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독립전쟁 영웅 막시모 고메즈 장군 기마상. 쿠바를 지키는 수호신마냥 말레꼰 해변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독립전쟁 영웅 막시모 고메즈 장군상

6월 19일 금요일 아침 6시, 우리는 일어나자 바로 길거리로 나와 말레꼰 해변, 혁명박물관 주변, 오비스뽀 거리를 걸었다. 2시간 이상 아바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건축물과 거리,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전날 둘러보았던 혁명박물관을 중심으로 센트로 아바나 지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혁명박물관 정문에서 서쪽 바다 방향으로 숲이 울창한 쁘라도(Prado) 길이 나온다. 이곳은 1770년대부터 만들어졌는데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나무들이 서 있는 보행자 도로다. 양 옆의 낡은 건물들 사이로 조성된 거리가 중앙공원에서부터 말레꼰 해변까지 뻗어 있다.

쁘라도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어제 혁명박물관 앞에서 보았던 기마상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그 기마상은 아무래도 쿠바를 침략하는 외세를 막아내는 수호신, 군대 지휘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말레꼰 해변에서부터 기마상과 혁명박물관-그란마호 기념관-국립미술관-까삐똘리오-중앙공원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 아바나 숙소 골목길에서 바라본 막시모 고메즈 장군상. [사진제공-임영태]

 

▲ 동상 쪽에서 바라본 혁명박물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인 이 지역의 이러한 건축물 배치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보게 되면 쿠바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유난히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은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쿠바. 그 쿠바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기념관 앞에서부터 쁘라도 거리를 따라 걸었다. 해변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기마상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기마상은 쁘라도 거리가 끝나는 지점과 말레꼰 해변을 따라 조성된 인도의 중간에 위치한 작은 공원에 위치해 있다. 공원은 차도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들은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건너서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체조를 하거나 공원 주위를 뛰고 있었다.

동상은 어제 예상했던 것과 달리 피델 카스트로가 아니었다. 쿠바 독립운동과 관련된 장군으로 생각되었지만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이름이나 표지판은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 동상 중간에 앉아서 쉬고 있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쿠바 독립전쟁을 지휘한 막시모 고메즈(Maximo Gomez) 장군이라고 말해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그의 이름이 동상 아래쪽에 새겨져 있다. 그렇게 해서 말을 타고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됐다.

막시모 고메즈는 1895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이며 20세기 초반 미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쿠바가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였다. 그는 2차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써 스페인군과의 전투를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쿠바를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을 때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현재 그는 쿠바 화폐 10페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독립 전쟁 과정에서 호세 마르티가 쿠바 독립의 사상과 이론을 제시하고 이끌어간 정치지도자라면 고메즈는 독립군을 이끌고 스페인군을 격파한 군사지도자였다. 또한 고메즈는 호세 마르티 사망 이후 쿠바 민중의 열망을 바탕으로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기여한 인물이었다.

 

▲ 고메즈 장군의 기마상 우측에 혁명박물관이 보인다. 기마상-혁명박물관-그란마호 기념관-국립미술관-까삐똘리오-중앙공원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사진제공-임영태]

 

▲ 가까이서 본 동상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가까이서 본 동상의 여러 모습. 동상 지킴이가 앉아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가까이서 본 동상의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가까이서 본 동상의 여러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동상이 있는 공원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아바나 시민들. [사진제공-임영태]

 

▲ 동상에 발을 대고 몸을 풀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수난의 역사를 가진 쿠바

기왕에 고메즈 장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쿠바 현대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혹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쿠바를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필요할 것 같다.

