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맹호도]는 김홍도의 작품 중에 걸작이라고 평가되어 미술교과서에도 실렸다. 제목 그대로 ‘소나무 아래의 용맹한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린 공동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그림을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하신 고(故) 오주석 선생은 나름의 연구로 [송하맹호도]의 가치를 높였다. 호랑이의 표정이 중국이란 일본에 비해 무섭지 않으면서도 진경화법을 배운 김홍도답게 소나무에 가로로 난 흠집은 호랑이의 영역 표시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또한 그림 속의 호랑이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일본인들의 배첩(표구)으로 인해 가로세로가 잘려나간 것이라는 것도 알아내었다.

▲ 김홍도/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90.4*43.8/리움미술관. [자료사진 - 심규섭]

나는 이 그림을 조형적으로 분석했었다.

호랑이의 자세는 해부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림 속의 호랑이는 정면의 얼굴, 측면의 뒷다리와 꼬리, 위에서 본 긴 허리의 결합이다. 특히 허리는 기형적으로 길게 표현되어 있지만 보는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느낀다.
호랑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털 한 올까지 세필로 그려냈다. 진경화법으로 녹여낸 호랑이는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완벽한 모습으로 탄생되었다.

18세기, 그 당시 가장 흔한 호랑이그림은 까치호랑이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까치호랑이그림은 그야말로 벽사용 세화인데 요즘말로 민화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까치와 호랑이, 소나무가 주요 소재이다. 호랑이는 ‘보답한다, 고하다’, 까치는 ‘기쁘다’, 소나무는 정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이 들어오다.’는 의미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민화를 대표 할 만큼 많이 그려지고 극단적인 정형화를 이루었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도 이런 까치호랑이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전문화원이나 선비들이 그린 호랑이그림은 거의 없다.
[송하맹호도] 이후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적은 있으나 김홍도의 아류에 그친다. 결과적으로 호랑이그림은 선비와 양반들 사이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맹수이고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흔히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말이 있다. 호환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에게 상해를 입는 것을 말하고 마마는 천연두라는 질병이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호랑이가 조선반도에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세기 말쯤에 호랑이, 표범, 곰과 같은 맹수에게 피해를 입은 규모가 해마다 사람 200명, 가축 7,000마리 정도였다니 ‘호환마마’하는 말이 나올 만하다. 조선말기 한 유명한 사냥꾼은 호랑이 100마리를 사냥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선비들이나 백성들은 호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맹수인 호랑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용맹한 존재라고 한다면 이런 생태적 상징은 군대, 전쟁, 싸움에 잘 어울린다. 그런데 학문의 나라, 문민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런 상징을 가진 호랑이를 좋아했을 까닭이 없다.
민간에서 호랑이를 악귀를 물리치는 존재로 수용했다고 하지만, 악귀를 물리치기 전에 사람이 먼저 호랑이에게 죽을 판이었다. 고작 군대에서 상상의 호랑이인 백호를 깃발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는 뜬금없는 그림이다.
앞선 전통도 없고 호랑이를 그릴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그림은 ‘뜻그림’이라고 할 만큼 각각의 사물에는 상징이 붙어있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에는 어떤 상징이 붙어있을까?

일단 영조 때 도화서 화원이었던 정홍래의 [해응영일], [욱일취도]라는 그림을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자.
[해응영일]의 주요 소재는 매, 독수리이다.
전통적인 화법에 따르면 상징이 붙은 새는 학, 기러기, 원앙, 오리, 까치, 참새, 메추리, 꿩 정도이다.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그리지도 않았고 상징이 붙어있지도 않다.
매를 그린 그림이 나타난 것은 17~18세기 전후로 본다.
이것은 청나라로부터 수입된 문화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알다시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족은 유목과 사냥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대만으로 도망간 명나라 잔당을 소탕한 청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조선도 이러한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를 드나들던 연행사절단, 사신단을 통해 청나라의 고급문화가 수용되었다. 그 중에서 청나라 귀족들이 좋아하는 [호렵도]와 같은 사냥그림이나 삼국지에 나오는 전쟁그림 따위가 있었다. 특히 [호렵도]는 호랑이나 여러 짐승들을 사냥하는 만주족의 문화가 종합적으로 녹아있는 그림이다.
매를 이용해 사냥을 하는 문화도 청나라에서 전래한 것으로 본다. 매를 그린 그림의 주인공은 대부분 사냥매이다.

