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약없는 이별에 남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나 남아있는 북의 아들 모두 억장이 무너진다. 저 유리창이 분계선이로구나. [사진-사진공동취재단]

26일 오전 9시(현지시간, 서울시간 9시30분)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된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 마지막 날 작별상봉 행사가 오전 11시 끝났다.

금강산호텔 상봉장은 이날 찰나와도 같은 짧은 만남 뒤에 찾아온 기약없는 이별에, 참을 수 없는 가족들의 울음으로 거대한 통곡의 바다였다.

이날 날씨는 아주 맑아서 멀리 금강산이 또렷하게 보였으며, 새 소리, 개 짖는 소리 등이 호텔까지 들렸다.

아침 6시 30분이 넘어 남측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외금강호텔 1층 식당에는 약 100 여명의 가족들이 자리를 채웠으나 작별상봉을 앞두고 입맛을 잃은 듯 가족들이 떠난 자리엔 많은 음식들이 남겨졌다.

호텔 안에서 일하던 한 북측 접대원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여러 번 치렀는데 점점 연세가 많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서 이런 행사가 많이 열려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작별상봉 중 리충복 북측 상봉단장이 김선향 남측 방문단장과 함께 테이블을 돌면서 가족들의 사연을 듣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리 단장은 북측 여동생 한영원(여, 66)씨를 만나러 온 한영진(남, 70)씨에게 “마음에 맺힌 한이 한결 풀렸죠”라며 묻고는 “사실 다니면서 형제들이 식사도 같이 하고 대사 있을 때 모여야 하는데, 그런 날 오겠죠”라고 말했다.

영진씨가 “아쉽습니다. 무슨 말 했는지 모르겠고...”라고 하자 리 단장은 “마음 후련하게 해서 돌아가십시오. 또 만난다는 희망갖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라고 덕담을 했다.

작별상봉을 마친 남측 이산가족 90명과 동반가족 164명 등 254명의 2차 방문단은 곧바로 여장을 꾸려 오후 1시에 금강산을 출발, 고성 CIQ을 거쳐 오후 5시 20분(서울시간)께 속초 한화리조트에 도착한 뒤 해산할 예정이다.

2차 방문단은 지난 24일부터 26일까지 2박3일동안 단체상봉 2차례, 공동중식과 환영만찬 각 1차례, 개별상봉과 작별상봉을 포함 총 6차례에 걸쳐 각 2시간씩 12시간의 상봉행사를 가졌다.

이로써 제20차 이산가족상봉행사는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2박3일 동안 북측 방문단 141명을 남측 상봉단 389명이 만나고 23일 하루 쉰뒤 24일부터 26일까지 남측 방문단 254명이 북측 상봉단 188명을 만나고 최종 마무리됐다.

입고 왔던 코트 건네주며 “부자지간의 정이다”

▲ 이석주 할아버지 가족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작별상봉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공동 중식과 단체상봉에 나오지 않고 쉬었던 최고령 이석주(98) 할아버지는 북의 아들 동욱(70)씨에게 “코트 주고 싶어”라며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힘겹게 벗어서 아들에게 입혔다.

아버지는 코트 안쪽에 두르고 있던 체크무늬 목도리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 경숙(57)씨가 “아버지 옷 주니까 좋아?”라고 묻자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자지간의 정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걸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알아서 일까? 상봉 전 아들과 큰손자 몫으로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 일습을 자신의 체형에 맞추어 준비 해온 아버지가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벗어준 코트도 아들에게 딱 맞았다.

아들이 “아버지 130세까지 살아야지, 나는 100살까지 살게”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말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될지 모르겠다. 하하하”라며 웃음을 짓는다.

“자식들이 봉양 잘하면 130세까지 충분히 살아”라며 재차 말하고 곁에 있던 딸이 “아버지가 자꾸 죽는다고 소리하면 오빠가 속상해 해”라고 하자 아버지는 “으응(끄덕) 오래오래 살아야지”라고 대답했다.

