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쿠바 혁명박물관에서 만난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모습(좌측부터). 그들은 쿠바 혁명의 3인방이라 할 수 있다. [사진-임영태]

센트로 아바나 구경에 나서다

6월 18일, 목요일. 8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정신없이 잤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전날 일정이 아무래도 무리를 했던 것 같다. 교수님이 자신의 만보기에 2만보가 넘게 찍혔다고 말씀하신다. 어제 저녁 말레꼰 해변의 식당에 갈 때는 만보기를 가져가지 않아서 저녁에 걸은 것은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까지 포함하면 2만 4천보 이상은 걷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침에도 2시간 이상 걸었으니 대략 3만보 이상은 걸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낮 기온이 32도나 33도쯤은 올라갔을 것이다. 그 더위에 그렇게 많이 걸었으니 아무래도 힘들었을 법하다. 일반적으로 성인남성의 보폭을 70센티미터, 성인여성을 60센티미터로 잡는다. 그렇다면 대략 15~20킬로미터 정도, 적어도 5~6시간 이상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차를 타고 다니는 시간 외에 그렇게 걸었다.

아침 식사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9시에 마이클의 집 옥상에서 했다. 식단도 동일했다. 다만 망고주스 대신 구아바 주스가 나왔다. 딸기주스처럼 색깔은 아주 보기 좋았지만 맛은 심심했다. 우리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더 달라고 해서 마신 다음, 남은 것은 보온병에 넣어서 구경하는 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잘 먹었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혁명박물관과 그란마호 기념관, 그리고 국립미술관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센트로 아바나 지역에 있었는데,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바나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주요지역은 대형 호텔과 신도시 지역인 베다도 지역, 문화의중심을 이루고 있는 센트로 아바나 지역, 성당과 광장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있는 올드 아바나 지역인 아바나 비에하 지역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베다도에는 혁명광장, 아바나대학(UniveridadHabana),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인 코펠리아(Coppelia), 영화관, 나시오날 호텔(Hotel Nacional) 등 대형 호텔들, 째즈 클럽 등 각종 유흥시설, 여러 공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아바나의 오래되고 낡은 건물과는 달리 대형 호텔을 중심으로 새 건물들이 줄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센트로 아바나에는 까삐똘리오(Capitolio), 빠르따가스 시가 공장(Real Febrica Tabacos Partagas), 아바나 대극장(Gran Teatro), 중앙공원(Parque Central), 국립미술관(Museo National de Bellas Artes), 혁명박물관(Museo de la Revolution), 그란마 박물관(Museo de la Granma), 쁘라도(Prado) 공원, 쇼핑센터 등이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아바나 비에하에는 명동 같은 오비스뽀 거리(Calle Obispo)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대성당 광장(Plaza de la Catedral), 산프란시스꼬 광장(Plaza de San Francisco de Asis), 비에하 광장(Plaza Vieja), 럼 박물관(Museo del Ron), 모로 요새 공원(Parque Historico Militar Morro-Cabana) 등이 있다.

▲ 아바나 주요 지역 지도. [사진-임영태]

 

▲ 아바나 골목길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자영업자. [사진-임영태]

 

▲  국영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시민들. [사진-임영태]

 

▲ 박물관 가면서 만난 거리의 건물.[사진-임영태]


혁명박물관을 돌아보다

혁명박물관은 실제로는 3층 건물이지만 그보다 훨씬 웅장해 보인다. 오래된 고전미와 예술적 품격이 느껴지며 혁명박물보다는 미술관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다. 쿠바 혁명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놓은 이 건물은 1920년대까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다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박물관 정면 앞쪽으로는 저 멀리 말레꼰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 막시모 고메즈 장군의 말 탄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침략자를 물리치는 독립영웅’으로서 혁명박물관의 수호자가 되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혁명박물관장을 넘어 쿠바 주권의 수문장으로서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 위치로 보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 그 동상의 뒷모습을 보고서 피델 카스트로가 아닐까 하고 오해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우리는 동상을 정면에서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쿠바 어디서도 우리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상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의 초상이나 초상화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동상을 본 것은 오래된 독립전쟁의 영웅들과 호세 마르티, 체 게바라가 전부였다.

혁명박물관 복도에는 네 명의 흉상이 있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 남미 볼리바르 혁명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 멕시코 독립운동의 아버지 베니토 후아레스, 그리고 미국의 흑인노예해방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오랜 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한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링컨의 흉상은 의외였다.

