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나약한 딱 그만큼 오만하다. 논리, 정의, 상식, 진리라는 모래성을 쌓아두고, 그것이 언제라도 무너질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정확히, 스스로 말하는, 스스로 외치는, 진리, 논리, 상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세상을 해석하려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정말 세상이 변화하는가. 혹은 변화해 왔는가. 어떤 것이 변화이고, 어떤 것이 불변인가.

▲ 알베르 카뮈, 이휘영 옮김, 『이방인』, 문예출판사, 1999.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카뮈의 ‘반항’과 ‘부조리’는 그가 『이방인』을 세상에 내놓은 1942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쩌면 영원히 지겨운 부조리와 조우해야 할 것이고,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이 졸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는 것, 그것을 카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 말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합리의 욕망’과 이를 자연스레 부정하는 세계의 ‘몰합리’, 카뮈에게 ‘반항’이란 이런 부조리의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 자체를 말한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지난 해 어느 출판사에서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카피를 내걸고, 기존 역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또 다른 『이방인』이 출판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은 순식간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솔직히 무지한 나로서는 과연 그 책이 기존 역서와 비교할 때, 얼마나 획기적으로 다른지, 또한 기존의 역서들이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이었는지 가늠하지 못한다. 내가 읽은 『이방인』도 그렇게 따지자면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난 충분히 감동을 받았고,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강렬한 태양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런 소동이 나에겐 또 하나의 부조리로 다가왔다.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이라는 속박으로 빚어진 그냥 하나의 모순일 뿐이었다. 누굴 탓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도발적인 문구에 혹해 책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찮은 일은 아니었겠지만, 나에게 결국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의식의 단절, 불통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절망케 만든다. 나의 몸짓이 타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못할 때, 인간은 철저히 무너진다. 그리고 그러한 단절의 확장과 연속 속에, 점점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반항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에 노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노출시킨다. 스스로 타인에게 감시받고, 통제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믿는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 전날 밤,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외롭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2014년 4월 수많은 아이들이 허무하게 죽어간 그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많은 이들은 여전히, 또한 지극히 당연하게 자신의 기준에 따라 투표를 했거나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죽음에 적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할 이들에게 역시 적지 않은 표를 던졌다.

여기에서 느낀 당혹감을 모순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내가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나의 당혹감, 또는 약간의 분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나는 거기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카뮈의 작품을 통속적인 허무주의로 평가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허무는 이제 이 사회에서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어느 새 우리는 고독과 허무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빈틈없는 사람들로 대접받고 있다. 역시 그 사이에 졸고 있는 의식을 깨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외롭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보면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도 이젠 통속적이다. 세월호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또한 잔인한 행동을 정당화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아름다운 부조리에 대한 우리들의 아름다운 반항이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분노할 수 있는 힘, 의식, 자각, 깨달음. 그 모든 것이 하찮고 버겁게 느껴질 때, 어쩜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태양을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마지막으로 나에게 증오의 함성으로 다가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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