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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인의 민낯을 보다임영태의 멕시코-쿠바 여행기 (28)
임영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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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23  17: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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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트리니다드 거리. 오래된 도시로서의 멋과 운치가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트리니다드에 도착한 뒤 우리는 마이클이 적어준 까사(집) 주소를 운전기사에게 보여주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그 주소를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우리들을 도시의 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는 주인이 지금은 방이 없고 내일이면 방이 날 것이라고 한다. 시설이 괜찮아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집주인이 주변의 다른 집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그 집의 경우, 방 하나는 트윈베드가 하나 있고, 다른 방은 투 베드였다. 아무래도 불편해 보였다. 그 집을 나와 또 다른 집으로 갔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집이 상당히 깊숙하고 넓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아랍 궁전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시설이 깨끗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맞는 숙소가 없었다. 방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

다시 기사에게 처음 마이클이 소개한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지만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끝에 택시가 움직였다. 소개한 장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주소에 적어준 곳은 바로 비아술 터미널 근처였다. 택시가 터미널 앞에 도착해서 멈추자 나와 이 대표는 산티아고 데 쿠바 행 바이술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기 위해 터미널로 들어갔다.

산티아고 데 쿠바 행 버스는 아침 8시에 있었다. 1일 1회 운행하는데 1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아침 8시에 출발해도 저녁 8시가 되어야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가자마자 숙박하고 다음날 관광을 하고 바로 돌아온다고 해도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산티아고 데 쿠바(산티아고)에 가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시작하면서 습격한 몬타나 병영이 있는 곳으로 쿠바 혁명의 첫 자욱이 찍혀 있는 곳이다. 그곳에 간다고 피델의 옛날 흔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쿠바에 와서 피델이 혁명의 첫 발걸음을 시작한 산티아고를 가보지 못한다면 쿠바에 온 의미가 반감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1952년 피델 카스트로 변호사는 쿠바정통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해 3월 10일 바티스타가 재차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국회의원 선거가 취소되고 말았다. 김대중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 세 번 만에, 그것도 인제에서 보궐로 당선됐다가 5.16쿠데타가 발발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바티스타는 1933년 쿠데타를 일으켜 1944년까지 권력을 장악했으나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1952년 바티스타는 미국의 지원 아래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카스트로는 바티스타가 존재하는 한 쿠바의 민주주의와 번영,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아예 정권을 무력으로 뒤집어엎을 방법을 구상하게 됐다. 1953년 그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할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는 그 일이 ‘바티스타에 의해 빼앗긴 1952년 헌법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스트로와 동지들의 열정은 뛰어났으나 준비는 치밀하지 못했다. 사고는 급진적이었으나 이념은 불분명했다.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 160여명은 1년간의 준비 끝에 몬카다 병영 습격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처럼 무모했다. 습격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대부분의 가담자들이 학살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도 체포돼 재판정에 서게 됐다.

피델은 재판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는 “역사가 나의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라는 변론을 통해 바티스타 정권과 미국의 죄상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변론에서 미국독립선언서를 인용하고, 루소와 단테, 밀턴 그리고 로마의 브루투스, 나아가 고대 인도의 사상가까지 거론하며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나는 나 자신의 석방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범죄자이고 도둑인 나라에서 정직한 사람은 죽거나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시오.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로 카스트로의 명성은 높아졌다. 바티스타는 그를 감옥에 계속 가두어 둘 수 없었다. 피델은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5월 15일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 뒤 피델은 더 이상 쿠바에서 운동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동생 라울도 같이 석방되어 동행했다. 카스트로 형제는 멕시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고, 쿠바혁명을 위해 1956년 11월 25일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돌아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산티아고에는 ‘콘트라 마에스트레’와 바코나오 강이 흐르고 있고, 저 유명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이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다. 산맥의 최고봉은 1,974m의 ‘피코레알데투르퀴노’로 쿠바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산이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가 게릴라전을 시작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 트리니다드 시외버스 터미널.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시내 버스. [사진제공-임영태]

 

   
▲ 터미널 주변 거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마요르 광장 주변의 한 술집. 'Yesterday'란 이름이 정겹게 다가온다. [사진제공-임영태]


산티아고 데 쿠바 행을 포기하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혁명의 도시일 뿐 아니라 철광석과 니켈의 최고 산지로도 유명하다. 쿠바의 가장 중요한 자연자원의 하나는 니켈인데,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매장량이 많다. 니켈의 채굴로 나오는 부산물이 코발트 생산량도 세계 5위를 자랑한다. 하지만 쿠바 광물의 보고인 이 지역의 경제기반은 오히려 바나나, 코코넛, 커피 등 농업이라고 한다.(주1)