딸 경숙씨는 전날 하루 종일 의사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야 할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던 아버지가 “아들을 만났는데 세월이 흘러서 많이 다르다고 느끼신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서 그런 거라고 제가 이해를 시켰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네 말이 맞다”며 금방 이해하셨다고...

헤어지는 순간 북의 형 동욱씨는 남의 동생 동진씨에게 큰 소리로 "동생아 아버지 잘 모시고, 어버지! 부디 부디 건강하세요. 130살까지 사세요"라고 말하며 끝내 동생을 껴안고 계속 울었다. 손자 용진씨도 "통일되면 다시 만납시다"라며 고모와 얼싸안고 울기 시작했다.

치매 노모 작별상봉에서 북측 아들 알아봐

치매를 앓고 있는 김월순(93) 할머니는 함경남도 갑산에서 피난 내려오면서 손을 놓친 큰 아들 주재은(72)씨를 65년만에 만났지만 온전히 알아보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전날 아들 재은씨가 선물로 드린 갈색 꽃무늬 스카프를 목에 걸고 상봉장에 나온 김 할머니는 재은씨가 자신의 부부증명사진을 꺼내 보여주자 “(아버지랑) 똑 닮았구나. 마누라는 어디 있니”라고 대답하며, 중간 중간 정신이 돌아온 모습을 보였다.

이때부터 아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머니, 헤어진지 70년 만이에요. 벌써 강산이 바뀌었어요”라고 말했다.

동행한 남측 딸 혜경(62)씨가 사진을 보며 “(72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말 똑같지 엄마?”라고 묻자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바꿔나도 모르겠네”라고 똑바로 말했다.

북측 손녀 영란(46)씨가 “통일되면 우리 집에 와서 살아요.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 고향에서 살아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손녀를 바라보면서 ‘고향에서 왔냐’고 묻고는 “기가 막히는 구나...”라고 대꾸했다.

어머니는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의 왼쪽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2개 중 붉은색 알이 박힌 금반지 하나를 꺼내 며느리에게 주려고 끼고 있던 것이라며 아들에게 주었으나 아들이 극구 안 받으려고 하자 “안 필요해도 내가 주고 싶어. 갖다 버리더라도 갖고 가라”고 기어코 아들 손에 반지를 쥐어주었다.

아들에게 계속 “이이는 누구야”라고 묻던 전날과 달리 김 할머니는 작별상봉장에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볼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또 “내가 죽어도 소원이 없어”라며, “고마운 세상이야, 우리 재은이를 만나고...”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팔로 껴안아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아들 재은씨는 이 소리를 듣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들은 자기 이름을 말해 준 어머니가 고다웠는지 “우리 어머니 이제 정상이시네”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가 다시 남측에서부터 동행해 온 재은씨의 동생 재희(71)씨에게 “얘가 아들이야?”라고 묻자 재희씨가 “어머니가 놓고 온 아들이야. 상병이 이모가 키워서 대학도 보내고 장가도 보냈다잖아요”라고 알려주었다. 여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김 할머니는 “상병이는 살았어”라고 물었고 재은씨가 “죽었어요”라고 대답하자 “상병이는 죽었어...”라고 눈물을 흘렸다.

헤어지야 하는 순간 형 재은씨는 동생을 껴안으며 "건강하게 살아라"는 한마디를 하고 동생을 부둥켜 안았다. 동생 재희씨는 한참을 껴앉고 있다가 "형, 마지막이 아니야. 이제부터 시작이야, 형이 어머니 모셔야 해"라고 울면서 말했다.

동생이 울면서 "형, 왜 내가 어머니를 모셔. 장남이 형이 모셔야지. 나 이제 안모실거야"라면서 투정부리듯 작별의 아쉬움을 표시하자 형은 계속 "알았다"며 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달랬다.

