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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은 안녕하신가?임영태의 멕시코-쿠바 여행기 (21)
임영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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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29  13: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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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마에스트라 게릴라 시절의 셀리아 산체스, 피델,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ee Santamaria). [사진제공-임영태]

혁명박물관에서 만난 여전사들

혁명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인상에 남은 것 중 하나는 여성 전사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우 뺨치는 미모의 여전사 빌마 에스핀(Vilma Eespin)이다. MIT 화학공학도 출신의 그녀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라울 카스트로와 결혼했다. 남편의 형인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의 집권자가 됐지만 공식적인 배우자가 없었던 탓에 그녀가 40여년간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해왔다. 에스핀은 1960년 쿠바 여성이 거의 모두 가입해 있는 쿠바여성동맹을 창설, 쿠바 정부의 든든한 뒷받침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지로 활약한 게릴라 여전사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다. 그녀는 에스핀 만큼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전사로서의 역할은 더욱 빛나는 여성이다. 그녀는 1957년 게릴라 투쟁에 참가해 7월 26일 운동과 게릴라 부대를 연결시켜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으며,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들어온 피델 일행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자리를 잡는데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녀는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게릴라 캠프에서도 병참과 기획을 책임질 정도로 카스트로의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 활동했다. 혁명 성공 후 그녀는 카스트로의 비서실장을 오랫동안 했으며, 혁명역사의 기록물을 정리하는 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는 여성 전사로서 쿠바 혁명을 세계에 알리는 데서도 크게 활약했다.

   
▲ 혁명박물관 건물의 내부 구조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서방 세계의 호사가들은 산체스가 카스트로의 비공식 연인이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피델은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셀리아는 사랑과 우정이 깊은 사이였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녀관계는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주1)

참고로 피델 카스트로의 여성관계를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피델은 혁명 전 미르따 디아르스 발라르뜨와 결혼해 아들 피델 펠릭스 카스트로를 낳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혼 전에 이미 레부엘타라는 연인이 있었다. ‘나티’라는 애칭으로 불린 나탈리아 레부엘타는 여배우 뺨치는 미모를 자랑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20세나 나이가 많은 심장병 전문의와 결혼해 딸을 낳고 남편을 뒷바라지 하며 주부로 살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바티스타 독재정권 저항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피델과 동갑내기의 그녀는 피델이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을 준비하는 동안 자신의 집을 혁명을 준비하는 근거지로 제공했으며, 자신이 갖고 있던 돈 6천 달러와 다이아몬드 반지 등 귀중품을 혁명거사 자금으로 제공했다.

몬카다 병영습격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피델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1955년 아내 마르따는 이혼을 선언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피델은 감옥에서도 아내와 연인에게 동시에 편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바티스타 정부가 이 편지를 바꿔 보내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이혼을 선언했다고 한다. 이때 피델의 연인 나티는 임신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피델은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멕시코에 망명한 후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피델은 공식 결혼을 하지는 않았으나 4명의 여성과 관계를 맺어 페르난데스 등 8명의 자녀를 더 낳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델과 나티 사이에는 딸 페르난데스가 있는데 그녀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피델을 ‘독재자’라 부르며 쿠바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나티는 혁명 후 한때 퍼스트 레이디를 꿈꾸기도 했으나 피델은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2015년 2월 28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아바나에 거주하면서 ‘쿠바의 여인’으로 살았다. 레부엘타는 2008년 스페인 신문 라 반과르디아와의 인터뷰에서 “그(피델)가 개인의 삶보다 혁명 과업을 우선시한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맘 속에서 그를 지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주2)