그런데 나는 경향신문 기자가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박물관 직원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50여년간 우리가 뭘 하려 하면 미국이 방해하고 괴롭혀서 괴로웠다. 그렇지만 미국과 적대한 시간은 긴 역사에서 아주 짧은 부분이며, 흑인노예해방은 우리 같은 피식민 국가 인민이 보기엔 위대한 일이다.”(주1)

▲ 혁명박물관 안에 의외에도 에이브러햄 링컨의 흉상이 있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멕시코의 베니토 후아레스의 흉상.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남미의 시몬 볼리바르 흉상.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쿠바의 호세 마르티 흉상. [사진-임영태]

이 기사를 보면서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생각났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은 일제가 패망을 앞둔 상황에서 전민봉기를 일으켜 일본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낸다. 그리고 1945년 9월 17일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발표한 베트남의 독립선언서는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롤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는 세계를 지배하고 침략하는 제국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유와 해방, 정의의 모습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패배한 프랑스를 대신하여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았고, 베트남 전쟁의 수렁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쫓겨나는 수치를 겪었다. 이처럼 미국은 자유와 해방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베트남과 쿠바에서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벌였고, 노골적인 봉쇄 정책을 펴면서 다른 나라의 주권을 위협했다. 하지만 미국의 기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혁명박물관에는 쿠바 혁명의 모든 기록들이 정리, 전시되어 있었다. 쿠바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역사에서부터 1868년 스페인과의 제1차 독립전쟁, 1895년의 제2차 독립전쟁, 그리고 1950년대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항한 쿠바 혁명운동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집대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박물관이나 기념관, 전시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디오라마 같은 입체적인 자료들이나 상징적인 조형물 같은 것들은 거의 없고 사진과 신문 등의 언론자료가 대부분이었다.

혁명박물관에는 아무래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1950년대의 쿠바 혁명운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혁명 투쟁 과정과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 등이 사진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혁명 투쟁 당시의 전투상황이나 혁명 직전의 주요 전투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피그스만 침공과 그 격퇴 과정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자료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내용이 대부분이고, 라울 집권 이후의 자료들도 일부 정리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에 관한 자료와 내용이 가장 많았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카스트로가 중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도 상당히 부각되고 있었다. 체 게바라도 별도의 전시실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의 인기를 감안한 조치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같은 사회주의 체제지만 북한과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북한의 김책이나 최용건은 체 게바라나 시엔푸에고스가 쿠바에서 받는 만큼의 대우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북한에서는 수령 중심의 절대주의체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놓일 수 있는 위치는 분명히 제약되어 있다.

그런 점은 마오쩌둥의 절대화되고 있을 때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을 제외하고 2인자나 3인자, 또는 혁명 원로들의 존재는 그다지 부각될 수 없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보다 더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거기에 대해 쿠바 정부는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장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쿠바에서는 왜 이들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쿠바 혁명박물과 전경. [사진-임영태]

 

▲ 멀리서 본 쿠바 혁명박물관.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에서 말레꼰 해변을 바라본 광경. 저 멀리 말을 탄 막시모 고메즈 장군 동상 뒷모습이 보인다. [사진-임영태]

 

▲ 박물관 내부 건물 구조. [사진-임영태]

 

▲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철근으로 만든 혁명가의 상. [사진-임영태]


낭만적인 쿠바 혁명

나는 쿠바에서 이들이 이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일찍 카스트로의 곁에서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엔푸에고스는 혁명이 성공한 뒤 불과 9개월 뒤인 1959년 10월에 비행기 사고로 실종되면서 쿠바 현실 권력에서 사라지게 됐고, 체 게바라 또한 우리가 잘 알듯이 1967년 볼리비아 밀림에서 정부군에 잡혀 살해되면서 쿠바 정치권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게바라는 그 몇 년 전에 이미 카스트로의 옆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순교자로 처리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의 카리스마에 도전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게감 있는 혁명 동지는 사실상 없게 되었다. 몬카다 병영 습격에서부터 멕시코 망명, 그란마 호 잡입과 시에라 마에스트라 게릴라 투쟁까지 혁명의 전 과정을 함께 한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있었지만, 그는 형 피델의 그림자로서 실무를 담당했을 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부각되지 않았다. 형으로부터 권력을 공식 이양 받은 뒤에도 라울은 여전히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서 피델로서는 먼저 간 혁명동지에 대해 높은 대우를 해주면서 순교자로 만드는 것이 결코 자신에게 손해될 리 없었을 것이다. 피델은 동지에 대한 혁명적 의리를 충실히 지켰고, 그게 오히려 자신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체 게바라는 죽어서도 ‘혁명의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카스트로 역시 90세가 된 지금까지도 살아남아서 쿠바(아니 세계적인) ‘혁명의 전설’(어떤 이는 ‘혁명의 화석’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이 되고 있다. 지금은 쿠바 혁명과 건설 과정에서 오랫동안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동생 라울이 형의 뒤를 이어 쿠바 정부를 이끌고 있지만 그가 피델의 카리스마에 작은 손상이라도 가할 것 같지는 않다.

