야말로 심쿵! 기대 이상이다. 강동원이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독보적인 사기꾼 유형을 만들어내며 치밀하지 못한 서사의 구멍을 메우는 그의 존재감은 영화의 후반부를 밀고 가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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