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우리를 트리니다드 숙소에서 라보카 해변으로 실어다 준 올드카. [사진제공-임영태]

아침 트리니다드 거리의 이모저모

학교를 지나 도시 중심가로 들어갔다. 관청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잘 단장된 새 건물도 보인다. 산타안나 광장 공원에 학생들이 모여 떠들고 있다. 수백 명은 될 것 같다. ‘오늘 무슨 행사가 있나? 아니면 우리의 체험학습 같은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학생들은 생기발랄했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도 많은 지 서로 모여 앉아서 조잘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장난을 치며 노는 아이들도 보였다.

우리나라 아이들이라고 저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서열화된 대학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지옥입시에 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 갑자기 고1의 막내아들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약간 울적해진다.

벤치 한쪽에서는 노트를 꺼내놓고 공부를 하는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쿠바는 원하면 대학은 물론이고 박사까지 모두 무상으로 교육받고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원하는 곳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성실히는 어느 곳에서나 통하는 만병통치약이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인 셈이다. 그렇게 살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특히 경쟁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쿠바의 학생 선발절차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알려져 있다. 입시부정은 없다는 이야기다. 피델 카스트로 의장의 아들도 아바나 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렀다가 떨어진 적이 있고,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이며 라울 카스트로에 이어 권력서열 2위인 국가평의회 부의장 카를로스 라헤의 딸도 아바나의 명문고 레닌고교 입시에 떨어졌다고 한다.

광장공원 왼편에 ‘Official Zona’라고 쓰여 있는 건물에서 막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듯한 일군의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들 수첩을 하나씩 들고 있다. 무슨 건물일까? 시 청사일까? 아니면 공산당사? 공공청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언뜻 보아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찍은 사진을 살펴보니 건물 정면에 ‘ASAMBLEA MUNICIPAL’이라고 돼 있다. 시의회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 건물 입구로 다가가서 안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젊은 수위가 우리를 쳐다보면서도 전혀 제지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짧은 영어로 ‘City Hall’이냐고 물었더니 ‘노’라고 말한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다. 건물 안을 보니 라울 카스트로의 초상이 걸려 있다. 맞은 편 벽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계속 우리가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젊은 수위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꼬레아’라고 대답했다. ‘아, 꼬레아!’ 라고 응수할 뿐, 더 이상 의사소통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 자리를 옮긴다.

다시 거리를 걸었다. 병원이 나타났다. 병원은 모두 24시간 근무라고 표기돼 있다. 이곳 의사들은 힘들겠다. 보수도 적은 데 일주일에 한 번은 밤샘 근무를 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후에 의사인 산타클라라의 까사 여주인에게서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이런 체제에 순응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확대되면 계속 그렇게 갈 수 있을까? 개방 후 쿠바의 고민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거리를 걷는다. 빵가게, 식료품점, 커피점 등이 계속 나타난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도 곳곳에 보인다. 역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아침 산책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간에 빵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파는 사람도 만났다. 그를 보면서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팥빵을 배달하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아이들은 힘들게 언덕길을 올라가는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면서 때로는 빵을 훔쳐 먹기도 했었다. 쿠바에서는 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자주 보인다.

▲ 산타안나 광장에 모여 있는 학생들.[사진제공-임영태]

 

▲ 광장 벤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시의회 건물.[사진제공-임영태]

 

▲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듯한 일군의 사람들. [사진제공-임영태]

 

▲ 자전거에 빵을 싣고 다니면서 팔고 있는 아저씨.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거리의 자전거택시와 승용차들. [사진제공-임영태]


세월호 리본을 만나다

우리는 쿠바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코펠리아’다. 그렇게 교수님이 먹어보고 싶어 했던 그 아이스크림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맛을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각각 하나씩 시켰다. 상당히 큰 유리컵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그 위에 과자종류를 데코레이션 해서 올려놓았다. 아이스크림은 달달했다. 환상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입맛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는 좋은 에너지원이 되었다.

가게에는 젊은 아가씨 한 명과 남성 한 사람이 있었다. 메뉴판에 크리스탈 맥주가 적혀 있어서 맥주가 되냐고 물었더니 안 된단다. 아직 시간이 안 됐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멕시코도 쿠바도 모두 9시가 지나야 술을 파는 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

