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행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물질과 권력으로 이 세상 모든 행복을 온전히 설명하려 하는 이들이 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행복은 그들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저마다 행복의 기준과 크기와 실체가 다르기에,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난 불행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이들은 없다. 심지어 바라는 행복이 어떤 행복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오래전부터 ‘끊임없이’라고 말하면 사기겠지만, 국가의 존재 이유, 필요성에 대해 늘 고민해 온 것 같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가의 존재 이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 해악만을 절감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오늘은 그 자체로 재앙처럼 보인다. 평소 늘 그 필력에 감탄해왔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의 최근 칼럼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남북관계 진전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광복 70주년을 나홀로 축하하던 민망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최 밑도 끝도 없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코스프레와 심지어 역사에까지 이르는 억압, 강요는 그리 애국심이 없는 나에겐 심한 혐오감과 함께 구토를 유발케 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대근 논설주간은 우리가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정부 신뢰도는 인도네시아, 에스토니아가 한국보다 높다. 사법부 신뢰도 역시 멕시코가 높고, 콜롬비아와는 비슷하다. 남녀 임금차는 네팔보다 크다.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 순위는 스리랑카, 필리핀이 더 앞선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삶의 질은 칠레, 멕시코가 더 높다. 필요시 도움 구할 친지가 있다고 응답한 한국인의 비율은 36개국 중 꼴찌다.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 믿을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하루 중 아빠가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3분, 21개국 중 21위다. 이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적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굳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국가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를 이루는, 국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의 행복과 안정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국가는 이미 국가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한민국은 과연 온전한 국가인가? 우리들은 진정 행복한가?

이제 연예인들만 그것도 특히 노래 부를 때만 허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복면 때문에, 졸지에 이슬람국가(ISIS)와 동급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국민들. 사실 ISIS 역시 이라크와 시리아가 온전한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기에 존재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과연 ISIS인가? 아님 그만도 못한가.

▲ 메자키 마사아키, 신창훈 옮김,『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페이퍼로드, 2013.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한때 세계적인 국제금융투자회사인 메릴린치에서 근무하며, 사내 가장 큰 금액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자본의 추악한 욕망으로 들끓는 그곳에서 그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온전히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1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세계 100여 국을 여행하며 그가 품었던 생각은, 단순한 경제적 조건 만으로는 행복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나라가 진정한 강국, 선진국으로 불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그 나라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런 면에서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짧은 시간 동안 높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작 구성원들은 불행한 나라. 불행한 일본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온전히 한국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살률이 낮다 하더라도 그 국가의 행복지수가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다. 또한 출산율이 높다고 행복한 나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전 세계 여러 국가들을 직접 찾아가며 또한 여러 통계자료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이 낮은 나라 중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딱 지금의 대한민국과 일본의 모습이다.

다시 이대근 논설주간의 글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만2563명, 한국인 자살자는 1만3836명이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미국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2살짜리 아기가 엄마의 핸드백 속에 있는 권총을 무심코 꺼내 방아쇠를 당겨 엄마를 숨지게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미국은 자신들의 가치를 위해, 즉 개인적 합리성을 위해 총기사고의 일상화라는 집단적 피해를 감수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가. 미국은 타인을 죽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우리에겐 있는가.

더 이상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기 두려운 사회, 매일 40여 명이 스스로 삶의 끈을 놓는 사회. 과연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파국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국가는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행복 지수를 살펴보며, 행복은 ‘사회적 관대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사회의 존중, 그리고 개인의 요구와 의견을 적극 받아들이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이러한 환경을 갖춘 국가의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시민보다 확실히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불행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기형적 집단주의와 획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책을 국정화하겠다는 정부 앞에서 사회적 관대함, 다양성 존중은 무색하고 무참하다.

오로지 국민을 동원하고 이용하고 소모하는 국가, 그리고 시민의 선택이 존중받고 나아가 실현될 수 있는 국가. 어느 국가의 구성원이 더 행복할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에도 전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어라 일만 하고, 국가의 영광과 발전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다가, 늙고 병들어 더 이상 활용 가치가 없어지는 상황에 몰리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사회. 산업화의 역군으로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이 이제 노령층이 되어, 우리 사회의 잉여로 취급받는 모습. 우리는 분명 행복하지 않다.

저자는 개인의 요구와 사회의 이익을 아우를 수 있는 ‘사회개인주의’를 주장한다. 돈으로 그 어떤 기적도 창출할 수 있는 미친 자본주의 사회도, 개인을 억압하고 국가와 집단 속에 매몰시키는 집단주의 체제도 행복을 전해줄 순 없다. 개인이 행복하고, 행복한 개인들이 모여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극히 당연한 논리. 우리는 그 당연함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만 할까.

대한민국의 위대한 발전과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행복이다. 한반도 구성원이 행복해야 한반도가 비로소 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행복이란 무엇인지, 국가란 왜 필요한지 고민케 한다.

아,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유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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