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통일부가 분주합니다.
남북대화 구상 때문에? 통일교육 준비 때문에? 탈북민 지원 때문에?
땡!!! 모두 틀렸습니다.
연말부터 통일부는 단 하나,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준비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는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4년차 통일외교안보 분야 연두 업무보고를 받습니다. 지난해 대통령 업무보고가 경제혁신-국가혁신-통일준비-국민행복이란 명칭으로 나누어 진행됐고, 통일부는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와 함께 ‘통일준비’ 업무보고에 참여했습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각 부처의 연간 업무계획을 보고받고 지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꼭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업무보고를 준비하는 장관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다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단지 밝지 않은 정도를 넘어 곤혹스러움과 짜증이 배어있습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공무원 사회는 유난히 행정절차나 요식행위가 많고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꽉 짜인 틀이 옥죄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앞에서,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이 업무보고에 나서는 경우, 가장 전형적인 요식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감히 어떤 장관이나 기관장이 자기 방식대로 토론거리를 만들어 보고할 수 있을까요? 뻔한 순서에 따라 뻔한 내용으로 매끄럽게 보고하고, 지적사항 최소화, 칭찬 최대화를 이끌어내는 것 외에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 뻔한 보고서를 ‘폼나게’ 만들기 위해 각 부처 공무원들이 대부분 한달 이상을 목매달다시피 매달리고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안쓰럽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은 짜여진 보고를 청취하는 인내력을 발휘할 뿐입니다. 토론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서대로 돌아가며 ‘허공에 대고 한마디씩 하는’ 수준입니다. 대통령은 미리 써온 엄숙한 결론을 통보하고 마무리합니다.

▲ 지난해 '통일준비' 업무보고 모습.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가 합동 업무보고를 했고, 통일부는 당시 류길재 장관이 보고자로 나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청와대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던지 지난해 업무보고가 끝난 뒤 ‘국민행복’ 업무보고가 잘 됐다며 특별히 ‘비하인드 스토리’를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처들의 업무보고를 꼼꼼히 들으며 궁금한 점을 직접 질문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원을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하인드 스토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실소만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대학교육의 구조적 문제 해결’로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대학에서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추진한다면,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이러한 지시사항으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 했습니다.

더구나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으로 “오늘 보고한 과제들과 토론한 내용대로 정책이 잘 추진이 된다면, 올 연말까지 우리 국민들께서 연말에는 행복지수가 높아졌다 하는 것을 체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고 말했지만 연말을 지난 지금 행복지수가 높아졌음을 체감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나마나한 매년 되풀이되는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에 공무원들이 흥이 날 이유가 없고, 야근이나 주말근무까지 더해지게 되면 짜증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업무보고에서도 뭔가 새로운 보여줄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은 안절부절 못 합니다. 통일부 장관은 4일 신년인사차 기자실에 들러 좋은 사업거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통일부가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무슨 새로운 사업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실제로 장관의 요청에 기자들이 금강산관광 재개나 남북 철도 연결 문제를 제기하자 장관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습니다.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 수 있고 현 정부가 그렇게나 내세우고 있는 이산가족 문제의 진전도 비로소 여지가 생길 것입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한 남북경제협력이야말로 남과 북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임은 심지어 새누리당과 전경련, 대한상의까지 제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를 앞두고 DMZ 세계평화공원이니, 새로운 사업거리니 타령만 늘어놓아야 하는 장관의 처지가 참 안 돼 보입니다.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해 행정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거쳤고 남북관계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엘리트 공무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도 참 딱해 보입니다.

안 하니만 못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대통령도 장관도, 공무원들도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조는 적어도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목민관의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와 더불어 봉공(奉公, 공을 받듦)과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을 꼽았습니다. 대통령의 레이저 눈빛을 맞지 않는 것보다 국민과 역사 앞에 충실한 공복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018년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추가적인 환경파괴나 재정투입 없이 북한 마식령스키장을 이용해 분산개최해 보자는 소신 제안을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펼칠 장관도 공무원도 진정 없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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