가게를 나와 다시 걸었다. 어제 처음 왔을 때 찾아갔던 비아술 터미널까지 갔다. 결국 우리는 이 작은 도시의 중요 지점을 거의 다 돌았던 것이다. 최소한 이 작은 도시의 절반 이상은 구경을 한 셈이다. 그 사이에도 상점 앞에서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목격한다. 이런 광경을 마음대로 사진에 담아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쿠바는 통제국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 곳을 지나는데 건물 안에 책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서점은 아니다. 간판을 보니 도서관이다. 나이든 여성 두 분이 카운터에 앉아서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광경이다. 쿠바에서는 나이든 여성들이 공공기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 우리나라라면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 일하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직원일까, 아니면 자원봉사자들일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니 물어보기도 그렇다. 그냥 추측만 해본다. 이 대표가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었더니 좋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오니 두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 그 사이 두 분도 밖에 나가 한 바퀴 돌았으나 우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비아술 터미널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로 3박4일의 일정으로 떠나는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우리가 포기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장님이 비아술 버스 차창에 노란리본이 달린 광경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에서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등장한 그 리본이다. 저것이 무엇일까? 과연 세월호를 상징하는 리본인가? 아니면 또 다른 희생자를 추모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의미를 지닌 것일까?(주1) 그리고 그것은 누가 붙여 놓았을까? 한국인 여행객일까? 아니면 세월호 투쟁에 대해 연대의식을 가진 쿠바인이나 어느 외국인 여행객이 한 것일까? 새삼 세상이 좁고 세계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 코펠리아 아이스크림 가게.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의 도서관. [사진제공-임영태]

 

▲ 병원 건물. ‘24시간’이란 표시가 선명하다.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아침 국영상점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아침 국영상점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아침 국영상점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아침 국영상점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은행 건물.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트리니다드 터미널의 비아술 버스에 붙어 있던 노란리본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진제공-임영태]

 

▲ ‘사랑하는 사람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의미를 지닌 노란리본이 세월호 사건의 상징표식으로 등장했다. 사진제공-임영태]


올드카를 타고 라보카 해변으로

아침을 간략히 먹고 떠날 준비를 했다. 준비는 끝났는데 택시가 안 온다. 내가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더니 집 앞에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설마, 저 차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낡은 차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설마” 한다. 그때 릴리 여사가 위층으로 올라왔다. “택시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집 앞에 대기 중”이라고 답한다. 저 차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한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지만, 우리는 모두 놀라움과 경이감을 표한다.

정말 저 차가 굴러갈까 싶은 생각이 든다. 차는 굴러가느냐, 짐은 실을 수 있느냐고 의혹에 찬 눈길로 묻는다. ‘노 프라블럼’ ‘전혀 문제없음’이라는 대답이 연속해서 돌아온다. 우리 일행은 잠깐 주저하다 차를 타기로 결심한다. 그러자 기사가 짐을 싣기 위해 잠가둔 차의 뒷 트렁크의 자물쇠를 연다. 우리는 짐을 싣는다. 하지만 트렁크가 좁아서 캐리어를 세 개밖에 못 싣는다. 그 중 작은 한 개의 캐리어는 앞좌석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는다. 결국 그 짐은 내 무릎 위에 놓인 채 목적지까지 가져가야 했다. 매고 다니는 가방은 각자의 무릎 위에, 그리고 내 가방은 두 발 사이에 놓였다.

나는 출발하면서 택시기사에게 ‘슬로우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가 유쾌하게 ‘슬로우리’라고 대꾸한다. 차는 천천히 크렁크렁 소리를 내면서 굴러간다. 차는 시속 30~40km 정도로 달렸다. 차가 달리는 동안 기사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먼저 설명을 시작한다.

“이 차는 1939년 산(폭스바겐)으로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차로서 단 한 대뿐이다. 최고 시속 100km까지도 가능하다. 자신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물려받았다. 자신은 1995년(주2)부터 이 차의 주인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개인차냐고 물었더니, 이 차는 ‘국가와 상관없는 완전 개인 소유’라고 말한다. 1939년산이라는 말에 우리 모두 놀라면서 함께 배를 잡고 웃는다. 세상에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차라니. 교수님보다도 더 나이가 많다. 다행이 차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한 번도 멈추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1939년 생산된 차라고 했지만 우리는 긴가민가했다. 76년이나 됐다는 이야긴데 그렇게 오랫동안 차가 견딜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던 것이다. 실제로 39년산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단히 오래된 차인 것은 분명했다. 차문, 유리창, 차체, 좌석 등 어디하나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엔진에서도 계속 크렁크렁 하는 소리가 났고, 트렁크도 자물쇠로 채워야 닫혔다.