피델의 말과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셀리아 산체스는 동지이자 카스트로가 신뢰하는 측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빌마 에스핀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여전사 셀리아 산체스의 아버지는 빈민을 위해 헌신한 의사였는데, 그 때문에 그녀 또한 의료 복지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런 점에서 쿠바의 무상의료 제도에는 체 게바라와 셀리아 산체스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셀리아는 1980년에 사망했으며 오늘날 1쿠바 페소화(동전)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혁명 후 카스트로 정부의 문화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쿠바 문화계의 대모로 알려지게 되는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ée Santamaría)도 빼놓을 수 없는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여전사 중 한 명이다. 혁명 정부 아래서 쿠바인들이 무료에 가까운 비용으로 문화생활을 즐기고 혁명 쿠바의 예술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만든 것은 그녀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남동생의 두 눈과 목숨까지 희생당하는 가운데서도 온갖 고문을 이겨내면서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1980년 7월 26일(쿠바 정부 발표는 28일) 27년 전 자신이 함께 했던 몬카다 병영 습격 기념일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쿠바 정부는 그녀가 몇 달 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과 과다한 약물 치료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발표했으나 쿠바 혁명 정부의 실패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주3)  

   
▲ 미모의 여전사 빌마 에스핀(Vilma Eespin). MIT 화학공학도 출신의 그녀는 쿠바 혁명 성공 뒤 라울 카스트로와 결혼했다. [사진제공-임영태]

 

   
▲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측근 여전사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 그녀는 쿠바 혁명과 건설에 많은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박물관에서 만난 빌마 에스핀과 셀리아 산체스.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박물관에서 만난 셀리아 산체스. 혁명 후 꽃다발을 받고 환호하는 군중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카스트로의 비공식 연인 나티 레부엘타(Naty Revuelta). [사진제공-임영태]

 

   
▲ 젊은 시절의 초상화 앞에 선 늙은 시절의 나티 레부엘타.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기념관에서 만난 체 게바라와 빌마 에스핀 초상. [사진제공-임영태]

 

그란마 호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혁명박물관의 바로 뒤편 야외에는 그란마 호 기념 전시관과 야외 무기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란마 호는 혁명을 위해 멕시코에서 쿠바로 타고 갔던 배로써 쿠바 혁명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11월 25일, 오전 1시 30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82명의 혁명가를 태운 그란마 호는 멕시코 만 중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툭스판을 떠나 쿠바섬으로 향했다. 12월 2일 배는 쿠바 남동부에 위치한 라스콜로라다스 해변 진흙투성이의 늪지대에 상륙했다. 쿠바섬 동남부 정보를 미리 입수한 바티스타군은 미리 매복한 뒤 지친 혁명군이 작은 개간지 알레그리아델피오에서 휴식을 취하자 무차별 공격을 벌였다. 바티스타 정부군의 공격과 추격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16명이었다. 체 게바라는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 그란마 호의 항해 지도. [사진제공-임영태]


이들 16명은 정부군의 추격을 떨치고 쿠바 남동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간 들어간 곳에 위치한 험준한 산악지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깊숙한 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이때 이들이 2년 후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혁명에 성공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카스트로는 2004년 한 서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82명의 대원을 이끌고 예정된 장소에 제대로 상륙했다면, 전쟁은 7개월이면 충분했을 겁니다”라면서 호기를 부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튼 이 16명의 전사들은 세력을 키워, 2년 뒤 잘 훈련된 2만 5천명의 군대를 보유한 바티스타군을 물리치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물론 그 답은 간단하다. 혁명전사들은 민중의 신뢰를 얻었고, 정부군은 민중의 신임을 잃었다. 2년 동안 쿠바 혁명가들이 한 활동 내용은 세계 혁명운동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내용들과 특별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노력했고,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런 노력 덕분에 처음 적대적이었던 농민들도 점차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혁명군은 농민의 재산과 생명을 해치지 않았고, 부녀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반면에 정부군은 정반대의 행위를 했다. 그 때문에 혁명군은 농민들로부터 식량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정부군의 움직임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었다.

