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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미국 협상가도 넘지 못한 북핵 장벽<화제의 책> 힐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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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16  2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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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공동성명의 미국 측 주역, 크리스토퍼 힐

   
▲ 크리스토퍼 힐 지음, 이미숙 옮김,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 메디치, 2015.10.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11~12일 개성공단에서 열린 제1차 남북당국회담이 금강산관광 재개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그 배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재무부의 추가 대북제재 조치였다.

미국 재무부는 북한 ‘전략로켓군’을 비롯한 단체 4곳과 개인 6명을 제재 대상으로 추가 지정했고, 이는 남북당국회담에서 금강산관광 재개와 같은 북으로 ‘달러’가 흘러들어가는 사업은 꿈도 꾸지 마라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미국의 이같은 대북 봉쇄정책의 첫 번째 근거는 항상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고, 핵무기 투발수단인 탄도미사일이 뒤따르고 있다.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북미관계 개선도 남북관계의 정상적 발전도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문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영구미제일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역사 속에서 몇 차례 확인된 적이 있고, 가장 가깝고 결정적인 사례는 아무래도 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결과 채택된 ‘9.19 공동성명’일 것이다.

9.19공동성명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는 등의 비핵화 조치를 취하기로 했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불침공 의사를 표명하고 관계정상화를 약속했다. 또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대북 에너지지원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협상 등에 합의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북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합의에는 당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송민순 수석대표의 존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중국의 외교적 노력 등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탁월한 한 명의 미국 외교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북한 사람들과 공식 자리서 건배하지 말라’

   
▲ 힐 수석의 숙소인 베이징 세인트레지스호텔에서 그릴 기다리는 기자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힐 수석은 숙소를 나설 때와 들어올 때 기자들과 그날 그날의 회담 진전 상황을 브리핑했다. 2005년 9월 14일 밤 힐 수석은 숙소인 차이나월드호텔에서 "오늘은 경수로의 날이었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당시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이 최근 자신의 33년에 걸친 외교관 경험을 담은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을 썼고 이는 바로 번역돼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6자회담 기간, 회담장인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그날 회담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힐 수석의 호텔숙소 로비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곤했다. 하루하루 회담 진행 소식을 그나마 브리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힐의 적극적 언론 플레이가 빛을 발한 셈이다.

그러나 힐 수석은 기자들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칠 무렵인 늦은 밤에야 숙소에 들어서곤 했다. 6자회담장에서 1차 협상을 마친 그가 미국 국무부 등을 상대로 지리한 2차 협상을 미국대사관에서 끝내야 비로소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대사관에는 힐이 도청을 의식하지 않고 통화할 수 있는 비화기가 설치돼 있다.

당시 힐이 처한 상황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이른바 네오콘으로 분류되는 강경보수파들이 부시 2기 행정부에 수두룩했고, ‘북한 사람들이 포함된 어떤 공식 자리에서도 건배하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려질 정도였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의 직통라인을 가진 그도 입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던 것.

힐은 회고록에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첫 북미 양자회동을 추진했지만 라이스 장관으로부터 ‘북한과 회동을 진행하되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시설에서, 중국 측 인사들이 있는 데서 해야 한다’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조건부 승인을 받고 ‘훈령을 창의적으로 적용’해 간신히 북미 회동을 성사켰다고 적었다.

송민순은 레스토랑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 9.19공동성명 타결을 코앞에 둔 2005년 9월 16일 베이징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한미일 3자회동을 가진 뒤 한국측 대표단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송민순 한국측 수석이 먼저 자리를 떠 힐 미국측 수석대표와 사사에 일본측 수석대표만 기자들 앞에 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6자회담에서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연계하려 하면서 한-일 간에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고 결국 한미일 3자 오찬에서 “송민순은 사사에, 나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서기를 거부하며 가버렸다”며 “그런데 실제 그는 가버린 게 아니라 레스토랑 한곳에 있으면서 한국과 일본 기자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고 적었다. “3자회동을 할수록 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불평도 덧붙였다.