▲ 해응영일(海鷹迎日)/정홍래/118.2*60.9/견본채색/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이러한 청나라 문화 속의 매와 독수리가 조선에 들어와 새로운 상징으로 바뀐다.
그것은 조선에는 사냥에 대한 정서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냥을 즐겨하지도 않았고 권하지도 않았다. 문인들의 그림이나 글에는 사냥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정홍래의 [해응영일], [욱일취도]에는 강한 열정을 뜻하는 아침 해와 풍파에도 제자리를 지키는 괴석과 함께 아침 해를 바라보는 용맹스런 매를 그렸다. 그림의 어디에도 사냥과 관련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번 잡은 사냥감을 절대 놓지 사냥매의 용맹성을 선비의 문화 속에 녹여내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의지를 놓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수용한 것이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는 이러한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일단 까치호랑이 그림과는 차별성이 있다.
이 말은 까치호랑이 그림처럼 ‘신년보희’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호랑이, 까치, 소나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송하맹호도]에는 까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소나무가 새해를 뜻하는 의미도 있지만 선비들의 학문적 가치를 담은 그림에 정해진 시간 따위는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한다.
또한 정월에 쓰고 버리는 세화를 이렇게 섬세하게 그릴 필요가 없었고 동시에 강세황이라는 당대 최고의 선비화가까지 동원하여 그릴 이유가 있었을까?

장군을 위한 그림이나 싸움을 고취시키는 그림도 아니다.
호랑이의 용맹함은 사나운 이빨과 발톱, 공격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하지만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이빨이나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고 공격적인 자세도 아니다. 특히 호랑이 얼굴 표정은 온순하고 눈매는 청년의 기백이 느껴질 만큼 똘똘하다.
달을 향해 포효하는 일본 호랑이그림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김홍도는 청나라,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진 세계적인 화가였다.
김홍도는 전통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화가이다.
씨름, 무동과 같은 풍속화에서 보듯이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는 화면구성을 선보이고, 서양화법을 수용하여 [책가도]를 창안하고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려내었다. [요지연도]를 수용하여 조선의 [신선도]를 창안하고 신선과 선비를 통합하는 획기적인 작품을 그려낸다.
이러한 자신감은 열대식물인 종려나무를 대나무의 상징으로 대치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정홍래가 청나라의 사냥매를 수용하여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만들었듯이 김홍도도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호랑이는 사냥매보다도 더 크고 용맹한 짐승이다. 이러한 호랑이의 생태를 활용하여 강력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고작 벽사나 세화의 상징에 머물러 있는 호랑이를 선비의 상징으로 높이고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인 중인신분이었던 김홍도는 선비들 사이에서는 그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일 뿐이었다.
그래서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선비화가인 강세황에게 공동작품을 부탁했을 것이다. 이것은 강세황이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개인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강세황이 보증한 [송하맹호도]는 선비들 사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학자는 그림 속의 [표암송필]이라는 강세황의 글은 조작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강세황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종려나무와 마찬가지로 호랑이는 선비의 보편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지 못한다.
아래로는 까치호랑이그림과 상징이 뒤엉키고 위로는 사냥, 전쟁 따위의 정서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홍도는 호랑이에 붙은 미신과 행운 따위를 믿지 않았다. 또한 호랑이에게 붙은 살육과 전쟁의 냄새를 제거하여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창작태도는 놀라울 따름이다.|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호랑이 그림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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