1957년 2월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 매튜스가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다. 매튜스는 이때 “그(카스트로)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정의, 그리고 헌법을 복원하고 선거를 지켜내야 한다는 강력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썼다. 또한 그는 “이 사람은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다. 부하들이 그를 떠받드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고, 그가 왜 쿠바 전역의 젊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지도 금방 알 수 있다”라고 해서 카스트로의 지도력을 부각시켰다.(주4)

매튜스는 사실 기대 이상의 선전활동을 해주었다. 그의 기사는 혁명군을 쿠바 전역과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카스트로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은 분노했고, 바티스타 정권은 난처해졌다. 바티스타 정권은 카스트로가 이미 죽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 있었는데, 이 기사로 바티스타 정권의 거짓이 폭로되어 신뢰에 치명타를 입었다. 대신 카스트로의 이미지는 혁명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래서 다른 기자는 매튜스를 가리켜 “피델을 창조해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8년 4월 '7.26운동'이 주동이 된 노동자와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한 총파업 공세가 좌절되면서 혁명세력에 위기가 닥쳤다. 5월 말 바티스타군은 혁명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다. 혁명군은 70여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정부군을 물리쳤다. 이때 혁명군 게릴라 부대들은 마에스트라 산맥 주변에서 벌어진 주요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 박물관에서 만난 부시 부자 풍자화. [사진제공-임영태]

 

   
▲ 박물관 천정에 있는 벽화. 가브리엘 수호천사가 쿠바 국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그란마 호와 히론 전투의 의미

1958년 8월부터 시작된 혁명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의 주력부대는 동부에서부터 차례로 주요도시들을 장악하며 수도 아바나를 향해 두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12월 27일부터 사흘 동안 벌어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승리하고, 12월 30일 야과하이 전투에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이끄는 혁명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는 결정이 났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는 마에스트라 근처에 있는 쿠바 제2의 도시 산티아고데쿠바에서 ‘혁명의 성공’을 선언했다. “우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길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번에 혁명은 실패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그는 카밀로 사령관과 게바라 사령관에게 아바나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독재자 홀헨시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3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 주력부대가 아바나에 입성했다. 이미 아바나의 주요도시들은 혁명 세력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 사령관은 1천명의 혁명군 병사와 바티스타군에서 투항한 병사 2천명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은 카스트로는 아바나에서 여러 시간에 걸쳐 열정적인 연설을 펼쳤다. 그는 1940년의 헌법을 다시 도입할 것이고, 토지개혁을 할 것이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그란마 호를 타고 멕시코 만에서 출발하여 동부산악지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자리를 잡고 시작한 혁명 투쟁의 여정은 2년이 조금 지난 뒤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녹색의 제복을 입은 33세의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 바르부도스(주5) 전사들은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쿠바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 여정은 거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 그란마 호 기념관 전경. [사진제공-임영태]

 

   
▲ 그란마 호 기념관 전경. [사진제공-임영태]

 

   
▲ 그란마 호 기념관 전경. [사진제공-임영태]

 

   
▲ 유리관 속의 그란마 호(모형). [사진제공-임영태]

이런 쿠바 혁명 과정을 생각하면 쿠바에서 그란마 호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쿠바 공산당 기관지 이름도 <그란마>다. 그란마는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쿠바 혁명의 원류, 쿠바 혁명의 정신적 스승인 호세 마르티와도 연결된다. 호세 마르티가 그러했듯이 외국에서 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직접 혁명을 실천하기 위한 과감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가능할 것 같은 혁명을 현실에서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불굴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란마 호 기념관은 별 모양의 지붕 아래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그란마 호는 그 유리관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란마 호가 실물인지 모형인지를 두고 이 대표와 나는 의견이 갈렸다. 내가 보기에 모형이 분명했는데, 이 대표는 모형이라면 저렇게 유리관 안에 고이 보관할 리 없다며 실물일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모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지만 쿠바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는 아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일 그게 모형이라면 모형에 불과한 것을 왜 그처럼 유리관 속에 넣어두면서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간직해 두었을까? 그들은 혁명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유리벽 속에 넣어두고 있는 것일까? 내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사진제공-임영태]

 

   
▲ 히론 전투의 희생자들. [사진제공-임영태]

그란마 호는 계단을 한층 올라가야 내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돼 있다. 그란마 호가 있는 기념관 옆 한 쪽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고, 다른 쪽에는 히론 전투의 희생자들(Martires de Giron)의 사진이 담긴 작은 입간판 세 개 있다.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 주요 상륙 지점은 쿠바 남중서부에 위치한 해변가 ‘플라야 히론(Playa Girón)’이었다.

