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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노래’에 취하다임영태의 멕시코-쿠바 여행기 (22)
임영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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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02  14: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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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동네 식당에서 만난 두 명의 음악가. 우리 일행은 그들이 부른 ‘체 게바라 노래’에 취했다. [사진제공-임영태]

 

점심은 ‘슬로피 조스 바’에서

혁명박물관을 돌아본 뒤 점심식사를 했다. 12시 30분 경, 우리는 식당을 찾아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때 길 건너편에서 바깥에서 호객 행위하고 있는 종업원을 발견했다. 건너편에서 바라다보니 ‘Sloppy Joe's Bar’라고 돼 있었다. 분명 술집인데 감각적으로 식사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다가가서 웨이터에게 물어보니 식사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내로 들어서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술집이다. 세계의 모든 술이 다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형 고급 바(술집)가 분명했다. 벽 장식장에는 세계의 유명한 양주들이 즐비했다. 외국관광들이 점심식사와 함께 맥주 등 술을 한잔씩 하고 있었다.

   
▲ 슬로피 조스 바 외부 전경. 우리는 아바나에 있는 동안 이 집을 애용했다. [사진제공-임영태]

 

   
▲ 슬로피 조스 바에서 먹은 점심. [사진제공-임영태]

그런데 이곳은 1917년에 시작된 역사가 있는 술집이었다. 이 바를 처음 열게 되는 조(Joe)란 인물은 1904년 아바나에 도착한 스페인 출신으로 본명은 호세 아베알 이 오테로(Jose Abeal y Otero)다. 그는 섬에서 3년 동안 웨이트로 일하다가 미국 여행을 떠나 플로리다에서 거의 6년간 바에서 일했고, 1916년 쿠바로 돌아와 카페에서 잠시 일을 했다. 그리고 1917년 자기 사업을 시작해 슬로피의 문을 열었다. 1917년부터 1919년 사이에 미국인 사업가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을 위한 술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술집은 낡은 창고를 개조해서 매우 더럽고 지저분했다. 그래서 조는 슬로피(Sloppy)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33년에는 미국의 키웨스트에서도 유사한 이름(Sloppy Joe)의 술집이 문을 열었는데, 헤밍웨이의 친구인 조 러셀(Joe Rusell)이 주인이었다. 아바나에서 모방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술집 벽면 기둥에는 유명 인사들의 사인이 들어 있는 사진이 다수 걸려 있어서 고급스런 분위기와 함께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여배우 에바 가드너, 배우 겸 가수 프랑크 시네트라, 테드 윌리엄스, 린다 다니엘, 복서 조 루이스 등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 즐비했다.

슬로피 바는 아바나 시의 역사기관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의 힘든 복원 작업을 거쳐 2013년 4월에 재개장되었으며, 지금은 아바나관광공사(Habaguanex Tourist Company) 소속이라고 한다. 혁명역사관에서도 보지 못한 소개 팸플릿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위해 샌드위치를 시켰다. 야채 2, 햄 1, 참치 1,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 4명과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는 푸짐한 양과 맛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거기다가 감자튀김을 안주삼아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고급 술집이어서 비쌀 것으로 예상했지만 모두 합해 20꾹(한화 25,000원)  정도였다.

   
▲ 혁명기념관. 혁명기념관과 주변의 국립대극장, 국제미술관, 까삐똘리오 등 센트로 아바나 지역의 기념비적인 주요 건물들은 대부분 보수공사 중이었다.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기념관 주변의 국립대극장.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기념관 주변의 국제미술관.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기념관 주변의 까삐똘리오. [사진제공-임영태]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쿠바 미술

점심식사 후 바깥으로 나오니 강렬한 태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혁명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미술관은 모두 3층으로 되어 있었고, 2층과 3층이 미술품 전시관이었다.

   
▲ 국립미술관 외부 모습.[사진제공-임영태]

 

   
▲ 국립미술관 외부 모습.[사진제공-임영태]

 

   
▲ 국립미술관 내부 모습.[사진제공-임영태]

 

   
▲ 국립미술관 내부 벽면에 커다란 하늘소 모형의 미술품이 붙어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미술관에는 시대별로 미술작품들이 분류, 전시되어 있었다. 대략 1873~1937년, 1938~53년, 1954~69년, 1970~89년, 1990년 이후로 분류되어 있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난 1950년대가 미술사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지만, 미술관에서는 특별히 그러한 분류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작품의 경우 혁명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들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1930년대까지의 작품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신고전주의를 거쳐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940년대 작품들은 고갱 등의 후기인상파, 피카소 등의 큐비즘,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1940년대 중반부 혁명 이전까지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작품들이 대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의 문화적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간혹 눈에 띠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작품들 가운데는 쿠바 혁명의 영향을 반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통의 미술작품과 선전미술의 성격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러한 작품들조차도 소련이나 중국, 북한처럼 국가가 미술을 선전도구로 이용한다는 느낌이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 쿠바 혁명시대를 대표하는 라울 마르티네스(Raul-Martinez)의 작품. [사진제공-임영태]

