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말부터 이른 바 크라임 스릴러에 묻혀 지냈다. 죄송하다. 범죄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를 읽어왔는데, 어느 새 남은 작품은 두 권 뿐이다. 드라마로도 챙겨 봤으니, 본의 아니게 해리 보슈의 열성팬이 된 듯하다.

이미 세상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데, 굳이 인간의 잔혹함과 나약함, 비열함이 순도 높게 표현되고 있는 범죄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면 딱히 대답할 만한 것은 없다. 애써 변명을 하나 찾자면 그럼에도 소설에선 나쁜 놈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른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재미있기도 하고.

아주 조금 유감스럽게, 올해 40대에 접어들었다. 솔직히 실감은 아직까지 나지 않는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수 있겠지만, 순진하게도 난 마흔이 되면 더 지혜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너무 큰 꿈이었다.

은근슬쩍 마흔을 맞아, 살인과 음모, 배신과 욕망으로 뒤섞인 범죄 소설을 잠시 접고, 내가 집어든 것은 아주 얇은 연설집이었다. 그것도 160여 년 전 어느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 고리타분함이 밀려 올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짧은 글 속에 우주가 담겨 있었다.

▲ 시애틀 추장, 이상 옮김,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 시애틀 추장의 꿈』, 가갸날, 2015.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신대륙이라 이름지어버린 땅에는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 앞에 겸손했고, 공존의 가치를 오래 전에 깨닫고 살아왔다. 자연의 일부분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이들은 먼저 살고 있던 이들을 살육했다. 반복해서 효율적으로 살육했다. 그리고 그들의 터전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와 같았던 땅이 ‘부동산’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동산 위에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먼저 살았던 이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었다.

시애틀 추장은 퓨젓사운드 만을 끼고 있는 킷샙 반도에서 그의 부족 수쿠아미쉬 족과 함께 살았다. 워싱턴 주의 시애틀을 마주보는 곳으로 미국의 북서태평양 연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시애틀 추장의 조상은 그곳에서 수천 년을 살았다.

이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들이 가장 늦게 도달한 곳의 하나라고 한다. 백인들은 이른 바 개척정신이라 부르는 살육과 침략의 반복으로 인디언들을 살육해가며 그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복에 막바지에 이르러 무차별 살육에서 유화책으로 전환하였다. 인디언에게 토지를 구매하는 형식이었다.

바로 이 시기, 아메리카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마지막 숨결이 사라질 위기의 순간에 추장이었던 시애틀은(시애틀 시의 이름은 추장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거의 궤멸 되다시피 한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온 생애를 바쳐 부족의 땅과 문화를 간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미국정부가 파견한 대표들과 조약체결을 협상 중이던 1854년, 이 연설을 남겼다.

연설은 매우 명료하다. 백인 정착자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존중하겠다는 것, 대신 백인들도 자신의 부족과 자신들의 삶의 일부인 자연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노력에 대해 어떤 이들은 실패라고 말한다. 결국 많은 원주민들이 유럽계 미국인들의 병을 앓다 죽었고, 부족의 문화와 종교는 억압당했다. 부족의 땅 대부분은 백인에 빼앗겼고, 자유가 억압당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1900년에 이르러 이미 수천 년 이어온 원주민 문화는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시애틀 추장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는지 모른다. 그의 부족은 백인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부족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들의 문화도 명맥을 이을 수 있었고, 퓨젓사운드 인근 수천 에이커의 땅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 부족의 지도자는 지금도 그 지역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 논리대로라면, ‘발견’한 백인들은 이미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같은 생명과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라져야 할, 없애야 할 방해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했다. 인디언들은 버팔로와 함께 그렇게 학살되었다. 쌍권총과 카우보이모자를 쓴 보안관의 활약을 담은 웨스턴 무비는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낭만적으로 일그러뜨려 보여준다.

원주민들과 백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나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식 그 자체였다고 본다. 원주민들에게 자연은 ‘신성한 생명의 그물’이었다. 함께 공존해왔고, 공존해야 할 이웃이자 가족이었다. 하지만 백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재산이자, 돈이었다. 환산 가능한 그 무엇이었다. 그 차이가 비극을 불러왔고, 지금 이 시대 모든 땅에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시애틀 추장은 연설에서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구석구석 모두가 다 성스럽다. 언덕, 계곡, 벌판, 숲 모두 우리 부족의 아련한 추억이나 슬픈 경험이 깃든 성스러운 곳이다. …… 당신들 발 아래의 흙도 당신들보다는 우리의 발소리에 더욱 정답게 응답한다. 그 흙은 다름 아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발 또한 대지의 다정한 어루만짐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 형제들의 삶이 그 속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말 중국의 살인적인 스모그 현상과 관련해 참담한 뉴스 하나가 전해졌다. 캐나다 산 공기 캔이 생수의 50배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렸다는 이야기였다. 신선한 공기를 캔에 담아 돈을 받고 판매한다. 공기를 판매한다. 뉴스를 접했을 때의 참담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이제 공기를 판매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미국의 환경드라마 <홈>의 내레이션에서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질문한다. 백인들이 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족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고. “어떻게 하늘을 팔 수 있으며, 대지의 온기, 영양의 신속함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우리는 팔고 당신들은 살 수 있다는 말인가? 홍인(원주민)이 종이 한 장에 서명해 백인에게 주었다고 하여 당신들 마음대로 해도 좋은 당신네 땅이 되는 것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당신은 그것을 우리에게 사겠다는 말인가? 마지막 물소가 죽고 나면 그것을 되살 수 있는가?”

아마도 시애틀 추장과 부족 사람들이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 그 질문에 우리는 이제 공기 캔으로 대답하고 있다. 우리는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는 종족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미 ‘어머니인 대지와 누이인 강,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신이 이 땅을 파멸시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시애틀 추장의 짧은 연설이 오늘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고 있는 이유는, 물과 공기를 사고파는 이 시대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더 이상 모르쇠하기엔 벅찰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계, 구분 짓기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류는 바로 그 구분 짓기로 인해 멸망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인류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을 온전히 채우기에는 이 지구와 같은 별이 수백 개, 수천 개 있어도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겸손과 존중의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본다면, 우리는 언젠가 시애틀 추장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기 전에 말이다.

오로지 발전과 개발을 통한 성장이란 마약에 취해있는 인류는 스스로 파멸의 문을 열어왔다. 그리고 이젠 빠져나오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만족을 모르는 이들에겐 별들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다. 다시 별을 헤고 싶다.

“이 세상 어느 곳도 고독을 위한 곳은 없다. 밤이 되어 당신네 도시와 마을 거리에 정적이 내려앉고 모든 인적이 끊긴 것으로 생각될 때도, 한때 이곳에 살았고 아름다운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여들 것이다. 백인들만 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 부족을 공정하고 친절히 대해 주기 바란다.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력한 것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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