우리는 택시비로 10꾹에 예약을 했다. 그런데 앙꼰은 14km 거리지만 라보카는 5km에 불과했다. 우리는 앙꼰이라고 생각하고 10꾹을 주기로 했으니까 실제로는 배를 준 셈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올드카 주행체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쿠바에 외국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경제발전이 이뤄지면 이런 차는 구경하기도 힘들 것이다. 우리는 라보카 해변에 도착해서 그 올드카와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우리를 실은 올드카는 천천히 해변을 향해 나아간다. 아침에 봤던 그 이정표가 있던 곳을 지나서 남쪽방향으로 나아갔다. 길 좌우로 망고 과수농장이 나오고 소목장도 보인다. 그림이 그럴듯하다. 쿠바 여행을 하면서 나는 쿠바가 본격적으로 개방을 하게 되면 아마 여행지로 뿐만 아니라 영화나 광고 촬영지로도 많이 이용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경이라고 할 만한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모르겠지만 가는 곳곳마다 경치가 볼만했다.

차는 30분쯤 달려서 해변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한 그런 곳이 아니라 좀 이상했다. 그곳은 휴양지라기보다는 작은 어촌마을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앙꼰 해변이 아니었다. 라보카 해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거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사에게 어필을 했지만 기사는 릴리에게 라보카 해변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릴리 여사가 한 이야기를 다시 상기해보니,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친구가 해변가에서 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소개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또 그녀는 앙꼰에는 호텔이 세 개 있는데 엄청 비싸고 휴양지여서 복잡하다면서, 친구가 있는 해변이 조용하고 지낼만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약간 기분이 그랬다. 하지만 우리가 꼼꼼히 확인하지 못한 때문이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우리를 라보카 해변으로 실어다 준 올드카의 겉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올드카의 내부. [사진제공-임영태]

 

▲ 올드카의 내부. 닳고 헤져서 솜 등이 나와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의 숙소 전경.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숙소 앞 올드카와 기사. [사진제공-임영태]


라보카 해변의 물놀이
  
우리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여기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차는 해변가 한 까사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집이었다. 그 집의 방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낸 곳 중 가장 깨끗한 편이었다. 최근에 집 손질을 한 듯 잘 정리돼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짐을 들여놓고 막 정리를 하고 있는데 릴리 아줌마가 친히 방문을 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차 온 것이 분명했다. 이 대표가 “마이클과 더불어 개방이 가속화되면 아마도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두 사람은 인맥, 사업수완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됐던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그 릴리 아줌마에 대한 인상을 결정적으로 망쳐놓은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일단 우리는 릴리에게 왜 여기를 소개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앙꼰에는 호텔밖에 없고 비용이 너무 비싸다. 이곳도 바다가 볼 만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했다. “OK, 알겠어요. 여기서 지내보지요.”

초로의 주인내외는 매우 순박하고 착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백인으로 유머 감각이 있고 쾌활했다. 아주머니는 뮬레토였는데 정말 인상이 선해보였다. 아주머니는 전형적인 쿠바인 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얼굴에 약간 그늘이 있어 보여서 건강이 안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할 때는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낯선 사람에 대해 약간은 긴장한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간단히 정리한 뒤 우리는 돗자리를 들고 해변으로 갔다. 드디어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돗자리가 빛을 발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열대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짐을 내려놓은 뒤 물로 직행했다. 교수님은 옷과 짐을 지키고 우리는 바다에 뛰어들어 신나게 놀았다.

외국인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 쿠바인들이 주로 오는 곳인 모양이었다. 관광버스가 한 대 해변에 와 있었는데 아마도 가까운 곳에서 온 쿠바인 관광객 같았다. 그들은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동네 아저씨들이 간이음식점에서 맥주와 모히또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해변 그늘 아래 자리를 잡기 전 과일주스를 파는 간이음식점에서 피자를 시켜먹었다. 세 개를 시켰는데 내가 한 개 반을 먹고 세 분이 나머지를 나누어 먹었다. 원장님은 여전히 식사를 못했다. 이 대표도 잘 먹지 못했다. 나는 점차 회복되는 중이었다. 교수님은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기력을 못 쓰니까 자기관리를 더 철저히 하시는 것 같았다. 교수님이 원장님 걱정을 계속하셨다.

피자는 양념이 너무 짰다. 파리도 음식냄새를 맡고 계속 달려들었다. 그래도 피자빵은 먹을 만했다. 아마도 열대지방이어서 음식을 짜게 먹는 모양이었다. 날씨가 더워 땀을 많이 흘리니 소금 섭취는 필수다. 또한 더운 날씨에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짤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피자는 쟁반도 없이 누런 비료종이에 받쳐서 주었다. 주위의 다른 손님들은 아예 반으로 접어서 베어 먹었다. 우리는 포크를 달라고 해서 잘라서 먹었다.