 

   

▲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제작된 그래픽디자인 같은 작품. 체 게바라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강한 선전성보다는 현대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피델 카스트로를 그린 라울 마르티네스의 작품. [사진제공-임영태]

 

   
▲ 호세마르티를 그린 라울 마르티네스의 작품. [사진제공-임영태]

 

   
▲ 까밀로 시엔푸에고스. 라울 마르티네스의 작품. [사진제공-임영태]

 

   
▲ 라울 마르티네스의 작품. [사진제공-임영태]

쿠바의 혁명적 리얼리즘 미술을 대표한다는 라울 마르티네스의 작품조차도 북한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미술처럼 강한 선전예술의 성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멕시코에서 보았던 데이비드 알파이 시케이로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선동성 같은 것도 느낄 수 없었다. 혁명의 정당성과 승리를 강하게 내비치는 대형선전화조차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는다.

혁명 이후 시대의 그림에서는 미국 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 아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그 소재나 내용은 혁명, 혁명가, 사회적인 것이지만 그 표현방식에서 팝 아트식의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경직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쿠바 여행을 통해서 느낀 자유분방함 같은 것이 그림 속에서도 보였다. 나는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이런 것들이 의외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예술은 철저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쿠바 미술에서도 일부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 강도가 생각보다 훨씬 미약했던 것이다.

미술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1960~70년대, 즉 혁명시대를 대표하는 ‘마르티네스’의 대형작품이었다. 우리가 종종 봐온 그림이다. 한국의 민중미술가들이 그의 그림을 종종 화보집에 소개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의 그림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니 현장 직원이 촬영 불가란다. 아쉽다. 그 때문에 미술관 안에서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 달래며 열심히 눈으로 감상만 했다. 미술관을 돌면서 나는 쿠바가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미술에 문외한인 나의 눈으로도 본 것이기에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미술관 관람이 끝나고 아래층에 내려와 도록을 한권 살까하고 돌아보았던 가격이 의외로 상당히 비쌌다. 우리나라의 미술관 도록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잠깐 망설이다 못 샀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나중에 쿠바의 다른 지역을 돌고 다시 아바나에 왔을 때 도록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시간적인 이유 때문에 결국 못 사고 말았다. 아무래도 한번 눈으로만 본 것으로는 제대로 된 느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보려 애쓰지만 그 느낌은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

관람 도중 우리는 멕시코에서 쿠바로 여행 온 젊은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그가 산티아고데쿠바로 떠난다기에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약속을 했다. 아바나에서 엄청 먼 거리에 있는 그곳에 갈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일정상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정보도 전무한 상태였기에 적절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미술관 관람을 대략 끝내고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결과 서로의 일정도 맞지 않고, 구체적인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그날 저녁에 그곳으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했던 것. 우리는 각자 알아서 행동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만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묵는다는 호아낀네 아주머니 집 위치를 확인하고, 거기에 한번 들러보기로 했다.

오후 3시 30분경 미술관 관람을 끝내고 숙소로 향했다. 센트로 아바나 지역에서 우리 숙소가 있는 비에하 아바나의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골목길이 많아서 미로 같다. 자칫하면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표와 내가 잘 협력한 덕분에 별로 헤매지 않고 걸어서도 잘 찾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뒤 원장님은 마이클네 집을 방문하여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여행과 관련된 정보, 쿠바인들의 삶과 관련된 내용 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갖고 있던 궁금한 점을 중심으로 물어보고 그가 이야기해주는 식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휴식을 취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가 어김없이 망고주스를 내놓는다. 맛있게 먹고 남은 것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먹기로 했다.

