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과 유물을 뼈대로 상상력이 결합된 총체적인 학문이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일 뿐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흔적을 붙잡는 것은 미래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밝히지 못하는 역사는 늙은이가 한 때 잘나가던 시절을 추억하거나 회한에 빠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림은 강력한 역사적 기록과 유물에 속한다.
조선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를 중심으로 숱한 기록화나 의궤를 남겼다. 이런 기록화는 화원의 개인 생각이나 정서와 같은 추상성을 배제하고 철저한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궁중회화나 화가의 그림은 시대의 사상이나 미묘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선비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를 반영한 것이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학문적 자신감과 더불어 이 땅을 이상세계로 여기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화원의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그림이라도 당대의 흐름에 위배되는 것은 비판을 받고 배격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당대의 현실이나 사상, 정서를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역사를 알고 재구성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림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의 꿈과 이상, 현실적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은 [십장생도]이다.
이런 [십장생도]를 왕의 권위와 역할에 맞게 양식화하여 그린 작품이 [오봉도]이다.
[십장생도]의 내용이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고 한다면 [오봉도]는 이러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사람, 혹은 역할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왕은 세상에 군림하는 신이나 절대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 살만한 세상을 정치와 모범을 통해 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봉도]는 왕의 공식적인 자리부터 개인 침소에 이르기까지 어김없이 배치했고 심지어는 죽어서도 [오봉도]와 함께 했다.

[오봉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소재는 산봉우리이다.
그래서 산봉우리의 표현 수준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한다.
[오봉도]의 봉우리는 나무나 수풀이 없는 암산이다.
우리그림에서 산은 땅을 상징하는데 그 바탕은 수석(壽石, 괴석)이다.
수석은 독자적인 소재이면서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또한 우리그림을 배울 때 가장 먼저 그려야 하는 소재이기도 한다.
[장생도], [궁중모란도], [화조도], [수묵산수화], [고사 인물도], [백물도]와 같은 거의 모든 그림에 수석이 들어간다. 작은 수석을 그릴 수 있다면, 이런 수석을 모아 큰 바위산이나 산봉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그림은 수석으로 시작해 수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 위-오봉도/비단에 채색/8폭/162.5*365.5/18세기/삼성미술관 리움.
아래-오봉도/비단에 채색/4폭/147.8*232.6/19세기/국립고궁박물관.
두 오봉도는 산봉우리의 표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상단 그림의 바위산은 경계부분을 어둡게 처리하고 안쪽으로 오면서 점차 밝게 표현했다. 아래 그림은 바위산의 경계부분을 밝게 처리하고 밑 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상단 그림의 바위산은 단단하게 고정된 느낌이지만 아래 그림의 바위산은 파편적으로 흐트러져 보이면서 괴기스럽다. 아마도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회화는 정형화, 양식화 되어 있다.
한번 만들어진 형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궁중회화의 형식이나 내용이 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동일한 철학과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왕조가 520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었고 숱한 자연재해와 사화(士禍)와 같은 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이럴 때마다 화가들의 그림은 달라졌고 궁중회화도 영향을 받았다.
도화서 화원들은 낡은 그림을 새로운 그림으로 대체할 때 보관되어 있던 기존의 그림본을 중심으로 창작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조심스럽고 미묘한 변주가 일어나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변주도 있고, 창작을 주관하는 궁중화원의 수준에 따라, 혹은 발전된 미술재료의 도입에 따른 변화가 생긴다.

18세기 이전의 궁중회화는 대부분 소실되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조선의 두 번째 전성기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는 겸재 정선, 김홍도, 신윤복, 이명기, 최북, 강세황, 심사정, 김득신, 조영석과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활동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궁중화원 출신이다. 선비출신 화가들도 왕의 어진을 그릴 때 감독 역할을 하면서 궁중회화와 직관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통해 궁중화원의 위상이 높아졌고 서양화법의 수용과 [책가도], [요지연도], [신선도] 따위의 새로운 궁중회화가 수용되거나 창안되었다.
이런 조건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에 궁중회화가 완성되고 최고의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왕을 상징하는 [오봉도]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거나 창안되었을 것으로 본다.
상단의 [오봉도]는 안정된 구도와 형식에 화려하고도 차분한 채색으로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야말로 [오봉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위의 두 그림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기본 구도나 형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아래 그림 속의 두 개의 태양은 화면에 비해 너무 크고 바다의 너울은 질서가 없다. 황색의 바다는 검게 칠해져 있고 가물가물한 하늘에는 파란색을 칠한 흔적이 역력하다. 좌우 상단이 잘려나가 전체를 알 수 없지만 소나무의 크기도 왜소해 보인다.
특히 산봉우리의 표현에서 엄청난 파격이 일어나고 있다.
산봉우리의 경계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반대로 밝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기법 차이로 인한 변주로 보기에는 화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단단한 질서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던 산봉우리는 혼란스럽고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영.정조 시대가 지나간 19세기 조선은 밖으로는 외세의 문화나 침략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세도정치가 발호하고 있었다.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삼정(三政)은 문란해져 백성의 삶은 피폐해 졌다.
하단의 [오봉도]는 대략 19세기쯤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허술한 [오봉도]는 왕이 있지만 실제로는 외척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부패하던 시대의 흐름과 닮았다.
어쩌면 실추된 왕의 권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그림도 따라 혼란스러워 진다. 왕권이 힘을 잃으면 왕을 상징하는 [오봉도]도 권위를 잃는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오봉도]가 일상적으로 창작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려졌거나 혹은 왕의 어좌를 장식했겠지만 강한 반발로 인해 곧 다른 그림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은 망했지만 현재에도 조선의 가치를 민족의 정서를 타고 흐른다.
사람이든, 사회든, 국가든 간에 망할 때의 모습은 추하다. 그렇다고 피폐하고 추한 모습을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따라 배울 필요는 더욱 없다.
빛나던 청춘과 노련한 장년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문화야 말로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소중한 가치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