콜라도 두 개를 시켰다. 원장님이 “콜라 맛이 좋다”고 말한다. 평소 콜라는 아예 입에도 안  대는 분이다. 역시 콜라든 사이다든 탄산음료는 입에도 안대는 이 대표도 콜라를 잘 마신다. 나는 이때 ‘커피-콜라-헐리우드 영화’의 강력한 세계 지배력을 떠올렸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음식을 못 먹는 사람도 콜라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이 대표는 계속 그늘에서 잠을 잤다. 아마 몸 상태가 영 안 좋은 모양이다. 원장님과 나는 바다에서 신나게 놀았다. 바닷물은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지만 수영을 하며 놀만했다. 모래사장은 작은 규모지만 사람이 많지 않으니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오후 3시경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우리 짐 가운데 음식물을 냉장고에 넣어놓지 않은 걸 떠올리고 집에 갔다 오겠다니까 모두들 집에 가서 쉬자고 말했던 것. 돌아오면서 음료수(콜라와 사이다)를 샀다. 숙소로 가서 씻고 잠을 잤다. 6시경, 교수님이 우리를 깨웠다. 원장님 몸이 계속 안 좋으니 누룽지를 끓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준비를 해서  7시경에 저녁 식사를 했다.

주인집에서 만들어준 수프, 쇠고기 정식(비프스테이크+쌀밥), 오이, 양배추, 그리고 누룽지탕이 식탁에 올랐다. 수프가 심심하고 먹을 만했다. 양배추와 야채를 넣고 끌인 일종의 야채국 같은 것이었다. 옥수수도 한 조각 들어있다. 쿠바 수프였다. 수프에 소금을 쳐서 국처럼 먹었고, 누룽지탕과 쇠고기도 먹었다.

교수님과 나만 쇠고기 정량을 소화하고 두 분은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원장님은 수프만 먹고, 이 대표는 수프와 누룽지만 먹는다. 남은 쇠고기는 모두 나의 몫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이 먹었는데 왜 나는 계속 제대로 못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저녁 식사 후 돗자리를 가지고 해변으로 가서 환담했다. 바로 앞바다에 고기잡이 하는 배들의 불빛이 보인다. 전등을 켜놓은 채 밤새도록 낚시질하는 모양이다. 그물은 보이지를 않았다. 모두 낚시로 생선을 잡는 모양이다. ‘노인과 바다’의 그 광경을 눈앞에서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바다에서 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생선을 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5꾹(한화 6,250원)을 달라고 했으나 저녁이 이미 예약돼 있어서 오늘은 안 된다고 했더니 4꾹(5,000원)을 불렀다. 내일 오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 그 정도면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한 가격, 아마 최소한 10배 이상은 주어야 될 듯한 큰 다랑어 종류였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는 저 사람들이 낚시질해 온 생선을 사서 튀겨먹자고 했다.

하늘을 보니 북두칠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런데 북극성이 아주 밝게 빛나고 있다. 마치 한국에서 새벽녘에 보는 금성처럼, 아니 그 보다 더 밝았다. 그래서 나는 저 자리가 북극성이 맞나 하고 한참동안 고민을 했다. 바닷가 모기가 극성이었다. 바람도 안 불어서 후텁지근하다. 더 이상 있다가는 모기 때문에 살점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간단히 씻고 이야기 좀 하다가 하루일과를 메모하는데 벌써 12시 30분이다. 이제 나도 자야지. 아 졸린다.

▲ 라보카 해수욕장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해수욕장 모습. 한적하다.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해수욕장 모습. 비치파라솔.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해수욕장 모습. 그늘막. [사진제공-임영태]

 

▲ 라보카 해변에서 맛본 피자. [사진제공-임영태]

 

▲ 밤바다 낚시 풍경. [사진제공-임영태]

 

▲ 게가 구멍을 파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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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노란리본은 일반적으로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전쟁터에 나간 병사나 인질,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조속한 무사귀환을 바라며 노란리본을 나무에 매달았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편, 가수 토니 올랜도가 부른 히트곡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늙은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 주세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또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가게 된 한 남자가 출소하기 전 자신의 부인에게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참나무에 노란리본을 달아달라는 편지를 썼는데, 과연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수백 그루의 참나무에 노란리본(노란손수건)이 달려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실화라는 이야기도 있음)도 있다. 이라크 전쟁 때 무사 귀환하는 병사들의 집 앞 나무에 노란리본을 달아놓았다는 뉴스도 보도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란리본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무사귀환’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지니는 노란리본이 한국의 세월호 사건 외에도 다른 곳에서 최근 상징표식으로 등장했는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쿠바의 그 리본의 정체가 너무 궁금하다.

2)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그때 들은 내용을 적은 메모장에는 1975년으로 돼 있지만, 기사의 나이를 고려할 때 맞지 않는다. 대충 1995년 정도면 어느 정도 나이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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