쿠바 섬은 카리브해의 여러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섬이지만 19세기 이전까지는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에서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남미 경영에서 핵심 지역이었던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확보한 은과 금 등을 유럽으로 실어갈 때 쉬어가는 중간 항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쿠바 섬은 해적들의 주요한 공격 목표가 되었고, 창궐하는 해적들을 막기 위한 요새들이 섬 곳곳에 만들어졌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 말레꼰 해변에 있는 요새와 성터. 포가 해변을 향해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말레꼰 해변 요새를 지키는 포. [사진제공-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있는 요새와 성터. [사진제공-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있는 요새와 성터. [사진제공-임영태]

19세기 중남미 지역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을 성취하면서 쿠바는 스페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보물이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쿠바에서 설탕 수출 경제가 시작되었고,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플란테이션을 경영하기 위해 1백만 명의 노예들이 쿠바 섬으로 끌려왔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1866년까지 끝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1886년에야 쿠바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제1차 쿠바 독립 전쟁의 성과였다. 오늘날 쿠바 인구의 상당부분, 그러니까 혼혈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60% 이상이 아프리카의 후손들로 추정되고 있다.

노예무역 중단 압력이 커지자 또 다른 사람들이 쿠바로 들어왔다. 19세기 중반에는 약 10만 명의 중국인들이 유입되었는데, 이들도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는 조건에서 일했다. 1898년 독립을 전후한 시기에 상당수의 스페인 사람들이 쿠바로 들어왔다. 미국 자본이 진출하면서 20세기 초반에는 플란테이션 노동을 충당하기 위해 미국이 점령한 아이티에서 대규모 노동자들이 들어왔다. 자메이카에서도 많은 설탕 노동자들이 이주했다.

1921년에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노동이민을 왔던 조선인 가운데 288명이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면서 쿠바로 건너왔다. 유럽에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건너온 유대인과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를 피해 온 공화주의자들도 있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다양한 인종이 혼합된 국가가 되었다.

쿠바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마련되는 것은 제2차 독립전쟁을 통해서이다.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시작되어 1898년에 끝났다. 그런데 독립전쟁 막바지 단계에서 스페인과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쿠바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쿠바의 운명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뛰어들기 전 쿠바 독립군은 이미 쿠바 섬 전체의 절반 이상을 해방한 상태였고, 1898년 2월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정부 수립에 동의했다. 그런데 이때 아바나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순양함 메인호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고,(주1) 미국은 이를 빌미로 4월 21일 스페인과의 전쟁에 나선다. 미국 군함은 쿠바의 주요 항구를 봉쇄했으며, 미 해병대가 동남해안을 통해 쿠바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미국은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 공격에도 나섰다.

 

▲ 쿠바의 독립 전쟁.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의 독립 전쟁. [사진제공-임영태]

 

▲ 메인 호 폭발 장면. [사진제공-임영태]

 

▲ 메인 호 폭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에 상륙해 스페인군과 싸우는 미군. [사진제공-임영태]

 

▲ 필리핀에 상륙하는 미군. [사진제공-임영태]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 쿠바

미군이 쿠바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동부지역은 이미 쿠바독립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쿠바독립군은 미국이 자신들의 해방을 지원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쿠바 독립군은 스페인 함대를 침몰시키고 산티아고데쿠바 등 주요 도시의 공격에 나서 미군의 상륙작전을 도와주었다. 쿠바독립군과 미군의 협공을 받은 스페인군은 더 이상 쿠바 섬에서 버틸 수 없었다. 필리핀을 비롯한 다른 식민지를 지킬 힘도 없었다. 1898년 12월 10일, 스페인은 미국과 파리조약을 체결,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넘겨주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를 아예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이에 쿠바독립군 총사령관 고메즈는 “쿠바는 아직 해방된 것도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다. 쿠바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전에는 절대 총을 내려놓지 않겠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쿠바독립군이 미국을 상대로 또 다시 전쟁을 벌일 힘은 없었다. 1899년 1월 1일 스페인은 미국에 쿠바를 정식으로 이양했고, 미국은 쿠바에서 3년간 군정을 실시했다.