히론은 중남부의 주요 공업도시인 시엔푸에고스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여기서 카스트로의 혁명쿠바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침공반군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침공군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200여명이 체포됨으로써 침공기도가 무산되었다. 쿠바에서 ‘히론 전투’는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침공 작전이 있었던 곳은 스페인어로는 코치노스 만(Bahía de Cochinos)으로 불리지만 미국에서는 피그스 만(Bay of Pigs)이라고 불러서 이런 명칭이 일반화되었다.(주6)

   
▲ 지도 코치노스만(bahia-cochinos). [사진제공-임영태]

 

   
▲ 코치노스만 침공 현황. 케네디와 카스트로가 마주보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  피그스 만 침공 당시 현황. [사진제공-임영태]

이 사건 이후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쿠바 혁명은 처음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외세의 간섭에 저항하는 민족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피델은 후에 자신이 대학 1학년 때부터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는 등 일찍부터 사회주의자였다고 말했지만, 이념적으로는 피델보다는 동생 라울이 사회주의를 일찍 접했다. 또한 쿠바 혁명 당시의 혁명주체들의 인식은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제3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족민주혁명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미국의 쿠바 침공과 카스트로 정권 전복 활동 지원이 결정적으로 쿠바를 소련의 편으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카스트로 정권은 피그스 만 침공 이후 친소 노선으로 기울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대와 무력을 강화하고 반미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카스트로는 언제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일 각오가 돼 있다고 천명했던 것이다.

그란마 호가 쿠바 혁명운동의 성공을 의미한다면, 히론 전투는 미국의 침략과 반혁명 기도로부터 쿠바혁명을 수호한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 야외에는 비행기, 탱크, 미사일, 장갑차, 승용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쿠바군에 의해 격추된 미군 정찰기 U-2의 잔해도 있었다. 그란마 호 전시관과 무기 전시장은 결국 혁명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혁명기념관의 일부이며 연장인 셈이다.

   
▲ 미사일, 장갑차, 차량, 비행기 등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의 전시물. [사진제공-임영태]

 

   
▲ 장갑차, 차량, 비행기 등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의 전시물. [사진제공-임영태]

 

   
▲ 장갑차, 차량, 비행기 등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의 전시물. [사진제공-임영태]

 

   
▲ 장갑차, 차량, 비행기 등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의 전시물. [사진제공-임영태]

 

   
▲ 장갑차, 차량, 비행기 등 그란마 호 기념관 주변의 전시물. [사진제공-임영태]

 

   
▲ 쿠바 여군 모습. 쿠바는 피그스 만 침공 사건 이후 반미노선을 본격화하고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친소 정책을 폈다.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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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승구,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아카넷, 2015), 301쪽

2) 이동경, "'피델 카스트로의 연인' 레부엘타, 89세로 사망", <연합뉴스(종합)>, 2015.3.3.

3) 정승구, 위의 책, 317쪽

4) 임영태, 「쿠바 혁명」, 『스토리 세계사 9』(21세기북스, 2014), 190쪽

5)  ‘털보’라는 뜻. 카스트로, 게바라, 시엔푸에고스, 라울 카스트, 후안 알메이다, 보스케 등 쿠바 혁명가들은 하나같이 수염을 텁수룩하게 길렀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수염을 손질하기 힘들어 그냥 길렀는데, 이게 나중에서 게릴라를 상징하는 신분증처럼 돼 버렸다. 그래서 쿠바 혁명은 바르부도스들의 혁명이 되었고, 나중에는 텁수룩한 수염이 곧 라틴아메리카 혁명가의 상징물이 되었다.

6) 위키백과 사전 ‘코치노스 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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