산티아고는 수도인 아바나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경제적으로 아바나에 견줄 만큼 발달했다.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국이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는 관타나모 기지가 자리 잡고 있다. 쿠바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필수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짧은 일정으로는 여기를 간다는 것이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 두 사람만 밤에 버스를 타고 가서 낮에 돌아보고 오는 일정으로 갔다 올 계획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 1회, 아침 8시 출발, 편도 12시간(왕복 24시간), 최소 3일 소요 등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우리가 숙박한 집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산티아고에서 트리니다드로 돌아오는 비아술은 오후 4시 30분에 그곳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면 바쁘게 움직이면 이틀의 여정이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려면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체력소모도 심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여러 사정을 감안해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체력상태, 남은 사람들, 산티아고에서의 숙박과 관광 일정 문제 등 복잡한 사정을 생각할 때 산티아고 데 쿠바 행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쿠바 섬의 면적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어서 동남부 끝에 위치한 산티아고는 수도 아바나에서도 870km나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의 직선거리가 470km밖에 안 된다는 걸 감안하면 교통이 잘 정비되지 못한 쿠바에서 이건 여간 먼 거리가 아니다. 아바나에서 관광을 시작하는 경우, 산티아고까지 갖다오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 때문에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서 비아술이나 택시보다는 비행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산티아고 데 쿠바’의 위치. 쿠바는 옆으로 길게 늘어선 모양새로 그 길이가 1233km나 된다. [사진제공-임영태]

 

   
▲ 산티아고 데 쿠바의 야경(사진_위키백과). 쿠바 제2의 도시답게 야경이 아름답다. [사진제공-임영태]

 

   
▲ 산티아고 데 쿠바의 유명한 관광지 ‘모로 성’ [사진제공-임영태]

 

   
▲ 몬카다 병영(Moncada_Barracks)에는 사건 당시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로 바뀌었다.(사진_위키백과 영어판) [사진제공-임영태]

 

   
▲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후 체포된 피델과 그의 동료들. [사진제공-임영태]

 

   
▲ 1974미터로 쿠바에서 가장 높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피코 토르퀴노 산(Pico Torquino, the Sierra Maestra). [사진제공-임영태]


여행 중 만난 최악의 숙소

우리가 비아술 시간표를 알아보는 동안 원장님과 교수님은 터미널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호객행위를 하던 한 여인을 만난다. 트리니다드의 운명의 여인 릴리를 만난 것이다. 흑인(혼혈)인데 영어를 상당히 잘 구사했다. 기독교와 아프리카 전통종교의 혼합으로 생겨난 산테리아(Santería)(주2) 신도들이 입는 흰옷을 입었는데 깔끔하고 상당히 세련돼 보였다. 이 아줌마에게 마이클이 소개해준 주소를 건네며 위치를 물었더니, 그 집은 수리중이어서 지금 문을 닫은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다. 원장님이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후 그녀의 행적을 보아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온 뒤 여행 뒤풀이를 한 번 했는데 그때도 다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이클이 소개해준 그 집이 문을 닫은 상태라는 이야기를 듣고 두 분이 어쩔 줄 모르고 난감해 하자, 릴리가 자기도 까사를 하는데 거기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나와 이 대표가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나온 것은 이때쯤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그동안의 사정을 들었다. 잠시 다른 방안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우리는 한번 그녀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무거운 짐을 끌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이집 저집 일일이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릴리 여사의 뒤를 따라가게 됐다. 그런데 이 릴리 아줌마, 까사가 바로 저기라고 말해놓고는 우리를 20분 이상 뒷골목 변두리로 끌고 갔다. 그것도 중심가와는 거리가 먼 변두리로만 계속 갔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데, 뭐 잘못된 거 아니야?’ 살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안 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조금만 가면 금방”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릴리는 그러고도 한참을 변두리로 향한 골목길을 지나갔다.

처음 우리가 있던 곳에 비해 갈수록 집들이 허술했다. 처음 있던 곳은 돌로 바닥을 포장해 놓았는데, 조금 더 가니까 길이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길 곳곳에 말똥도 보이고 집들도 허름한 게 빈민가 같은 느낌이 팍팍 드는 골목길로 자꾸만 갔다. 한참을 외곽으로 나가더니 마침내 어느 허름한 시골집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집으로 들어가니 2층에 투 베드짜리 방 두 개가 있다. 거실도 쓸 수 있고 베란다도 있었다.

