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오주석 선생은 생전에 [송하맹호도]를 찬양했다. 그의 역작인 [한국의 미 특강]이란 책의 표지로 사용할 정도였다. 특히 오주석 선생은 극사실에 가깝게 표현한 호랑이의 사실성에 주목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털은 세필로 한 올 한 올 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실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오주석 선생의 평가는 [송하맹호도]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나는, 그런 극사실적인 호랑이의 표현이 의아했다.
이런 표현은 김홍도의 방식이 아니다. 어진과 같은 일부분의 작품을 제외하면 김홍도의 필치는 사실성과 관련이 없다. 진경산수화에 능통한 화원이었지만 학, 사슴, 거북, 박쥐, 두꺼비 따위의 다른 동물들은 쓱쓱 그렸다.
또한 표암 강세황이 그렸다고 알려진 소나무는 호랑이 묘사와는 동 떨어진다. 정말 합작을 했다면 김홍도가 스승의 방식에 맞추거나 반대로 강세황이 중심 소재인 호랑이 표현방식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뭐, 그렇다고 소나무와 호랑이의 표현이 거슬리는 것은 아니다.
7m에 이르는 [신선도]를 즉흥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필력을 가진 김홍도이다. 호랑이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아도 그림의 뜻을 전달하고 품격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김홍도가 자신의 필치와 어울리지 않게 정말 엄청난 공력을 들여 호랑이를 그린 이유가 뭘까? 단지 호랑이의 용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어서였을까?
왕의 상징도 아니고 궁궐에서 필요한 그림의 소재도 아니었던 일개 짐승인 호랑이를 그리는데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는 것은 반대로 호랑이 그림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호랑이의 상징은 고작 벽사나 세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선비들은 호랑이의 생태적 상징인 용맹, 포악, 전쟁, 공격성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서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청나라에서 유입된 [호렵도虎獵圖]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호렵도]는 돈 많은 상인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또한 궁중장식화로도 창작이 될 정도였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사냥그림인 [호렵도]는 제목 그대로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호렵도]는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호는 호랑이라는 뜻도 있지만 오랑캐라는 의미도 있다. 흔히 만주족을 호인(胡人)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호렵도]는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냥이나 살육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고 동시에 청나라를 낮추어보는 선비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만약 김홍도가 보통의 호랑이를 그렸다면 호랑이 사냥을 좋아했던 청나라에 굴복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호랑이의 용맹성을 선비의 진리를 향한 강인한 마음으로 수용하고자 했지만 자칫 선비들을 청나라의 사냥감으로 내몰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위험성을 감지한 김홍도는 사냥감의 호랑이가 아닌 세상의 주인공인 호랑이를 표현해야 하는 압박감이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김홍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호랑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전쟁과도 관련이 없고 포악성도 제거하고 동시에 도망 다니는 사냥감이 아닌 품위 있고 단정한 호랑이를 그리고자 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세밀한 표현으로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기품을 창조한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량을 쏟아 부었음에도 김홍도는 여전히 불안했다.
어진이나 궁중회화를 제외한 보통의 수묵화에서 합작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스승이면서 선비화가였던 강세황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유는 선비의 보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비와 중인의 신분 차이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선비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글로 써서 세상에 발표할 수 있었다. 시골의 선비가 상소문을 만들어 올리면 왕은 반드시 읽어야 했던 것과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호랑이를 선비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던 김홍도의 엄청난 미술적 실험은 실패한다. 동시에 선비들은 호랑이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홍도의 미술적 실험은 어느 세상에도 없는 탁월한 호랑이 작품을 탄생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