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은밀한 대북정책, ‘선 비핵화’

중국의 대북관으로 가장 알려진 것은 “동북방면을 지키는 전략적 방벽”이다. 미군이 38선을 넘은 바로 그 날 밤 중국 지도부가 망설이던 참전을 결국 결정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방벽을 지키려는 중국과 그것을 허물려는 미국 사이 타협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중국이 미국과 완전히 공유하는 관점이 있으니 그것은 북의 비핵화다. 북이 인공위성을 쏘고 핵실험을 할 때 마다 미국과 더불어 유엔안보리 제재를 발동한 것 말고도 중국은 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를 적극 활용했다.

‘북 핵’ 문제가 국제사회 현안으로 등장한 이후 북과 중국의 대형 경제교류가 일어났다 주저앉는 사례들을 떠올려 보자. 중국은 1992년 압록강의 단둥과 두만강의 훈춘을 ‘변경경제합작구’로 지정한다. 중앙정부가 사회간접시설과 세제혜택 등을 직접 챙기겠다며 적극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야심찬 계획은 1993년 슬그머니 사라진다.

1992년과 1993년, 무엇이 다른 건가? 92년은 미국이 한미연합전쟁연습을 중단하고 북이 NPT(핵무기비확산조약)의 핵사찰을 수용한 해다. 그리고 93년은 미국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고 북이 NPT를 탈퇴한 해다.

2002년 북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신의주특구 사업도 대동소이다. 2002년 초 ‘악의 축’ 발언에도 불구, 부시정부가 그 해 7월 백남순 북 외무상과 콜린파월 미 국무장관 회담에 응하는 등 대화노선을 유지하는 동안 중국은 신의주특구 사업을 묵인한다. 중국 당국의 손바닥 안 손오공 격인 양빈이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으로 날아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본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대북특사로 평양을 방문(10월 3~5일), 그 유명한 ‘우라늄 농축 의혹’을 과장 제기하며 북미대화를 돌연 박살내는 것과 동시에 중국은 양빈을 체포(10월 4일)하는 방식으로 신의주특구 사업을 뒤엎는다.

2011년 6월 대대적인 착공식까지 치른 황금평과 나선경제무역지대 역시 비슷하다. 단둥시는 지난 7월(2013년) 중국 관영 매체를 통해 올해 초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황금평 공동개발이 중단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부인하면서도 이 프로젝트가 언제 본격적으로 착공할지, 기업 투자 유치를 시작할지에 관한 일정은 정해진 게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르포> 개발 진전 없는 북한 황금평 들녘. 연합뉴스 2013년 10월 10일)

대규모 경제협력의 경우, 중국은 북미대화 동안, 즉 ‘북 비핵화’의 전망이 보일 때만 그 가능성을 슬쩍 열어놓았다. 그리고 전망이 깨지는 동시, 그 가능성을 단호히 지웠다. ‘선 비핵화 후 경제협력’인 거다. “핵과 경제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요즘 미국이 부쩍 강조하는 이 말은 사실 오래전부터 중국의 입장이기도 했던 거다. 시진핑 주석 이후 그 입장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중국 접경 지역은 지금 개발 중이다.” 지난달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한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전 통일부 장관)의 말이다. 이 연구위원은 “도처가 건설 공사 중이었다... 지난해 답사 때와도 사뭇 다르더라.”고 말했다...중국이 23년 만에 북한과 접경지역인 지안·허룽 2곳에 국가급 변경경제합작구 건설을 승인한 사실이, 이런 “개발 중”의 방향과 전략적 의미를 또렷이 가리킨다. (“북-중 접경지역 곳곳 건설공사 중…지난해와도 사뭇 달라” 한겨레 11월 13일)

북한의 대외경제성과 중국 랴오닝(遼寧)성 정부가 최근 신의주 특별행정구(특구)의 본격적인 개발에 합의했다고 정부 고위 당국자가 25일 밝혔다...계획도에 담긴 신의주운하의 경우 서울의 강남북처럼 운하를 사이로 남북 신의주를 나누는 계획으로, 운하 양 옆으론 주택·공공지역이 들어설 예정이다. 운하를 연결하기 위한 교량 10개(철교 1개 포함)도 만들어진다. 이동통신기지국은 북신의주 4곳, 남신의주 2곳에 들어선다. (북·중, 13년 만에 신의주특구 개발 합의. 중앙일보 10월 26일)

현재 훈춘시는 팡촨 일대를 중심으로 북·중·러 3국이 참가하는 '국경 없는 국제 관광구'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3국이 각각 10㎢ 토지를 관광구에 편입해 골프장·카지노·면세점 등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2030년 북극항로 완전 개통되면 두만강 하구는 골든 트라이앵글” 조선일보 10월 29일)

기왕의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추가로 지안과 허룽. 중국이 북과 대규모 경제협력을 네 곳에서 동시에 본격 시작한 것이다. 수십 년 굳세게 사수하던 ‘원칙’을 접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경제적 욕구를 들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2020년까지 온 국민이 중산층 생활을 누리는 ‘소강사회’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인구 1억의 동북3성 개발이 시급하고 그러자면 동해 쪽 출구를 가진 북과 경제협력을 하는 것이 좋다.