   
▲ 19세기 말부터 여성이 교육의 혜택을 받으면서 라틴아메리카에 여성 화가들이 다수 등장한다. 아멜리아 펠리에즈는 파리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피카소의 큐비즘 영향을 받는다. 1940년대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든다. 라틴아메리카의 풍습을 섞은 열대적 큐비즘(Tropical Cubism)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사탕수수 일꾼들은 전통적으로 칼을 들고 일을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하면서도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형태가 왜곡되어 발이 크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사탕수수 농장을 만든 다음, 아프리카와 카리브의 다른 섬에서 흑인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초현실주의(Surrealism)와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 [사진제공-임영태]

 

   
▲ 형태가 파괴된 큐비즘과 초현실주의가 혼합된 서양 현대화를 닮았다. 파리에서 Pablo Picasso, Andre Breton과 교류를 가졌던 위프레도 램은 아프리카, 중국계, 스페인계가 섞인 특이한 혈통으로 쿠바 현대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로 꼽힌다. [사진제공-임영태]

 

   
▲ 카레노(Carreno)의 작품, 캐러비안의 발견(Discovery of the Caribbean). [사진제공-임영태]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우리들은 7시경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은 우리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라 파밀리아’(La Familia). 역시 마이클이 소개해 주었다. 그는 동네 반장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소개를 해주었다. 물론 우리들에게도 적절한 여행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발이 넓고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 대표는 “마이클은 쿠바의 개방이 가속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인물”이며 “자본을 모아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연 그는 10년 뒤 이 대표의 말처럼 성공한 자본가가 되어 있을까? 궁금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식당은 더위를 막기 위해 기둥 몇 개를 세워 적당히 가린 옥상 아닌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첫날 저녁을 먹은 음식점보다는 규모가 작고 시설도 떨어지며 약간은 덥고 전망도 떨어졌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두 청년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들의 노래와 기타 솜씨가 상당히 뛰어났다.

젊은 두 청년 음악가(기타 전공과 보컬 전문)의 노래가 있어서 식사의 즐거움은 더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물론 우리들을 포함해 다른 식사 팀들도 그들에게  팁을 주었다. 우리는 각기 1인당 1꾹(달러)씩 주었다. 우리가 아는 노래는 없지만 ‘관타나메라’, ‘체 게바라’ 노래가 기억에 남았다. 특히 체 게바라 노래는 정말 잘 부른다. 그 청년의 체 게바라 노래는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고 울렸다. 애절하면서도 감상적이고 그러면서도 낭만적인 맛이 느껴졌다.

   
▲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한 동네식당 ‘라 파밀리아’. 우리가 식사를 한 옥상 아래층 홀에는 장차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예상하듯 성조기가 걸려 있다.[사진제공-임영태]

 

   
▲  ‘라 파밀리아’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 일행. [사진제공-임영태]

 

   
▲ 식사하는 동안 열정적인 노래와 기타 솜씨를 보여준 두 명의 음악가. 그들의 연주와 노래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바나에는 이런 프로 수준의 음악가를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그날 식당에서 우리는 앵콜을 해서 체 게바라는 두 번이나 들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체 게바라 노래가 들어 있는 CD를 하나씩 구입했다.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들었던 그 감동을 생각하며.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들어보니 그 맛이 안 났다. 아무래도 생음악과 녹음음악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달리 말하면 아바나 음식점의 그 청년이 노래를 잘 불렀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노래의 정식 제목은 ‘아스따 시엠쁘레 꼬만단떼’(Hasta Siemppre Comandante)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정도 될 것이다.(주1)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다시 새로운 길을 시작했다. 1965년 4월, 그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혁명가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다. 혁명을 위해 영원히 살기로 결심한 체 게바라에게 쿠바의 인기 가수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노래를 만들어 헌정했다. 체 게바라의 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체 게바라는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로 떠났다. 그리고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주검은 전 세계에 공개됐다. 체 게바라의 웃옷은 벗겨져 있었고, 볼리비아 군인들은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를 하잘 것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사진이 공개됐지만 오히려 그를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영웅으로 만들고 말았다. 대중들은 그의 죽음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보았다. 체 게바라는 ‘남미의 예수’라 불리었다. 그리고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체 게바라에게 헌정했던 ‘아스타 시엠프레 코만단테’는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추모곡이 됐다.

이 노래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버전으로 불려졌다. 전 세계 가수들이 부르고 있고, 알려진 것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쿠바 가수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부른 원곡이다. 베네수엘라 저항가수인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가 부른 버전도 있다. 원곡에 비해 훨씬 더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고, 더욱 가슴 아프게 전달되는 곡이다. 나는 이 곡을 좋아한다.