▲쿠바 독립의 정신적 지주 호세 마르티 동상.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화폐 10페소의 주인공이기도 한 독립전쟁의 영웅 막시모 고메즈 장군. [사진제공-임영태]

쿠바를 점령한 미국은 호세 마르티의 쿠바혁명당을 해체하고, 독립군 내부의 갈등을 이용해 독립군의 무장도 해제시켰다. 군정 기간에 미국자본은 토지, 사탕수수 농장, 담배 농장, 목장과 광산 등 주요 산업을 헐값에 사들였으며, 쿠바를 아예 병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경제구조가 비슷한 미국 남부에서 쿠바의 병합이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될 것으로 보고 강력히 반대하였고, 쿠바 독립운동 세력 또한 강력한 저항의지를 불태웠다. 그 때문에 쿠바의 합병 계획은 무산되었다.

미국은 쿠바를 합병하는 대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주2)으로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1902년 쿠바는 미군정에서 풀려나 형식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확고한 친미주의자 에스트라다 팔마가 초대대통령이 되면서 쿠바의 주요 산업은 미국 자본에 잠식당했다. 플랫 수정안을 근거로 관타나모 기지는 영구임대 형식으로 점령되었다. 필요하면 미국은 언제라도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었다.

1905년 팔마가 재선되었으나 부정선거 시비로 위기에 빠졌다. 이에 팔마는 미군 파병을 요청했고, 미국은 찰스 장군을 쿠바 총독으로 임명하고 반정부시위를 진압했다. 1909년 독립 전쟁을 지휘한 막시모 고메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의 내정간섭은 끝났다. 그러나 막시모 고메즈가 물러난 뒤 1913년 친미 성향의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팔마의 전철이 되풀이 되었다.

1934년 훌헨시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해 쿠바 혁명이 일어나는 1959년까지 독재정치를 폈다. 바티스타는 1934~43년과 1952~59년 대통령으로서 직접 통치했으며 나머지 기간 동안은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미국의 군사원조,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강력한 독재정치 폈으나 결국은 카스트로가 이끄는 무장투쟁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 미국의 해외 팽창을 열렬히 지지한 시오도르 루스벨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거친 기병대(RoughRiders)’를 이끌고 참전, 전쟁 영웅이 되었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05년 일본과의 ‘카쓰라-태프트 밀약’(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상호 인정하기로 한 밀약)을 체결하며 제국주의 국가 간의 아시아 질서재편을 주도하였으며, 러일 전쟁의 종전 협상을 주선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진제공-임영태]

 

▲ 관타나모 기지. [사진제공-임영태]

 

▲ 관타나모 기지는 쿠바섬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에서 만난 감은사지 석탑  

고메즈 장군 동상을 돌아본 뒤 1929년부터 국회의사당 건물로 사용되다가 1959년 혁명 후에는 기술부․환경부 건물로 사용된 까삐똘리오(Capitolio)를 구경했다. 이 건축물은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을 닮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실물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고풍스러우며 품격이 있다. 건축물 외부 부속물 중에는 예술성 있는 조각상들이 있고, 내부에도 볼만한 것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리모델링 중이어서 외부에서만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까삐똘리오 옆 공원에는 금요일 아침인데도 느긋하게 쉬고 있는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반면 길거리에는 아침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도 그렇게 조급해 보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표정 없이 걸어서 출근하거나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멕시코에서도 그랬지만 쿠바에서도 사람들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에 따라 길을 건너는 사람들보다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그냥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경찰이 옆에 있어도 제지할 생각도 안했으며, 사람들도 그걸 문제로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우리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약간은 의외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법이나 규범이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 아바나 비엔날레에 출품된 감은사지 석탑.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 비엔날레를 알리는 거리의 선전 현수막. [사진제공-임영태]

우리가 까삐똘리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맞은편에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한국의 석탑을 찍어 놓은 대형 걸게 사진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곳에 그런 대형 걸게 사진이 걸려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건물 공사를 할 때 치는 팬스나 가림막인가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예술작품이었다. ‘2015 아바나 비엔날레’ 미술전에 제출된 작품이었던 것.