둘째 국제정치적 욕망도 있다. 국경을 틀어쥐고 큰돈이 오가는 것을 철저히 막았음에도 그동안 북 경제는 나아졌다. “평해튼, 평양과 맨해튼(Manhattan)의 합성어. 요즘 평양에 상주하는 외국 대사관 직원들과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평양을 이렇게 부른다. 익히 알려졌듯이 맨해튼은 뉴욕의 핵심이자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지방 경제도 호전되고 있다...한국은행조차 지난 수년간 북한 경제가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다고 추정한다.”(북한 경제의 괄목상대, 평양이 평해튼으로. 조선일보 10월 26일) 중국이 북 경제를 ‘견제’하는 틈새로 러시아가 끼어들었고 그렇게 줄어든 정치력을 만회하려면 경제협력이 특효라는 거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제 오늘 불쑥 나타난 변수가 아니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선 비핵화 후 경제협력’을 갑자기 변경한 이유는 그 두 가지 이외의 어떤 것이어야 한다. 확실한 게 하나 있다. 변화는 미중 정상회담에서 왔다.

변화는 미중 정상회담에서

방미 직전 시진핑 주석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반도와 관련, 첫째 한반도 비핵화, 둘째 한반도 평화와 안정, 셋째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등 중국의 ‘한반도 3원칙’을 전통적 순서에 입각해서 언급했다.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만의 비핵화’는 아니다. ‘핵을 포함, 북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의 해결’도 포함한다.

그러나 말이 중립적이어도 실천이 중립적이지 않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북의 비핵화’를 위한 중국의 압박과 ‘북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 해결’을 위한 중국의 그것이 완전 비대칭인 경우도 거기 속한다. 따라서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첫 자리에 고정하면 ‘선 비핵화’를 위한 은근한 압력도 고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변화가 온 거다. 10월 10일 북 행사에서, 한중일(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과감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변화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0월 10일 행사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째는 시진핑 주석의 축전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미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지역 안정보다 비핵화를 강조했지만, 지난주 김 제1위원장에게 보낸 축전에서는 중국이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북한과 함께 노력하기를 바란다고만 말했을 뿐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중 대북정책 우선순위, 비핵화에서 지역안정으로 이동” 연합뉴스 10월 13일)

둘째는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의 발언이다. “류 상무위원이 9일 밤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와 회담할 때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하기 전에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지한다.”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류 상무위원은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두 가지 공식 입장의 순서를 뒤바꿨다.”는 것이다.“(같은 기사)

한중일(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 10월 31일 한중 정상회담 직후 나온 중국 외교부의 발표문에도 첫째와 둘째가 자리를 바꿨다. 또한, 11월 1일 한중일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총리는 ‘북핵’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대체 미중 정상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었다. ‘북핵’ 등 한반도 문제는 주요 의제도 아니었고 따라서 정상회담 합의문에도 일절 언급이 없다. 공동기자회견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반대한다” 등 늘 하던 얘기만 나왔다. “북핵 논의는 절대 하지 않았다, 믿어 달라”는 식이다. 정말일까?

“북한이 현재의 핵개발 추세를 유지하면 2020년까지 최대 100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고 특히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을 20∼30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조엘 위트 미국 존스홉킨스대 초빙연구원. 2015년 2월)이 나오는데도? 해리해리슨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현재 나의 가장 큰 위협은 북으로부터의 위협”이라고 공개 발언(2015년 10월)하는데도? 핵실험으로 가는 징검다리, 인공위성 발사를 사실상 예고한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G2 정상회담, 세계지도를 펴 놓고 서로의 이권을 타협하는 그 판에서 공동의 이해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중국 : 북의 핵 위협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북이 받는 미국의 핵 위협도 같이 고려해야 북핵문제가 풀릴 수 있다. 북과 협상하라. / 미국 : 절대 안 돼. 동북아 패권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야. / 중국 : 그럼 4차 핵실험 막을 수 없을 거야. / 미국 : 당신들이 막아줘. 이게 어디 미국만의 문제야? / 중국 : 지금까지도 못 막았는데 무슨 수로 막으라는 거야? / 미국 : ... / 중국 : 경제협력밖에 수가 없어. 대규모 경제협력으로 어떻게 해볼 테니 시비 걸지 마. / 미국 : ...” 대충 이런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중국의 대북 ‘선 비핵화’ 변경과 미국의 묵인이 만난 결과 인공위성은 아직 지상에 있고 4차 핵실험은 잠복했다. 그러나 해결된 것은 아니다. “눈 오는 겨울에도 쏠 수 있다.” 발사 철회가 아니라 유예.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의 열쇠는 북미관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대변인(북한 외무성)은 (10월 7일 조선중앙통신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대담하게 정책 전환을 하게 되면 우리도 건설적인 대화에 응할 용의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조선반도의 안전 환경은 극적인 개선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안보상 우려점들도 해소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 외무성 “평화협정 체결 메시지 보냈다. 미국은 응하라” 통일뉴스 10월 7일)

김 대표(성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청문회(미 상원 외교위. 10월 20일)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 논의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런 논의에 나서는 데 우리는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비핵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 김 “미국, 북한이 요구한 평화협정에 관심 없다” 중앙일보 10월 22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 전문가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12일 북한에 평화협정 협상과 비핵화 협상을 병행하는 방안이 현재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위트 연구원은 현재 한미 모두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에 '선(先) 비핵화'를 고수하며 거부하고 있는 것과 관련, "모두가 우리의 현재 대북 정책이 잘못됐다는데 동의하고 있다"면서...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두고 "'전략적 혼수상태'를 의미한다"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조엘 위트 "북한과 평화협정-비핵화 협상 병행 제안해야" 뉴스1 11월 12일)

수단이 목표를 배신하는

“핵과 경제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미국의 수단은 북의 경제를 악화시키는 것, 그리고 목표는 ‘북의 비핵화’다. 즉, 북 경제의 악화 없이는 ‘북의 비핵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인공위성 발사와 4차 핵실험을 당장 막기 위해 중국의 대북 대규모 경제협력을 묵인했다면, 수단이 목표를 배반한 거다. 혼수상태는 언제까지 갈까.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전 반전평화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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