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원리의 핵심은 시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미술작품에 구현되어 있는 시공간은 인간이 세상을 보고 인식하는 전부이다.
서양화법의 핵심인 ‘1인칭 원근투시법’은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신(神)의 눈으로 창조된 세상에서 인간의 눈으로 창조한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다빈치는 여러 사람이 본 세상을 한 사람의 눈높이(시점)으로 통합시켜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다. 이것은 영웅 중심의 인본주의 세계관이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그림의 시점은 복합적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는 우리그림은 아주 복잡하여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측면과 정면에서 본 시점이 공존하고, 위에서 본 풍경과 아래에서 본 풍경이 동시에 나타난다. 사물은 독립적으로 표현되어 체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개인의 시점과 여러 사람의 시점을 결합하여 표현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시점은 서양의 ‘1인칭 원근투시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시점은 한명의 개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공동체의 시점이 된다. 공동체의 시점은 당대의 철학과 미학이 결정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유학문화권에서 신(神)의 관점에서 창조한 세상은 애당초 없었다. 다만 보이는 현실을 표현하는 실경(實景)과 이상적 세계를 표현하는 진경(眞景)의 대립이 있었다. 이것은 실경을 바탕으로 진경을 표현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조선산수화)’로 통합되고 완성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관점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관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 위 그림에서 시점은 좌우로 18개가 표현되어 있다. 감상자의 이동에 따라 시점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런 입체감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시점이 중첩되어 마치 입체영상을 보는 효과를 낸다. 여기에 시간을 넘나드는 각종 사물의 표현으로 감상자가 느끼는 공간의 크기는 극대화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책가도]는 서양화법을 수용한 그림이다.
[책가도]에는 약간의 명암법과 더불어 원근투시법을 적용하여 책장을 표현했다. 이렇게 원근투시법을 적용한 책장은 사물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입체감을 낸다.
하지만 원근투시법을 적용한 [책가도]에는 놀랄만한 비밀이 숨어있다.

[책가도]에는 마치 1인칭원근투시법을 적용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높이에 따른 소실점을 적용시키면 완전히 엉터리가 된다. 원근투시법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화법을 공부한 사람이 본다면 기본적인 원근투시법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그렸다고 할 것이다. 과연 [책가도]를 창안한 김홍도나 [책가도]를 전문으로 그린 이형록같은 화원은 원근투시법을 전혀 공부하지 않고 대충 흉내만 낸 것일까?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북학파들에 의해 서양의 물리학이나 천문학, 역학, 수학 따위가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었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령에 의해 중국에 가서 서양화법을 배워왔는데 원근투시법에 관한 서적을 읽지 않고 눈대중으로 대충 그렸다고 상상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책가도]에 적용된 원근투시법이 제각각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책장이라는 물건의 특성 때문이다.
책과 각종 기물을 넣은 책장의 깊이는 어림잡아 50cm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공간의 깊이가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원근투시법은 앞뒤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는데 제격이다. 하지만 뒤가 막혀있는 책장이라는 물건의 한계 때문에 온전한 원근투시법을 적용해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 반대로 완벽한 원근투시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충분한 입체감을 얻을 수 있다.

▲ 위아래에도 여러 개의 작은 시점들이 만들어져 있다. 시선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각기 다른 시점에 적용되어 입체감을 높인다. 또한 1인칭 원근투시법에 따른 공간의 왜곡을 최소화해서 책과 사물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둘째, 책과 사물의 왜곡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완벽한 원근법이 적용되면 공간은 왜곡된다. 직사각형의 창문을 옆에서 보면 마름모 형태로 왜곡되는 것은 원근투시법 때문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공간이 왜곡될수록 그 안에 들어가는 각종 사물이나 책도 함께 왜곡된다.
책장은 사물을 넣은 공간이지만 주인공이 아니다. 책장의 주인공은 책과 각종 기물이다. 책과 기물을 최대한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근투시법을 변형한 것이다.
 
셋째, [책가도]는 벽면을 채울 만큼 대작이다.
8~10폭 병풍으로 만들어진 [책가도]의 평균 크기는 최소 300cm에서 최대 460cm에 이른다.
이런 크기의 그림의 전모를 보려면 그림에서 대략 3m 이상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그림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 [책가도]의 평균 감상거리는 1~1.5m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감상하려면 이동을 하면서 보아야 한다. 이때 이동하는 사람의 눈을 따라 매번 새로운 원근투시법이 적용되어야 제대로 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좌우뿐만 아니라 위아래도 마찬가지이다.
움직이는 사람의 시점에 따라 원근투시법이 달리 적용되면 마치 입체화면(3D영상)을 보는 것 같은 착시효과가 나타나 입체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유명한 화가 세잔은 의도적으로 원근투시법을 왜곡한 정물화를 창작했다. 그것은 앞과 뒤를 보는 인간의 시각의 한계를 반영하여 사물이 공간속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책가도]는 원근투시법을 적용해 표현했지만 1인칭 원근투시법보다 훨씬 입체적이며 동시에 사물의 왜곡을 최소화시켰다.
이것은 하나의 화면에 얕은 1인칭원근투시법을 적용하고 다시 그 속에 좌우, 위아래에 수십 개의 작은 시점을 넣었기 때문이다.

[책가도]는 인문학으로 구현한 이상세계를 담은 그림이다. 인문학적 내용이나 조형적 형식이 완성되어 있어 [책거리그림]으로 대중화되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탁월한 우리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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