그러나 2005년 4차 6자회담 당시 취재차 현장에서 목도한 사실은 힐의 기억과는 다르다. 당시 송민순 수석과 조태용 차석, 박선원 청와대 비서관 등 한국 대표단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식당을 떠났고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박 비서관은 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송 수석은 한미일 수석대표가 나란히 웃음을 지으며 사진에 찍히는 것이 중재역을 자임한 한국 측으로서는 별로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라는 판단 하에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회고록 곳곳에는 그의 통찰력이나 수완이 엿보이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을 여행하면서 곳곳에 한국을 도와준 외국군을 기리는 참전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중국군 참전비를 기리는 기념비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왜 북한이 미국을 증오하는지 안다. 왜 일본을 증오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왜 북한이 중국까지 그렇게 증오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의 한마디가 우다웨이 중국 단장을 침묵시키고 힐 수석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게 했다는...

네오콘과 결이 다른 탁월한 협상가

그는 탁월한 협상가임에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네오콘과 초강경 부수주의자들은 적들과 협상하는 것을 나약함의 표현이라고 규정하고,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그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위상 추락을 막고 명성을 회복하려면 협상이 필요하며, 협력의 패턴을 확립하기 위해 다자적 프로세스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협상가로서의 면모는 회고록에 담긴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외국 공관에서 생활한 어린 시절의 경험부터, CIA(미국중앙정보국) 요원이나 외교관들의 필수코스이다시피 한 평화봉사단 활동, 외교관으로서도 유별난 분쟁지역 평화협상 경험 등이 그를 단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래리 이글버거나 리처드 홀브룩과 같은 특별한 선배 외교관들과의 만남도 즐거운 읽을거리다.

6자회담 주역답게 그의 회고록에는 9.19공동성명에 포함된 “경수로 제공 문제를 적절한 시점에 논의한다”는 문구는 “부시 대통령을 지원해 뭔가 진전을 보도록 하는데 일조하려는 의지를 갖고”있었던 “현명한” 헤들리 안보보좌관 주도로 삽입됐다든지, 북한 방문시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외무상에게 전달한 사실 등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회고록에 담았다.

9.19공동성명 발표와 함께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로 ‘18개월간 궤도 이탈’된 상황에 대해서도 비교적 솔직히 기술했다. “BDA 문제가 발표됐을 때 6자회담 당사국, 특히 중국과 한국 그리고 러시아는 격노했다”며 “북한 계좌 2,200~2,500만 달러를 2005년 9월 동결한 것은 북한 경제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당시 미 행정부 일각의 대북 강경책을 비판했다.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끊임없이 제멋대로 독단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해온 음침한 (체니) 부통령의 견제를 이겨내면서 북한의 (핵물질 신고)발표에 대한 대응조치로 북한을 적성국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45일의 유예기간이 지난 뒤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강대국 외교관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미국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주한 미국대사 시절 그동안의 미국대사들과 달리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는가 하면 우리 사회 비주류와의 접촉도 마다하지 않았고, 광주 5.18묘역을 방문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왜 북한의 핵무기는 허용되지 않느냐?’

   
▲ 지난 10월 2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6회 지식인포럼에 참석한 힐 전 수석. 예전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러나 북핵 협상은 숱한 걸림돌에 비틀거렸고 북한 영변 핵시설의 상징물인 냉각탑 폭파의 아이디어를 낸 그는 정작 폭파 현장에 갈 수 없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6자회담에 대한 우파 강경파들의 반발이 커지고 나 개인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것을 우려해 현장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과 함께 교토에 있자고 했다. 나는 라이스와 함께 그 장면을 일본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다시 오바마 행정부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천거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이라크 대사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라크의 수렁은 그에게도 헤쳐나오기에는 너무 깊었다.

송민순 수석대표는 9.19공동성명 발표 직후 한국 기자들과의 브리핑에서 “늘 우리에게 만들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를 앞으로 우리를 위한 역사를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길을 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고, 실제로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이후 우리가 체결한 모든 국제조약들이 불평등 조약이었다면 9.19공동성명은 그나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변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첫 국제적 합의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이 회고록 한 귀퉁이에 기록해 둔, 9.19공동성명을 타결짓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미국인 승무원에게 받은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핵무기를 가졌는데, 왜 북한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회고록 에필로그에 “외교는 북한의 핵야망을 꺾는데 실패”했다며 “북한의 경우 협상 당시에도 힘들었지만, 현재도 마찬가지로 도대체 대안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하고 있다. 북핵이라는 장벽은 그만큼 높은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물론, 그는 전 세계 많은 분쟁지역과 한반도의 현안을 철저히 미국의 국익에서 다뤄온 미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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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5-12-17 13:12:17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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