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육조 시대 남제의 인물 화가이며 평론가인 사혁은 그의 저서 《고화품록》에서 회화에 필요한 6가지 화법을 주장한 바 있는데 이것을 ‘화론 6법’이라 한다.
중국 육조 시대에 나온 화론 6법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수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아마 영.정조 시대부터가 아닐까한다.

육조시대는 3~6세기이다. 이 당시는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이고 불화와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 회화가 대단히 발전한 것도 아니고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 화론 6법이 논의되었다는 것은 미술활동이 활발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고증학이나 훈구학의 영향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각종 자료를 찾아보니 글이 좀 어렵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점이 많다.
그림의 모든 소재가 되는 사물은 결국 현실과 자연에서 얻는다. 그 외에는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사물을 미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미술이 발전할수록 비슷해진다.

육조 화론 6법을 나름대로 이해해 본다.
이 화론은 기운생동,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 전모이사 6개의 방법으로 나누지만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첫째는 미학이고, 둘째는 표현방법이고, 셋째는 재생산구조 즉 미술교육이다.

골필용법,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는 표현방법이나 조형원리이다.
전모이사는 그림을 배우고 익히는 방법이다.

보통 미술이나 예술의 3대 요소는 미학, 조형원리, 미술교육법(미적교육)이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독립된 예술로 보기 어렵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은 미학에 속한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미학이라고 보는 것은 모든 미술에는 표현해야 하는 주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연예인을 사실적으로 그린 허접한 작품에도 미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미학이다. 자본주의 미학은 대표는 허구적 사실주의와 영웅주의이다. 연예인은 대중영웅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이라야 한다. 뭐, 허리우드 SF영화를 떠올리면 쉽다.

물론 미학은 당대의 보편적 철학에서 도출된다.
미학, 별거 아니다. 미국식 자본주의 철학을 수용하면 청바지를 입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 현대적이며 멋있게 보이고 한복을 입고 대추차를 마시는 사람은 촌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당대의 철학을 미술에 담는데 그 내용이 정확하고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으면 ‘기운이 생동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서양의 인본주의 철학이 정확히 드러난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기운생동’의 극치라고 할 수 있고,  조선 후기 조선 유학의 가치가 극명하게 담긴 겸재의 진경산수화 중에서 [금강전도]가 기운생동의 대표적인 작품인 것이다.
철학과 미학을 빼고 기운생동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모든 구도나 표현방법 따위는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론이다.

골필용법(骨法用筆)은 붓질법이다.

다른 말로 기법이다.
같은 재료, 같은 물감을 사용해도 사용하는 붓질에 따라 천차만별의 표현방법이 생긴다.
거친 사물을 부드러운 붓질로 표현하는 법도 있고 부드러운 사물을 거친 붓질로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어떤 주제와 소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붓질은 변한다. 신선이나 선비를 사기꾼 느낌이 나는 붓질로 표현하면 욕먹는다. 꽃을 거칠게 표현하면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같은 꽃이라도 풍요의 상징으로 사용하느냐, 허영의 상징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용하는 붓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응물상형(應物象形)은 사물을 묘사하는 능력이다.

​현실의 사물과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그려내는 능력은 화가의 미덕이자 마치 운동선수의 기초체력 같은 것이다. 이런 소묘능력을 키우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습작을 해야 한다.

수류부채(隨類賦彩)는 채색법이다.

​그러니까 그림에 채색을 하여 사물의 질감이나 고유성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미술표현의 3대 요소는 형(形), 상(像), 색(色)이다.
형은 사물의 모습이고, 상은 그 사물에 붙은 상징이며, 색은 사물의 질감과 고유성을 드러낸다.
색이 없는 그림은 반쪽짜리이며 채색을 통해 작품은 완성된다. 수묵화는 채색이 없는 그림이다. 가끔 엷게 채색을 하는 담채기법이 있지만 이 정도로는 사물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어쩌면 수묵담채는 수묵에 약간의 장식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수묵화가 색을 버린 것은 유학에 따른 선비, 군자의 자발적 청빈, 엄격한 예법, 유유자적, 풍류라는 미학을 표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채색을 하면 사물의 현실성을 극대화된다. 모든 그림은 이상적 가치를 담는데, 그 느낌이 실감나게 만들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도 아름답지 않으면 소용없다. 화가는 쓰레기를 그려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경영위치(經營位置)는 구도법에 관한 내용이다.

구도는 사물을 배치하고 운용하는 방법이지만 사실은 시공간을 드러내는 미술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원근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구름이나 안개로 수평선을 가릴 것인가 하는 문제,
세로화면이냐 가로화면이냐는 문제,
사물과 사물을 겹칠 것인가, 독립적으로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
큰 사물과 작은 사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
인물의 정면을 그릴 것인가, 측면을 주로 그릴 것인가, 상체만 그린 것인가 전신을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는 모두 구도법이다.
이런 구도법은 철학과 미학에서 요구하는 시공간과 인물상에 따라 결정된다.

전이모사(傳移模寫)는 미술교육방법이다.