아바나 비엔날레는 2015년 5월 22일부터 6월 22일까지 한 달간 열렸다. 그 축제에 한국의 한성필 작가가 높이 28미터, 넓이 34미터의 대형가림막 ‘감은사지 석탑’ 작품을 냈던 것. 이 가림막은 무게만 400kg 이상이 나가는 엄청난 대형작품이라고 한다. 아바나 비엔날레는 주전시장도 있지만 시내 곳곳이 전시장이 되었는데, 한성필 작가는 까삐똘리오 맞은편 건물을 전시장으로 택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전시를 위한 준비 비용은 작가가 부담해야 했다고 한다.(주3)

우리는 센트로 아바나 주변을 돌아본 뒤 센트로 아바나에서 바에하 지역, 즉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도로 중에서 가장 번화가인 오비스뽀 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그 거리를 아침 일찍 걸으면서 아바나 시민들의 다양한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국영상점에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빵과 쌀, 물 등을 비치해 팔고 있는 식료품점들이 눈에 띄었다. 길거리 작은 가게에서 커피(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출근 전 커피 한잔,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빵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많이 보았다. 길거리 노점에서 식빵에 햄이나 치즈, 계란후라이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를 먹고 바삐 출근하는 우리네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출근길 아바나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하다. 우리처럼 종종걸음을 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날 아침 아바나 거리를 걸으면서도 알콜중독자나 노숙자, 구걸하는 사람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그 내막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혁명 쿠바의 자존심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오비스뽀 거리를 따라서 아르마스 광장까지 걸어가면서 아바나 시민의 아침 일상을 친근하게 볼 수 있었다.

▲ 아침에 만난 까삐똘리오. 리모델링 중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까삐똘리오 옆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아침에 본 오비스뽀 거리.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에는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메트로 버스가 많았다. [사진제공-임영태]

 

▲ 아바나에서 본 한 아침 국영상점의 내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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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메인호의 폭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미국은 스페인이 폭발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스페인은 이를 부인했다. 당시 상황으로 봐서 스페인이 미국 군함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스페인이 몰락해가는 제국, 황혼의 노인이라면 미국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신흥제국이었던 것. 그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건을 미국의 음모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건 발생 100년 뒤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 폭발했을 가능성도 높게 나왔다. 천안함 사건이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메인호를 거론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2) 1901년 3월의 미 육군 지출결의서에 첨부된 미 상원의회의 결의 안건. 미국-스페인 전쟁 이래 쿠바에 주둔해온 미군의 철수조건을 명기했는데, 1934년까지 미국과 쿠바 관계의 기본틀을 형성했다. 이에 따르면, 쿠바 영토는 미국 이외의 어떤 국가에도 이양될 수 없고, 조약체결에 대한 쿠바의 권리도 제한된다. 미국의 동의 하에서만 외국과의 조약체결이 가능한 것이다. 또 미국은 쿠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군사개입을 할 수 있고, 쿠바 관타나모 만에 있는 해군기지 사용권도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채 양도되었다. 쿠바는 미국의 군정 상태를 종식하고 형식적으로라도 독립국이 되기 위해, 이 안건의 여러 항목을 자국의 헌법에 포함시키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이 플랫수정안과 그것을 반영한 쿠바 헌법은 쿠바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며 사실상 쿠바를 미국의 예속국으로 만드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의 관타나마 해군기지 사용권을 제외한 플랫수정안의 모든 조항의 폐기에 동의해줌으로써 쿠바는 굴욕적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쿠바 혁명 전까지 미국은 친미정권을 통해 쿠바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3)  공진구, “쿠바에 간 감은사지 석탑”, <SBS 뉴스>, 2015.6.23(인터넷검색: 2015.8.14)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39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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