그 외에도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버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쿠바적인 목소리로 불리어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칠레의 민중가수인 빅토르 하라(Victor Harra)가 부른 버전,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아는 가수인 존 바에즈가 부른 버전이 있다. 또 프랑스 배우 겸 가수인 나탈리 카돈(Nathalie Cardone)이 1999년에 발표한 버전도 있다. 그녀의 노래는 뮤직 비디오와 함께 인터넷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앞선 노래들 하고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든다.(주2)

   
▲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쿠바 인민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혁명박물관 옆 선물가게 벽에 걸린 박물관과 체 게바라 사진. [사진제공-임영태]

 

   
▲ 볼리비아 군에 살해된 뒤 공개된 체 게바라의 시신. 게바라가 모든 공직을 버리고 다시 혁명가로 살기 위해 쿠바를 떠난 그에게 바친 쿠바 음악가 카를로스 푸에블라의 ‘아스타 시엠프레 코만단테’는 체 게바라 추모곡이 돼 지금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다음날 아침을 기약하며

청년 아티스트의 기타 반주와 노래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알함브라의 궁전’을 연주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기타리스트가 쿠바기타를 일반 클레식 기타로 바꾸어 연주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한 소절도 제대로 못하고 끝낸다. 자기는 쿠바기타에 익숙한 데 클래식은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 옆에 붙어서 계속 말을 걸고 애교를 뜬다. 원장님이 그에게 얼마간의 팁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었거나 할 앳된 얼굴이다. 그는 아직 사회에 나와서 세파에 찌들지 않은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군대 간 아들이 생각났다.

식사 후 두 분은 쉬고, 이 대표와 나는 비에하 지역을 걸었다. 아바나 시가의 밤 낭만을 즐기며 산책하는 기분이 그만이다. 아레모 광장, 산 프란시스코 광장, 암보스 문도스 호텔(헤밍웨이가 묶었다는) 등을 구경하고 광장 옆에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숙소로 오는 도중, 한 젊은 청년이 쫓아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꼬레아’라고 대답했더니 자기 할머니가 한국인이라고 사진까지 보여주며 이야기를 한다. 결국 우리는 그 친구 손에 이끌려 광장 옆 골목길에 있던 노천 술집에서 맥주를 한잔시켜 마셨다. 크리스탈 맥주를 시켰더니 한 병에 2꾹이란다.

그곳에 앉아서 아바나의 밤공기를 느끼다가 11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 시간이 됐는데도 주인아저씨는 아직도 안자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반가이 맞이한다. 문단속 뒤 그도 자러 들어갔다.

나는 샤워 후 하루 일과를 간단히 메모하고 정리한다. 한국으로 문자도 발송한다. 이 대표가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구시가지와 오비스뽀 거리를 걸어보자고 말한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오늘처럼 늦게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럴려면 바로 잠을 자야 한다.

   
▲ 구시가 곳곳에 있는 바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관광객과 아바나 시민들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기념품점에는 체 게바라로 넘쳐흐른다. [사진제공-임영태]

 

   
▲ 밤에 만난 암보스 문도스 호텔. 헤밍웨이의 사진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밤에 본 산 프란시스코 광장. 사진제공-임영태]

 

   
▲  밤에 본 아르마스 광장.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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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Hasta siempre Commandante(사령관이여 영원하라!)
Aprendimos a quererte/desde la histirica altura donde el sol de tu bravura/le puso un cerco a la muerte우리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당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당신의 용맹한 태양이 서있던 역사의 절정으로 부터.
Aqui se queda la clara,/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Comandante Che Guevara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여!
Tu mano gloriosa y fuerte/sobre la historia dispara cuando toso Santa Clara/se despierta para verte.당신의 영광스럽고 강력한 손은 역사를 겨냥하지요, 전 산타 클라라가 당신을 보기위해 깨어날 때
Aqui se queda la clara,/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Comandante Che Guevara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심오한 투명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여!
Vienes quemando la brisa/con soles de primaver para plantar la bandera/con la luz de tu sonrisa밝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깃발을 꽂으러 봄의 태양으로 산들바람을 태우며 오지요
Aqui se queda la clara,/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Comandante Che Guevara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여!
Tu amor revolucionario/te conduce a nueva emparesa donde esperan la firmeza/de tu brazo libertario당시의 혁명적 사랑은 당신의 강건한 팔을 기다리는 새로운 사업으로 당신을 이끌어가고
Aqui se queda la clara,/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Comandante Che Guevara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여!
Seguiremos adelante/como junto a ti sequimos y con Fidel te decimos: hasta siempre Comandante.우리는 계속할거예요. 우리가 함께 당신을 따르는 것처럼 그리고 피델처럼 우리는 말해요.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라고.
Aqui se queda la clara,/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Comandante Che Guevara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여!
(권종술, “유튜브 음악산책 2. 체게바라여 영원하라! ‘Hasta siempre Commandante’”, <민중의소리>, 2015.3.4(http://www.vop.co.kr/A00000854712.html)-인터넷 검색일: 2015.8.13.)

2) 노래와 관련된 내용은 권종술, 위의 글, 참고. 이곳에서 여러 버전의 노래들도 함께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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