재희씨는 휠체어로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는 작별의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머니가 "같이 안가?라고 묻자 "통일되면 만납시다. 어머니"라고 눈물을 뚝 떨구었다.

동생은 작별의 순간을 멈추기라고 하겠다는 듯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핏덩이 버리고 왔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잖아...엄마"라며 오열했고 치매 걸린 할머니는 멍한 표정으로 "나 데리고 집에 갈거지"라고 말했다.

‘납북 아니야’ 부인..‘이렇게 아들 하고 만나려고 오래 살았구나’

▲ 이복순 할머니는 43년만에 만난 아들 정건목씨와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오대양호 선원으로 조업하다 북으로 간 정건목(64)씨는 작별상봉장에서 어머니 이복순(88) 할머니와 정매(66), 정향(54) 두 누이를 만나서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울기 시작하는 정매 누이의 안경을 살짝 들고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어머니가 조금 늦게 도착하자 며느리 박미옥(58)씨가 옆으로 다가가 끌어안고 볼에 볼을 대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건목씨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하더니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자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큰 목소리로 “아들이 이렇게 건강해요”라고 외쳤다.

정매, 정향씨는 기자들과 만나 오빠가 ‘납북’이라는 표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거 아니야”라고 부인하고 있고 올케도 자신들을 찍는 카메라을 싫어한다고 전하면서 “잠깐 왔다 가는데 괜히 싫어하는 일 하기도 싫고 해서...”라고 말을 흐렸다.

건목씨는 부모형제의 정확한 생일과 주소를 다 적어갔으며, 예전에 살던 그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데 주소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동생 정향씨는 상봉장에 들어서면서 “(전날) 서로 어릴 때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어머니께서 어제 ‘이렇게 아들 만나려고 오래 살았구나’하셨다. 이제 곧 작별 상봉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많이 아쉬워하신다”고 말했다.

이복순 할머니는 이날 너무 울어서 의료진이 건강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엄마에게 전하라. 내가 미안하다고..꼭”

아버지를 기다리는 북측 딸도 작별이 믿어지지 않아 상봉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북측 양강도 북측 혜산 출신으로 1.4후퇴 때 피난 내려오면서 데리고 나오지 못한 두 살배기 작은 딸 동선(66)씨를 만나러 온 최형진(95) 할아버지. 늙은 아버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딸이 평안북도 선천에 살고 있는 듯 부녀는 한반도 지도를 그려놓고 평양, 서울,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부산의 위치를 표시하고는 기후며, 사는 형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의 외손자 전봉준(43)씨는 옆에서 말없이 외할아버지에게 물도 따르고 사과도 깎아 냈다.

최형진 할아버지는 갑자기 메모지를 꺼내더니 “어머니한테 내가 왔다 가고 또 미안하다고...꼬”하고 쓰더니 멈추었다. 그리고는 소리도 없이 흐느끼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꼭’이라고 쓰려다 못 쓴 것 같다.

할아버지는 딸에게 메모지를 잘 챙기라고 당부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다가도 다시 눈물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딸이 사과를 깍아 아버지에게 드렸으나 아버지는 먹을 수가 없었다.

“굳세어라 딸아”

북의 딸을 만나 꿈같은 2박3일을 보낸 아버지는 딸을 염려해 기운을 내기도 했다.

석병준(94) 할아버지는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며 계속 울고 있는 북의 딸 보나(75)씨에게 “하여간 건강하거라”며 기운을 북돋웠다.

딸이 울면서 “아버지 사과드세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울지 말라. 절대 울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온 남쪽 이복동생 순용(여, 49)씨가 “아버지, 백수하시면 또 언니 만날 수 있어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가능해!, 난 가능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보나씨가 웃으면서 “하룻밤 자고 내일 고모한테 가서 (우리 만난 거)전달할게요”라고 말하고 순용씨는 “저희도 부산 가서 작은 아버지한테 소식 전할게요. 작은 아버지가 여기 오고 싶어 하셨는데 오시기 전에 몸이 편찮으셨어요”라고 말했다.

