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고백해야겠다. 적당한 삶이란, 저자의 말마따나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리고 파스칼의 말처럼 ‘이해하기도 전에 동의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음에도, 짐짓 이해하는 척, 건방지고 무책임하게 동의해버렸다.

이 세상을, 우리네 삶을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말들에 어느 새 주저앉아버렸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구석에서 나 몰라라 덕후(오타쿠) 행세나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2015년 끄트머리에서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말들을 꼽아보라면 불행히도 그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장’을 선택하기 두려울 정도로 많은 참혹함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난 문득 이 말을 떠올린다. “일하기 싫으면 그만 둬,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

이 말은 이제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하는 것이 그토록 영광일까?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내가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이는 나에게 무한한 영광을 베푼 것일까? 이게 이치에 맞는 모습일까?

뜬금없이, 왜 미생스러운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어줍지 않게 마흔이란 나이에 들어 불어 닥친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진정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위의 고민은 물론 아니다. 그런 고민은 지금껏 매일매일 하면서 살아왔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스스로 별 것 아닌 존재들로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을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급기야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1.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 그리고 삶의 공동화를 이해하기 위해 어떠한 ‘언어’들의 미미한 차이점을 찾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체험과 경험, 기대와 희망, 힘과 용기, 공감과 동감, 장소와 공간의 차이였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들은 그러나,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간극을 보여준다.

그냥 이대로, 어쩐지 우리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온전히 나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아니라 정작 원인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또 눈물 나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인지, 말 그대로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강의하고 있는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입학과 동시에 취업 등 성공의 문이 열려 있는 이들이 아닌, 언제 어디에서 삶의 파국을 만날지 알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상실과 불능을 확인하고, 회복과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물론 해답은 책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파국과 단절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가능성의 밑절미가 될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용기는 어떻게 누구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

우린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 내 삶에 대한 누군가로부터의 응원이다. 그 응원이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고, 나를 억누르는 힘들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되어 준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누군가의 응원.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힘과 용기를 만들어낸다.

책은 온통 회색빛이다. 일그러진 우리 사회, 우리네 삶은 도무지 파국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인다. 경쟁과 경쟁, 그리고 또 다른 경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시스템은 낙오와 배제를 합리화시키고, 불의와 불평등을 합법화 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높은 곳으로 ‘떠나간 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선 소수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오직 선거가 치러질 때만 ‘구성원’이나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이 정도로 망가진 사회에선 그 어떤 현인이 출현한다 해도 회복이 어렵다.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한다는 판타지는 그저 우리 삶을 위안하는 슬픈 동화일 뿐이다. 오히려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회를 이상적인 세상으로 묘사하는 변태들을 양산할 뿐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오직 응원과 연대뿐이다. 뒤틀린 삶에 맞설 수 있는 용기는 절대 혼자서 낼 수 없다. 용기는 동료로부터 응원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저자가 인용하는 만화 <원피스>에서 주인공 루피는 말한다. “그래, 난 검술도 할 줄 모르고, 항해술도 없고, 요리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해. 난 도움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 때문에 루피는 말한다. “너는 나의 동료다!”

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개인을 철저한 ‘개인’으로 몰아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매일매일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 되어버린 사회를 고발한다.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사회를 위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작동하고 복무해야만 할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결코 무기력하게 책을 맺지 않는다. 삶의 이후엔 당연히 또 다른 삶이 존재함을,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하루하루 모욕을 감내하는 것이라 해도, 이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말한다. 삶은 끈질기기에 위대한 것임을.

여기에 필요한 것은 물론 동료이다. 내 삶이 삭제되지 않고, 휴지통에 처박히지 않고 끝내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동료가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두렵지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망해가는 세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 앞에 그저 부정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무엇을 바꾸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 끈질긴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 지켜주고 싶은 누군가를 응원하고, 또 응원을 받으며 신나게 이야기하면 족하다. 망해가는 세상을, ‘망해간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받고 미미하지만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상처받지 않아도 좋다. 삶이 어쩔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좋다. 이 세상에 그 많은 참혹함을 다 껴안을 수는 없다. 먼저 내 자신을, 내 동료를 껴안으면 족하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이 자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라도 웃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분노와 격노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분노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다. 분노에는 원인을 찾고 따지며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격노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이다.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풀어버리면 그만이다.

이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 그야말로 초인과 같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분노하되 격노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야겠다. 올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힐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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