그런데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기구는 전혀 없다. 그리고 방을 들여다보았더니 약간 냄새도 나고 시설도 별로다. 우리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냥 지내기로 결정했다. 하루 저녁 지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다음날 옮기자고 결정했다. 장시간 차를 타고 온데다가 트리니다드에 와서 숙소 찾느라고 헤매다 보니 피곤하기도 해서 더 이상 찾아다닐 힘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정하고 보니까 정말 방이 엉망이었다. 화장실에 휴지도 없고, 한쪽 방은 화장실에 불도 안 들어왔다. 물도 쫄쫄쫄, 너무 약해 샤워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방에서 냄새도 퀴퀴하게 나고 벽과 천장은 시멘트가 거칠게 드러나 있었다. 우리가 쿠바에서 묵은 숙소 가운데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은 방값이 30꾹인데 이곳은 20꾹에 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꼭 이런 경우에 맞았다.

우리는 일단 오늘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고 다음날 앙꼰으로 가자고 합의를 보았다. 앙꼰 해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릴리 여사가 이렇게 말했다.

“거기는 휴양지가 되어서 호텔밖에 없고 너무 비싸다. 그러니 가까운 곳 해변(우리는 이 말을 앙꼰 주변이라고 이해했다)에 자기 친구가 사는데 까사를 한다. 거기 소개해줄 테니 그곳으로 가라.”

우리는 사정도 모르고 ‘좋다, 오케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잘못 이해해서 앙꼰 해변에 그녀의 친구 까사가 있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 릴리가 입었던 복장과 비슷한 흰옷을 입은 두 여성이 대성당 광장 앞에서 물건을 팔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숙소 옥상에 올라가 살펴본 주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숙소 옥상에 올라가 살펴본 주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숙소 옥상에 올라가 살펴본 주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숙소 옥상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산 위에 철탑이 보인다. [사진제공-임영태]

 

   
▲ 숙소 내부 모습. 사진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시설이 열악한 최악의 숙소였다. [사진제공-임영태]


쿠바 사람들의 민낯을 보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다음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베란다로 나가 밖을 쳐다보았다. 골목길이 순식간에 물바다가 변해 버린다. 모두들 그걸 바라보며 감탄한다. 내가 다시 거실로 들어온 순간, 밖을 내다보던 우리 일행으로부터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나와서 물바다가 된 골목길에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흘러가는 골목길 물길에 쓰레기들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 모습을 보고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해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못보고 이야기만 들었지만 옛날 시골 생각이 나서 어느 정도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됐다. 내가, 옛날 우리도 이랬었다고 말한다. 시골이나 소도시의 경우, 포장도 안 된 골목길에 오물 다 버리고, 개똥 소똥 사람 똥까지 곳곳에 있었다고. 여름 폭우가 오면 골목길이 강물처럼 넘쳐흘렀는데, 쓰레기를 저 사람들처럼 그냥 버리기도 했다고.

   
▲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자 우리가 묵고 있던 까사의 앞 골목이 순식간에 한강으로 변했다. [사진제공-임영태]

 

   

▲ 물바다가 된 골목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쿠바인. [사진제공-임영태]

 

지금 한국도 시골에 가면, 노인들은 쓰레기를 제대로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지 않는다. 어지간한 물건들은 다 태워버린다. 절대 태워서는 안 되는 비닐이나 공기를 오염시키는 물건들까지도 그렇게 한다. 썩는 것은 모두 거름으로 만들어서 재활용하고. 약간 행태는 다르지만 그 비슷한 일은 도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선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쿠바인들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녹색당원이기도 한 원장님, 그 광경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다. 하필 우리가 묵은 건너편 집 2층 아저씨가 그 주범 중 한 명이었다. 원장님, 우리 숙소 베란다에서 건너편 집 아저씨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뭐라고 제스처를 취한다. 나는 원장님의 행동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모두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문화(물론 그 행위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일종의 관행일 수도 있다)에 대해서는 때로는 침묵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가 일반적인 규범에 비춰보더라도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이 대표도 흥분했다. 그는 “쿠바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이건 아니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라며 언짢아한다. 쿠바인의 인정과 친절, 순박함에 반한 그로서는 상당한 실망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여러 생각이 겹쳐진다. 관광, 생태 농업 등에서 쿠바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에 있다. 하지만 기반시설과 기술, 자본, 운영 기법, 경영 노하우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고, 외부로부터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쿠바는 이제 세계를 향해 겨우 첫발을 내디딘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는 농업기술이나 시장경제의 경영 노하우뿐만 아니라 삶의 규범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외부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이 있다. 시골 소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친화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반드시 친환경적이지는 않다. 농업은 자연친화적인 산업이지만 환경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은 것처럼. 쿠바인의 문화수준이나 환경의식이 낮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부족한 부분, 제고되어야 할 부분이 존재하며, 사회의 변화에 발전에 맞게 공동체 규범 또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 다음 날씨는 금방 다시 개었다. 그러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은 채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활보한다. 나는 까사 옥상에 올라가서 동네를 사진에 담는다. 우리의 시골동네에 가면 어지간한 집에 감나무가 한그루씩 있는 것처럼 이곳 마을에는 집집마다 망고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저게 돈이 될까? 아니면 그냥 먹거리나 간식거리로 이용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본 과일나무는 망고나무였다. 망고나무는 과수원뿐만 아니라 시골에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쿠바의 소도시, 시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풍경 가운데 하나다.

