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원들이 그린 호랑이그림은 많지 않다.
그 당시에는 호랑이가 많았지만 인간과 별로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말처럼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못되고 포악한 동물로 취급받았다.
호환으로 인한 피해는 역사가 깊다.공자는 포악한 정치를 호랑이에 비유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즉,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라고 해석하는데, 이 또한 호랑이의 포악성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비유이다.
호랑이로 인한 백성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조선은 세종 때부터 호랑이 사냥만을 담당하는 군사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설치하였고 호랑이 퇴치를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국왕의 사전 재가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이런 점을 역이용하여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조건에서 호랑이에게 좋은 상징을 부여해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의 탁월한 용맹성,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강력한 권위는 매력적인 그림의 소재였다.
화원들은 호랑이의 상징을 학문적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선비의 강력한 지조와 절개로 수용하고자 했다. 지배세력인 선비들의 인문학적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호랑이는 한낱 포악한 맹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숙종, 영조 때 궁중화원을 지낸 정홍래는 호랑이를 산군(山君)에 비유하여 그렸다. 산에 사는 군자란 뜻이다. 여기서 군자란 이상적인 선비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선비인 군자는 호랑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는 그야말로 선비의 기개와 절개를 용맹한 호랑이의 모습에 담은 그림이다. 김홍도가 표현한 호랑이는 결코 포악하지 않다. 강력한 이빨을 감추고 두 발을 모운 단정한 모습이다. 학문적 양심과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는 선비의 용맹함을 호랑이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다.

▲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의 부분/비단에 채색/1800년.
서왕모를 만나러 가는 신선이 호랑이를 타고 있다. 몸통은 호랑이인데 얼굴은 표범의 모습이 특이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영.정조 시대에는 [요지연도]같은 신선그림이 궁중회화로 수용된다.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정조 때, 왕세자(순조) 책봉 기념으로 제작한 [요지연도]이다. 이 그림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호랑이를 타고 있는 신선의 모습이다. 중국의 그림에서는 없는 호랑이가 조선의 방식으로 변주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선이 호랑이를 타고 있다는 것은 호랑이를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이자, 호랑이의 용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신선은 곧 선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까 선비가 호랑이의 포악성을 제압하고 용맹성이란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중국에서 전래한 [요지연도]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호랑이가 궁중회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의 호랑이그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화의 까치호랑이그림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런 궁중회화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 죽하맹호도/김홍도, 임희지/견본수묵담채/91*34/고려대박물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죽하맹호도]는 [송하맹호도]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대나무 아래의 용맹한 호랑이를 그린 것이다.
대나무는 거친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고 곧게 자라기에 선비의 지조와 절개에 비유한다. 그래서 군자의 가치가 투영된 네 가지 요소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의 하나이다.
또한 김홍도와 임희지의 합작품이다.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위쪽의 대나무는 임희지가 그린 것이다.
임희지는 한역관(漢譯官) 출신의 중인으로 김홍도보다 20년 정도 나이가 어리다. 특히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전문화원은 아니었다.
이 그림에는 ‘조선 서호산인화호 수월옹화죽 능산도인평’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그림에 조선이란 국명이 들어가는 것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그림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김홍도가 조선통신사 행렬에 끼여 직접 일본에 가지는 않았다.
조선통신사는 영조 재임기간인 1748년과 1763년 두 번이 있었고, 정조 때는 없었다.
김홍도의 출생년도가 1745년이고, 임희지가 1765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1790년대 이후에 창작된 그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외에도 일본은 동래왜관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사겠다고 요구한다. 이것을 구무품(求貿品), 무역을 요구하던 품목이라고 한다. 이런 구무품에는 특히 호랑이그림이나 매그림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림 속에 ‘조선’이나 ‘조선인’, ‘조선국인’, ‘동화(東華)’ 등으로 국명 또는 국적을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김홍도의 명성을 알고 있는 일본 귀족의 요구에 의해 비싼 값으로 팔렸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이 그림은 일본에 있다가 1978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린 순서로 본다면 [송하맹호도]가 [죽하맹호도]보다 먼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작품의 격도 높다.
이런 추정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선비와 중인의 신분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렸다고 하고, [죽하맹호도]의 대나무는 중인계층인 임희지가 그렸다. 김홍도가 중인과 먼저 합작을 하고 나중에 선비화가와 합작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

둘째, [송하맹호도]의 구도가 훨씬 안정적이다.
[송하맹호도]는 호랑이가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다. 위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지만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죽하맹호도]는 의도적으로 윗부분을 많이 비워 대나무를 그렸다. 마치 처음부터 합작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비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판매용 그림이기에 일본에서 대나무를 그려달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또한 대나무를 잘 그렸던 임희지를 지목해서 합작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일본에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무튼 호랑이에 비해 대나무가 너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약간 거슬린다.

셋째, 호랑이의 자세나 표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죽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송하맹호도]의 호랑이와 반대 방향으로 그렸다. 기본적인 자세는 거의 동일하지만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린 것이 다르다. [송하맹호도]의 호랑이 얼굴은 정면에서 살짝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표정은 단정하다. 이에 비해 [죽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얼굴을 옆으로 향하고 눈동자는 정면을 보고 있다. 김홍도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호랑이의 표정은 마치 사람을 흘겨보는 것 같고, 나아가 살짝 웃고 있는 느낌이 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해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호랑이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은 완성된 모습이 있어야 가능한 변주이자 표현방식이다.

그럼에도 [죽하맹호도]는 뛰어난 작품이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호랑이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임진왜란을 통해 실제 호랑이를 경험한 사례도 있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일본에게 선비의 품성과 표정을 닮은 인문학적인 호랑이그림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은 선비의 모습을 한 호랑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조선을 대표하는 세력이 선비라면 일본을 대표하는 세력은 장군이나 사무라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호랑이는 그저 사악한 요괴이거나 포악하면서 용맹한 전쟁의 상징일 뿐이었다.

▲ 작품의 제원은 잘 모르지만 일본에서 유명하다는 호랑이그림이다. 대나무 아래의 호랑이를 그린 것은 ‘죽하맹호도’와 같지만 호랑이의 자세나 표정은 전혀 다르다.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표범과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당시 조선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함께 살고 있었고 개체 수는 표범이 훨씬 많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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