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측-심사정/묵모란/18세기/종이에 수묵/136.4x52.3cm.
강세황의 모란그림에는 수석과 대나무가, 심사정의 그림에는 목련과 난초가 함께 그려져 있다. 수석과 대나무, 목련, 난초는 모두 선비의 자발적 청빈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런 소재들이 결합하면서 모란그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데 군자의 상징이자 동시에 공동체의 풍요가 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모란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꽃이고 수많은 그림으로 창작되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 선비들의 사상과 삶을 담은 수묵화, 대중그림인 민화에서도 다양한 모란그림이 그려졌다.
모란그림의 인문학적 상징은 ‘생명의 만개’이다.
조선왕실의 [궁중모란도]는 모란꽃의 생태적 특징을 넘어 모든 꽃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완성된다. 세계 최고의 꽃그림이라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모란은 동시에 부귀영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크고 화려한 모란의 생태적 특성에 따라 ‘꽃 중에 꽃’, ‘군자’, ‘청춘’, ‘아름다운 여성’ 따위의 상징이 붙었지만 대중적으로 수용되면서 부귀영화의 뜻으로 굳어진다. 특히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구현이라는 도교의 결합으로 모란은 그야말로 중국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중국의 영향이나 문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귀의 상징을 가진 모란은 조선의 선비에게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선비들이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이라는 행동지침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란은 선비들에게 국화나 매화보다도 인기가 없었다.
영.정조시대의 학자인 이종휘*는 자신의 저서 수산집, 목단병기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사람들이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을 좋아하는 것은 호명(好名)*일 뿐, 마음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대하고 화려한 모란을 스스로 드러내고 애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호명-이름나는 것을 좋아함)
풀이하면, 세상 사람들이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을 좋아하는 것은 체면치레이거나 시류에 따르는 것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부귀영화를 추구하는데 있지 않다.
진정한 선비들은 이렇게 화려한 모란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모란이 가지고 있는 부귀영화의 상징을 경계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모란을 그리더라도 수묵으로만 그렸다.
수묵으로만 그리는 모란그림은 보기가 좋지 않다. 특히 붉은색과 같은 어두운 꽃을 그리면 화면 전체가 시커멓게 보여 모란꽃인지도 모를 지경이 된다.
또한 모란을 그릴 때는 거의 수석과 함께 그린다.
수석의 상징은 지조와 절개, 즉 자기절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을 해석하면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한 부귀와 풍요를 뜻하는 것이다.
요즘으로 보면 공동체의 풍요와 비슷하다.
대중그림인 민화에서 표현하는 모란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궁중모란도의 엄격함이나 인문학적 가치는 찾기 어렵다. 철저히 부귀영화라는 도교적 욕망에 충실하다. 모란은 장수, 다산, 출세, 벽사 따위를 상징하는 여러 사물과 결합하면서 복잡해지고, 동시에 극단적인 양식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모란그림이 대중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궁중모란도]나 수묵모란도의 인문학적 토대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만개’를 뜻하는 [궁중모란도]의 사회적 개념은 생활의 풍요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또한 수묵모란도가 표현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풍요는 백성들에게 물질적 풍요로 수용되었다.
현대의 민화에서 표현하는 모란그림에도 인문학적 가치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생명의 만개’나 공동체의 풍요를 바탕에 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무한소비와 허영이라는 자본주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귀영화를 통한 소비와 허영은 반사회적, 반공동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그림은 철저히 인문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기교보다는 그림 속의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공동체의 가치를 표현하지 못하는 그림은 사람들을 미혹에 빠트린다.
조선시대에는 모란그림을 공동체의 풍요로 수용했다.
이는 수많은 화원들의 그림 속에서 증명되는 빛나는 인문학적 전통이다.
| *이종휘 이종휘(1731~97)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아버지는 병조참판을 지낸 정철(廷喆)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그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 계열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지낸 적이 있다.대표적 역사 저술인 [동사(東史)]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기자삼한후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 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였다. 특히 고구려를 역사 계승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義理史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그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론적 관심, 그리고 과거제도, 변경방어와 같은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