   
▲ 소나기가 그치자 웃통을 벗은 채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사진제공-임영태]

 

   
▲ 우리 시골의 감나무처럼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망고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 [사진제공-임영태]

 

   

▲ 지방의 작은 도시 트리니다드는 오래된 도시로 운치가 있지만 도시환경이 깨끗하거나 정비가 잘 돼 있지는 않다.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어둠이 내리는 트리니다드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어둠이 내리는 트리니다드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어둠이 내리는 트리니다드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비온 뒤 저녁 으스름 무렵의 트리니다드 풍광이 환상적이다. [사진제공-임영태]


트리니다드에서 미로를 헤매다

저녁은 해먹기로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우리가 묵고 있는 까사 주방 싱크대 아래서 버려져 있던 전기밥솥을 찾아내서는 그걸로 밥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멕시코에서 사온 쌀이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밥을 하기 전 먼저 양배추를 삶기로 했다.

하지만 양배추를 삶기는커녕 물도 안 끓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물이 끓을 기미가 안 보였다. 결국 양배추 삶는 걸 포기하고 멕시코에서 사온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그러나 그 역시 밥이 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우리는 일단 전기코드에 꽂아 놓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밥이 되는 동안 침대에 잠간 누웠다. 갑자기 이 집에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쫄쫄거리며 나오는 샤워기 물도 뜨거운 물이다. 조절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옥상에 있는 물탱크 물이 낮 동안 덥혀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화장실에 휴지도 없다. 에어컨은 잘 돌아가지만 방에서는 시멘트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서 퀴퀴하다. 열대 과일 썩은 냄새 같은 것까지 뒤섞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관광도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자본과 기술, 관광객을 유치하고 관리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릴리는 사람을 끌어들일 줄만 알았지 관광의 기본이 부족하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니 거친 시멘트 마무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한 덩어리 뚝 떨어질 것만 같다. ‘천장과 벽이라도 매끄럽게 다듬고 페인트라도 좀 칠해 놓을 것이지. 창문이라도 뚫어서 공기유통도 시키고, 화장실도 좀 깨끗하게 만들어 놓아야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중고로 보이는 에어컨은 LG 제품이다. 제작년도는 모르겠지만 성능은 좋다. 쿠바에는 버리는 물건이 없다. 에어컨, 선풍기, 자동차, 자전거, 버스 등등 아무리 오래됐어도 고쳐 쓰고 또 고쳐서 사용한다. 완전히 망가져 도저히 못 쓸 때까지 쓰고도 부품을 또다시 뜯어서 다른 곳에서 사용한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버린다. 너무 자주 바꾼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내 승용차는 1995년 식으로 20년이 됐는데, 나는 그렇게 오래된 차를 주변에서 보지 못했다. 쿠바에 오면 그건 정말 신형 차다.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능하면 차를 안타면 더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더라도 오래 쓰도록 해야 하겠다.

   
▲ 트리니다드는 고도의 운치가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트리니다드는 고도의 운치가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밤 거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밤 거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마침내 우리는 알아챘다. 우리가 낚였다는 것을. 릴리의 그 하얀 옷과 유창한 영어 실력에 깜박한 것이다. 숙소 때문에 고심하면서 헤매던 우리들은 터미널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뮬라토 아줌마의 유창한 영어에 속아 변두리 허름한 집에 방을 구하고 말았다. 시멘트 냄새가 빠지지 않는 방, 불도 안 들어오는 화장실, 빗물이 떨어지는 거실.