▲ 혁명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피델 카스트로 초상.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눈빛은 형형하다. [사진-임영태]

 

▲ 혁명 성공 후 기뻐하는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 [사진-임영태]

 

▲ '타도하자 바티스타'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카스트로가 손을 들고 있는 그림. [사진-임영태]

 

▲ 쿠바 여군 모습. [사진-임영태]

혁명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처럼 쿠바 혁명주체들에 대해 약간은 복잡한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쿠바에서도 혁명을 함께한 일부 세력이 이탈, 망명, 추방되는 등 잡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주의자들이거나 지식인들이라고 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쿠바에 정치범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적어도 많은 다른 나라들에서 있었던 것처럼 이른바 동지들에 대한 심각한 ‘피의 숙청’은 없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어쩌면 이것이 쿠바처럼 작은 나라가 세계 최강의 미국 코앞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든 하나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본 쿠바 사회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처럼 보였다.

물론 과거와 달리 미국과의 수교 등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쿠바는 생각보다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모습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성이 결국은 쿠바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쿠바가 미국의 봉쇄를 견디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쿠바 혁명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사실 쿠바 혁명은 어찌 보면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외적인 면이 있다. 러시아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무장투쟁이 주된 수단이었던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와도 큰 차이가 있다. 최종적으로는 수백만 명이 동원된 국공내전을 통해 종결된 중국 혁명이나 미군․한국군 등의 외국군대와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과 비교하면 쿠바의 혁명투쟁, 게릴라 투쟁은 어린아이들 장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력투쟁과 게릴라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것들과 비교될 수가 없다.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의 사진 자료들. [사진-임영태]

쿠바 혁명의 경우, 혁명군의 규모가 최대로 많을 때에도 500~600명 수준이었다. 바티스타의 정부군도 2만5천명에 불과했다. 만일 미국이 바티스타 정부군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마지막까지 적극 대응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장담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아무리 민중의 지지가 중요하고 민중의 힘에 바탕을 둔 혁명운동이라 하더라도 압도적인 물리력과 그걸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혁명이 성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은 1958년 3월가지 바티스타의 뒤에서 정부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제공했다. 하지만 혁명세력이 단결하여 공세적으로 돌아서는 상황이 되자 미국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끊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끊어지면서 바티스타 정권은 가장 중요한 버팀목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혁명군의 승리는 결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쿠바 혁명이 성취되는 과정은 낭만적이었을지 모르지만 혁명 이후 그걸 지켜내기 위한 쿠바의 투쟁과 노력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1천만 명 남짓한 인구와 작은 영토, 부족한 자원과 미발달한 산업시설을 가진 쿠바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의 봉쇄와 위협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은 말 그대로 처절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쿠바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권을 지켜내고 살아남았으며, 미국이 스스로 자신의 외교정책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스스로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고 쿠바와 수교하는 길을 선택하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 힘의 하나가 유연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약간은 막연하지만, 쿠바를 직접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쿠바를 지킨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작업을 할 능력도 내겐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쿠바는 혁명의 성과와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면서 미국과의 재수교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념과 체제 문제를 넘어선 세계 최강의 제국 미국과의 싸움에서 작은 나라 쿠바가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몇 가지 구입했다. 체의 얼굴이 들어있는 작은 장식품과 사진 몇 장을 샀다.

▲ 말을 탄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의 카스트로 집무실 모형.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기념품점.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안에 있는 기념품점. 체 게바라의 사진이 대세다. [사진-임영태]

 

▲ 혁명박물관 내 기념품 판매점의 사진들.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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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손제민, “미․쿠바도 악수하는데…서울․평양 ‘시간마저 따로’”, <경향신문>, 2015.8.14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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