꽃신 신은 두 딸이 아버지께 바친 '고향의 봄'

▲ 구상연 할아버지가 65년 동안 잊지 않고 꽃신을 사다 준 북의 두 딸. 두살, 여섯살 어린 자식들이 벌써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되어버리다니 세월이 야속하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전날 개별상봉때 딸들에게 꽃신을 전한 최고령 구상연(98) 할아버지 가족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온 남쪽 어린 동생 형서(남, 42), 강서(남, 40)씨가 북의 나이 많은 누이 송옥(71), 선옥(68)씨와 이야기 꽃을 피웠다.

형서: (큰 누이에게) “누나 혈압 조심해야 해”

송옥: 우리는 무상으로 치료받아. 돈 안내도 돼. 근심 걱정없다.

형서: 제가 아버지 혈압도 관리해 드리고 건강 챙겨드리는데, 누님도 남쪽에 계셨으면 제가 다 해드렸을 텐데.

송옥: 우리는 무상치료야. 돈 없어도 치료도 받고 약도 받아.

송옥: (본인 귀를 만지며) 나 아버지 닮았어. 귀 넓은 거 보라. 아버지 귀랑 비슷하지 않나.

형서: 큰 누나가 아버지 귀를 닮아서 오래 사실 거 같아.

형서: (두 누님의 생일을 적어가면서) 오늘이 동생(강서) 생일이야.

북의 두 자매는 아버지 앞에서 똑 같은 모양의 율동에 맞춰 ‘고향의 봄’을 불러드렸다.

그리고 두 딸은 아버지에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건강하게 사세요”라는 축원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 남에서 온 형서·강서 형제도 말로만 듣다 이번에 처음 본 북의 누이들에게 큰절을 하고 포옹을 했다.

아버지는 65년 전에 딸들에게 신발을 못 사주었던게 한이 되어서 전날 개별상봉 때 전한 꽃신외에 검은색 신발을 쇼핑백에 하나씩 담아 딸들에게 쥐어 보냈다.

큰딸 송옥씨는 선물을 받은 뒤에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 첫째도 조국통일, 둘째도 조국통일, 셋째도 조국통일이다. 반드시 통일되니까 건강하시라요”라고 말했다.

송옥씨는 남의 동생들에게 “늙으신 부모 잘 모셔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고향의 봄’ 노래를 불러 드렸다.

“차라리 안 만나는게 더 좋았을 걸”

작별상봉을 10분 남기고 남편 전규명(86)할아버지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부인 한음전(87)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 걱정하지 마. 이젠 다신 못 봐”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살아있는 거 알았으니 원 없어. 생일날 미역국 계속 떠놓을게. 걱정말고 잘 가슈”라고 말하면서도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닦았다.

휠체어가 떨어질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있던 할머니는 헤어지는 순간 동행한 아들 완석(65)씨에게 “복도까지 아버지 모셔다 드리라”고 했다.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은 채 몸을 돌려 남편의 뒷 모습을 보려다 바닥으로 넘어졌고 주변에서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영감 갔어?”라고 물었다.

남편이 버스가 아닌 구급차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할머니는 휠체어에서 “일으켜 달라”고 한 뒤 누워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울었고 할아버지는 한손으로 다시 못볼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고 한손으로는 완석씨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울지마”라며,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더 좋았던 게 아닌가 싶어. 만나질 않았으면 이렇게 금방 헤어지지 않는 건데”라고 말했다.

▲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더 좋았던 게 아닌가 싶어. 만나질 않았으면 이렇게 금방 헤어지지 않는 건데” 상봉후 생기는 이 깊은 회환은 어찌 하나.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김진향 남측 방문단장과 리충복 북측 상봉단장이 북의 아들 한송일씨를 만나러 온 이금석 할머니와 자식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축원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냐. [사진-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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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추가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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