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듯, 글 역시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발간된 뒤에는 바꾸기 힘들다. 특히 지금처럼 활자가 온라인을 통해 짧은 시간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어렵고 두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글이 갖는 위력은 여전한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양날의 칼을 마구 휘두른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다치고 때론 생명마저 잃는다.

특정인의 의지에 따라, 또는 특정 정부의 입맛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가 재단되는 것이 심히 위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역사책을 바꾼다고 해도, 역사 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획일화된 역사책으로 역사를 상상해야 하는 아이들은 정신적 빈곤함과 더불어 ‘무오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클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글에서는 심한 악취가 나곤 했다. 위를 향한 끝없는 찬양과 굴종은, 당대에 그 글을 쓴 이에겐 부와 명예로 화답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악취와 병폐는 더욱 커지게 된다. 어찌 보면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떠한가. 힘없는 자, 나약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은커녕 삶의 정상적 유지조차 힘든 이들을 향한 따뜻한 글에는 언제나 ‘글’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어떤 권력과 부귀 앞에서도 주눅들 수 없는 힘. 글은 분명 그처럼 아름답고 고귀하게 역할 할 수도 있다.

▲ 최준영,『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이지북, 2013.7. [자료사진 - 통일뉴스]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로도 잘 알려진 저자는, 낮은 곳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오랫동안 이웃들과 소통해 온 사람이다. 교도소 수감자, 미혼모, 노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긴 시간 이어왔고, 노숙자를 위한 잡지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스스로 거창한 학벌이나 지연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이였기에, 힘없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출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인문학을 이야기했고, 삶을 나누었다.

책은 그가 매일 매일 거의 빠뜨리지 않고,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았다. 그는 스스로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쉬지 않고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무리 당시에는 제법 잘 썼다고 느낀 글이라도 다음 날 다시 보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댓글을 이미 달아, 차마 삭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다른 글을 다시 올려 옛글이 화면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꾸준히 글을 써왔다.

하지만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는 글이 아닌가.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진 글보다는 담백하고 솔직하게 생각의 끈을 이어가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좋은 글 아니던가. 권정생 선생의 글에서, 이오덕 선생의 글에서 그 어떤 화장과 과장과 겉치레를 찾아볼 수 있는가.

그런 눈으로 본다면 저자의 글은 썩 훌륭하다. 적어도 가식이나 겉치레가 없다. 또한 위를 향한 구차하고 눈꼴 시린 찬양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이웃과, 힘들어하는 이들을 향한 끈끈한 사랑이 따뜻하다. 그런 글이기에, 거북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반갑고, 살뜰하다.

특히 별 것 아닌데도, 가슴을 때리는 글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다. “미안한 걸 미안해할 줄 알고, 부끄러운 걸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잘못한 일을 반성할 줄 알고, 표피 너머의 심연을 성찰하려는 자세를 가지려 노력한다면 실수나 무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무지를 헤쳐 나가는 끝없는 배움의 과정이고 실수를 되풀이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본질을 외면하면서 수단에만 매달린다든지, 정작 소중한 사람에겐 소홀히 하면서 입만 열면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며 저자가 느낀 심정이다. 저자는 ‘후배나 제자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강사 수입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도움은커녕 지지 발언 한마디 하지 않는 교수들이 밖에 나가서는 진보 인사로 불리며 ‘노동’을 부르짖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꼬집는다.

어찌 그것만일까. 미안한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일,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오히려 당당한, 그런 후안무치한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라 외치며 그야말로 꼴값을 떨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기억한다. 노무현이 스러진 이후, 그와의 인연을 들먹이며 부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정치인 김영삼의 마지막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영악한 이들의 뻔뻔함을.

저자는 실의에 빠지고 삶의 무게에 스러지려 할 때, 오직 글의 힘으로, 문학을 버팀목 삼아, 인문학을 동아줄 삼아 끝내 살아낸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글이 가진 놀라운 힘과 치유력을 이웃들과 나누고자 한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뻔뻔하고, 순하디 순한, 한없이 어여쁜 이들이 자신의 무력함과 시대의 몰염치에 부끄러워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이웃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이웃의 상처에 자신도 생채기를 입는다. 염치가 사라진 시대, 남은 것은 평범한 이들의 용기와 위로, 연대와 공감뿐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위대한 소박함인가.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책 한 권은, 소통의 글쓰기가 가진 적지 않은 힘과 위로를 전해준다. 도무지 정들기 힘든 세상, 도무지 기대기 두려운 세상, 도무지 눈물이 서러운 세상.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함께 울고 웃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른 바 기존 지식인 사회에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 최준영이 전해주는 따뜻한 소통의 인문학, 그리고 소통의 글쓰기. 이는 이 벅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허기짐을 잠시나마 달래줄 수 있는 소중한 차 한 잔과 같다. 그는 적어도 수많은 우리 이웃들에게는 당당히 인정받은 인문학자이자 교수이다.

그의 치열한 책 읽기 역시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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