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와 바다와 아침 해를 그린 작품에는 대략 [해응영일도海鷹迎日圖], [욱일호취도旭日豪鷲圖]라는 화제가 붙는다. 횃대에 앉아있는 매를 그린 것은 [가응도架鷹圖], 수리를 그린 작품은 [호취도豪鷲圖]라고도 한다.
우리그림에 등장하는 맹금류는 매를 뜻하는 응(鷹)과 수리를 뜻하는 취(鷲)이다.
매의 종류에는 송골매, 황조롱이 따위가 있고 수리에는 참매, 보라매가 있다. 매와 수리는 엄밀히 다르지만 크기가 비슷해서 분간하기에 쉽지 않다. 다만 꼬리가 길고 노란색 눈을 하고 있으면 수리일 가능성이 높다.
옛 그림을 보면 매인지 수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분명 매라고 제목이 적혀있는데 수리 같고, 수리라고 하는데 매 같은 그림이 있다. 심지어는 매와 수리의 요소를 뒤섞어놓은 것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맹금류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동물이다. 하지만 매나 수리는 길들여서 사냥용으로 사용했고 이를 통해서 화원들은 꼼꼼히 관찰하고 그릴 수 있었다.
아무튼 조선 중기까지는 거의 사냥매를 그렸다. 매가 앉아있는 횃대나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는 시치미, 발목에 묶인 끈 따위를 함께 그렸다. 이암의 [가응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시치미도 없고 발목에 묶인 끈도 사라진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사냥매가 아니라 자연 상태의 독립적인 매를 그리는 것이다. 이러면서 수리와 같은 종류도 그림에 등장한다.

중간-정홍래/해응영일(海鷹迎日)/60.9*118.2/견본채색/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우측-정홍래/욱일취도(旭日鷲圖)/63.3*116.5/견본채색/간송미술관 소장.
두성령 이암은 1499년 태어난 16세기를 살았던 왕족 출신의 화가이다. 정홍래는 1720년에 태어나 18세기를 살았던 화원이다. 대략 220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 사이 임진왜란 병조호란 따위의 커다란 전쟁이 있었고 정치적 흐름도 바뀌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이 그림 속에 반영되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후기 정홍래의 매나 수리를 그린 작품은 독특하다.
정홍래의 매 그림에서 가장 큰 특징은 발목에 끈이 묶인 매가 아니라 독립적인 매를 그렸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겸재 정선에 의해 완성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땅을 이상세계로 인식하고 표현한 화풍이다. 이 땅을 이상세계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체의식이 필요하다. 진경산수화가 완성되던 시기에 활동했던 정홍래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여 창작한 것이다.
정홍래의 매 그림에 등장하는 요소는 매(수리), 바다와 파도, 수석, 아침, 해이다.
구름이나 안개도 있지만 아침 해를 드러내거나 넓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보조 장치이다.
그림에서 바다와 거친 파도는 환경의 어려움을 상징한다.
수석은 바다와 매를 연결하는 소재이면서 최소한의 상식적 장치이다. 매가 바다 위에 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석은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한다.
아침 해는 단심(丹心), 즉 붉은 마음인데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런 마음’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해석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고려 말의 문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여기서 ‘임’은 두 왕을 섬기지 않으려는 다짐의 대상이다. 또한 대중가수 조용필의 노래 중에 ‘일편단심 민들레’가 있다. 일편단심은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해석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극진하고 정성스런 마음을 뜻한다.
하지만 단심은 추상적 개념이고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붉은 마음인 단심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 붉은 해 즉, 아침 해인 것이다.
정홍래는 도화서 화원을 지낸 선비세계의 영역에 있었던 화가였다.
도화서 화원들은 선비의 정서나 미감, 지향하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용맹하고 거침없는 매의 특성을 학문적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가지려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와 연결하여 선비의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암의 매 그림이 용맹성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전쟁, 장군, 선비 따위의 상징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반면, 정홍래와 김홍도의 매 그림은 전쟁, 장군 따위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한다. 그래서 그림 어디에도 사냥매의 공격적 특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문치와 덕치를 정치적 가치로 여겼던 선비들의 정서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정홍래는 바다와 파도, 매, 수석, 아침 해와 같은 요소를 적절히 결합하여 ‘진정한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라는 인문학적 내용을 담은 작품을 그려냈다. 동시에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조형성을 가진 매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뭐, 가끔 심사정, 유숙, 장승업의 그림에는 토끼를 잡거나 사냥감을 노려보는 공격적인 매 그림이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그림은 중국 명나라 그림의 영향 때문이다. 실제 심사정이나 장승업은 진경산수화를 배우지 않았고 중국의 남종산수화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화가이다.

중간-장승업/호취도/55*135.5/종이에 수묵/19세기 후반/리움 미술관 소장.
우측-전 유숙/호취간작/비단에 연한 색/87.4×20.7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격적인 매 그림은 김홍도 작품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동물을 직접 사냥하는 매 그림은 명나라 미술의 영향이다. 진취적인 모습은 강조되었지만 인문학적인 가치는 사라졌다. 또한 매가 선비를 상징하지도 않는다. 청나라의 지배세력인 만주족의 사냥문화가 수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어떤 사람은 정홍래의 매 그림을 왕에 대한 충성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요소의 해석은 같지만 아침 해를 임금이 정치를 하는 조정이란 글자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아침 해를 단심으로 보느냐 혹은 임금으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조형적으로 보자면, 정홍래의 그림에는 아침 해를 상단 중간에 그렸고 매는 좌측이나 우측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매가 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에 둘 사이의 연결성이나 일체감은 약하다. 만약 아침 해를 임금으로 해석하면 매는 당연히 아침 해를 쳐다봐야 한다.
아무튼 그림에 대한 해석은 조선시대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우리그림은 보지 못했다.

위 그림은 새해 벽두에 완성한 그림이다.
정홍래의 [호취도]를 기본으로 했다. 다만 파도를 강조해서 역동성을 높였다. 정홍래는 바다의 수평선을 가리기 위해 안개를 사용했지만 나는 파도를 높여서 수평선을 없앴다. 또한 아침 해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구름으로 조금 가렸다.
무엇보다 매는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해를 좌측에 배치하고 매는 고개를 돌려 해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변주했다.
임금이나 왕이 없는 시대에 아침 해는 그저 진리와 존엄을 뜻하는 단심일 뿐이다. 아침 해와 시선을 맞추는 매를 통해 시각적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긴박하고, 국내 정치나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다.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이럴 때일수록 공동체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