선대의 그림을 흉내 내거나 베껴 그리는 방법은 좋은 미술교육법이다.
서양화에서도 그리스로마시대의 조각상을 흉내 내어 그린다. 좀 수준이 있는 학생은 램브란트의 인물화나 다빈치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기도 한다. 서양 속담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이 모방과 복제는 창의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다.

위 6화론 중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기운생동’이다.

▲ 안보영/신선 해학반도도/디지털회화/2015.
생명존중에 대한 주제가 명쾌하기에 분위기는 화려하면서도 밝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풍류의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적절한 웃음(해학)을 넣어 긴장감을 없앴다. 그야말로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가 펼쳐진 기운생동이 넘치는 작품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운생동은 철학과 미학에 관련한 문제이다.
중국에 중국화가 있고, 일본에 일본화가 있고 미국에 미국화, 북한에 조선화가 있는 것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철학이나 미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설령 다른 문화나 사상을 수용한다고 해도 중심이 되는 철학이 있다는 말이다.
서양화를 하는 작가는 서양철학과 미학을 표현한다.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철학과 미학은 유럽, 미국 중심이기에 서양화가 우리나라 미술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화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서양화를 하는 작가가 아니라 한국화, 동양화, 수묵화 따위를 하는 우리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이미 겸재 정선에 의해 조선산수화가 완성되었고, 심사정에 의해 조선남종화가 완성되어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궁중회화가 왕실을 광범위하게 장식했다면 여기에 대한 미학과 철학은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화가 위기를 맞고 어려움에 처한 것은 철학이나 미학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조형원리가 먹이나 한지와 같은 미술재료에 국한되어 있으며 미술교육법이 서양화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철학과 미학은 있는가?
분명 고려 600여 년, 조선 52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전통철학과 미학은 존재한다. 문제는 현대에 맞게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가들의 책임이 아니다. 사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명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려고 한 것이다.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것은 관혼상제이다. 관혼상제는 보수성이 강해 좀처럼 변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인식을 뜻하는 관은 이미 사라졌고, 결혼은 유럽식과 미국식, 전통식이 뒤섞여 있다. 알리바바가 나올 법한 예식장에서 서양식 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이벤트가 강한 미국식 진행방법으로 예식을 치른 다음 전통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드리는 기절초풍할 방식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인다.
상은 장례형식을 말하는데 일본식 국화장식을 한 빈소에 일본식 상복을 입고 전통방식의 절과 음식을 내놓는다.  그런 다음  미국식 장례차량으로 이동하여 유럽식 수목장이나 국적불명의 납골당에 모신다.
제는 제사형식을 말한다.
제사는 예법이 총화 되고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는 형식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을 통합하여 사회적 힘을 형성하는 바탕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뿌리이다.
기독교의 집요한 방해로 전통적인 제사형식은 이미 사라졌다. 명절 때마다 며느리를 고생시킨다고 난리고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상은 졸지에 귀신으로 취급당하고 위패에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미신으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미술문화는 끈질기게 살아있다.
서양의 정물화를 수용하여 우리 전통그림인 백물도와 결합한다. 구도나 재료, 기법은 서양화방식을 사용하지만 사물에 상징을 넣은 것은 우리의 독특한 방법이다. 백물도 형식과 결합한 정물화는 죽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담고 있다. 또한 서양의 풍경화를 수용하여 이상세계를 그려낸다. 현대적인 수묵화도 서양철학과 모더니즘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
미술과 같은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철학과 미학이 있어야 한다. 서양이나 다른 나라의 철학과 미학을 수용하는 일은 나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자기중심이 없으면 아류가 된다.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완성시킨 나라였다. 엄격한 예법을 통해 사회를 유지 발전시켰으며 유학의 최고 인간적 가치인 군자는 모든 인간의 표상이었다. 선비와 같은 지식인은 돈과 권력, 허영과 욕심, 부정과 부패를 경계하여 자발적 청빈을 최고의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유유자적, 풍류는 이런 선비들의 삶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자본과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야만의 세상이다. 또한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 SNS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무턱대고 자본이나 무력에 맞서는 게 아니라 이를 능가하는 철학과 미학이 필요하다.
뭐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순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전통인 유학과 불교의 가치는 한마디로 '생명사상'이다.
무슨 특별한 논리와 주장,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명에는 논리, 주장, 이론 따위가 필요 없다. 그저 모든 생명의 존중, 확장, 발전, 영속성 따위를 말하는 것이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능이다. 한 마디로 '풍부한 생명'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겠지만, 21세기인 현재에도 생명은 여전히 핵심적인 화두이다.
전쟁과 약탈, 살육, 가난, 굶주림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엄을 세우고 공생공영이라는 가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좌절과 파멸로 끝날 것이다.

미술과 같은 예술은 당대의 철학을 담고 표현한다.
세상을 약육강식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 사회가 정글의 법칙으로만 굴러갔다면 벌써 망했을 것이다. 여전히 법과 규범과 종교와 도덕과 양심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세상을 움직인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는 생명존중, 공동체를 위한 자기절제로 요약된다.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담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회적 임무이자 감동의 원천이 되고 기운생동이 넘치는 작품을 창작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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