어쩌면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한번 길을 잘못 접어들면 그 다음 정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오늘 꼼짝없이 냄새나는 이 집에서 지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불평했지만 웬만하면 잘 견디는 나도 이 집은 좀 싫다. 이 대표가 계속 투덜거린다.

“릴리는 말이야, 자기 옷만 깨끗이 잘 입을 게 아니라, 집을 제대로 만들어 놓고 사람을 데려와야지. 이게 뭐야.”

결국 밥은 안됐다. 아무리해도 물조차 안 끓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녁은 바나나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하고 바깥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밤에 이 대표와 쁠라야 아르요(아르요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광장 옆 계단식 노천 바가 인상적이다. 계단식 노천 바에서는 음악공연이 신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는다. 그림이 멋지다. 그러나 거리는 생각만큼 그렇게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약간은 편견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은 계단식 바에 앉아서 시원한 공기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대표는 맥주를 한잔 마시고, 나는 콜라를 마셨다. 그러나 컨디션 때문인지 콜라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숙소로 돌아오니 원장님이 깨어 있다. 거리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르요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빛이 빛난다. 여행 후 처음으로 달을 보았다. 초승달이다. 반갑다. 비로소 집에 가서 맛있는 김치와 함께 ‘집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계속 콜라만 마셨다. 점심은 모두들 걸렀다. 저녁도 과일로 대충 때웠다. 이렇게 해서 될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푹 자야 할 텐데 그건 가능할까?

잠자기 전 나는 드디어 밥솥의 비밀을 알아냈다. 멕시코에서 산 찐쌀을 넣고 전기코드에 꽂았더니 밥이 잘 되었다. ‘이 전기밥솥은 이곳 사람들이 먹는 날아가는 안남미 밥을 해먹는 것이었군.’ 모두들 잠 든 밤, 나 혼자서 전기밥솥으로 한 그 밥을 몇 숟갈 먹었다. 아마 배가 너무 고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밥은 아무도 안 먹어서 다음날 나 혼자 열심히 먹었다. 그래도 남아서 비닐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나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다. ‘음식을 버리면 벌 받는다’는 어릴 적 경험 때문에 어지간하면 버리지 않고 다 먹어치우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식욕이 왕성했다면 어떻게든 처리를 했겠지만 이때는 내 컨디션이 여전히 난조였기에 포기해야 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가 최악이다. 도무지 방안에서 시멘트 냄새가 가시지를 않는다. 열대 과일 썩는 냄새 비슷한 역겨운 냄새도 섞여 있다. 물도 제대로 안 나오고, 화장실에 휴지도 없고, 타올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대충 씻고 누웠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다가온다. 피곤이 누적되었지만 잠이 올지 의문이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 분위기 있어 보이는 단장을 잘 해놓은 레스토랑. [사진제공-임영태]

 

   
▲ 아르요 광장의 노천카페에 관광객들이 모여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광장에서 사람들이 쉬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사진 추가-25일 오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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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산티아고 데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초기 총독령의 수도였고, 현재 쿠바 제2의 도시다. 이곳은 해가 뜨는 동쪽 지역에 있으며, 중심도시(provincia)와 지역도시(municipio)의 이름이 모두 ‘산티아고 데 쿠바’다. 북쪽으로는 ‘올긴’이라는 지역과 근접해 있으며, 동쪽은 ‘관타나모’, 서쪽은 ‘그란마’, 남쪽은 ‘카리브 해’가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길벗투어, “[쿠바 브리가다 기획③] 쿠바 제대로 알기⑴: 산티아고데쿠바, 시엔푸에고스, 바라코아”, <민중의소리>, 2013.11.13(인터넷검색:2015.8.19) 참고.

2) 산테리아(Santería)는 아프리카 토속 신앙과 기독교가 결합된 쿠바의 종교이다. 주신은 옥살라(Oxalá)이며 흑인과 뮬라토 신자가 많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노예들에게 가톨릭 개종이 강요되자 이들은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의 종교와 생활문화 등을 가톨릭에 혼재시켜 새로운 형태의 종교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산테리아다.
스페인 식민의 영향으로 혁명 이전까지 쿠바에서는 가톨릭이 전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했으나 카스트로 정권 아래서 신자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을 당시 가톨릭 인구는 대략 36%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산테리아 신도로서 실질적인 가톨릭 신자는 그 보다 적다고 한다. 반면 쿠바에서는 장로교 등의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유대교, 그리고 산테리아 등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이티에서 온 이민자의 영향으로 부두교 신자도 있고 일본에서 발상된 창가학회도 존재한다. 이처럼 쿠바는 인종과 문화, 종교에서도 가히 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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