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아바나의 농민시장 모습. 열대 과일을 비롯한 다양한 농산물들이 즐비했다.[사진-임영태]

농민시장에서 환전하고 과일 사기

12시 30분경, 우리는 혁명광장에서 다시 투어버스를 탔다. 버스는 한번 표를 끊으면 하루 종일 아무 곳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 수 있어 좋았다. 혁명광장에서 출발한 버스는 아바나 서쪽을 크게 돌았다. 그냥 주마간산으로 스쳐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아바나 시내 이곳저곳을 대충이라도 살펴보는 데는 투어 버스가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1시 10분경, 공동묘지를 지나 시내투어를 계속하고 있는데 가까운 도로 옆에 위치한 과일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규모가 상당했다. 우리는 그곳에 내려서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사회주의 쿠바에서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과일도 사먹고 외국인 관광객이 사용하는 쎄우쎄(CUC) 대신 보통 모네다로 불리는 현지화폐인 쿠바페소(CUP)도 한번 바꿔서 사용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꽤 큰 농민시장이었다. 열대 과일을 비롯한 다양한 농산물들이 즐비했다. 고구마, 호박, 토마토, 망고, 파파야, 바나나, 파인애플, 수박, 팥, 콩, 마늘, 생강, 파프리카, 양배추, 옥수수, 양파, 당근, 오이, 마늘쫑 등등 쿠바에서 나오는 과일과 채소는 거의 다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잎채소는 거의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상추나 배추, 양상추, 양배추 따위 우리가 즐겨먹는 잎채소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잎이 금방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시장에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아예 재배를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쿠바인들은 잎채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상추는 쿠바에서도 얼마든지 재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추는 대표적인 여름 채소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비날레스에 가서 양배추는 보게 되지만 아무튼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쿠바 정부는 1994년 10월부터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농민시장에서 자유판매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전국 각지에 직판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아마 이곳도 그런 농민시장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격은 자율에 맡기면서 농업부와 국내산업부가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잘 될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시장이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의 메카니즘에 따라서 굴러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농민시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쿠바에서 농민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그런 구조적인 문제는 정부 관계자나 학자들, 이와 관련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좋지만 우리는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냥 밑바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를 듣고 짐작해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래도 사회주의체제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일반적인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쿠바의 경우에도 일정하게 짐작 가능한 부분은 있다. 

농민시장은 쿠바페소(CUP)로 거래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쎄우쎄 화폐밖에 없어서 농민시장의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돈을 바꿔야 했지만 환전소는 보이지 않았고, 상인들은 쎄우쎄(CUC) 화폐는 받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달러를 쿠바 화폐 쎄우쎄(CUC)로 교환해서 다시 쿠바페소(CUP)로 바꿔야 했다. 공식적인 환전소는 없었으나 뜻밖에도 시장 안에서 환전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시장 입구 바깥에서 한 노인이 은밀하게 돈을 바꿔주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환전 암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슬쩍 물어보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간단한 영어단어와 몸언어로 소통이 되었다. 하지만 환전은 그 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주고 있었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 첫 번째 좌판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 인물이 그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미화 100달러에 87꾹(CUC)을 받았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바꿔주었다. 처음 그는 그보다 낮은 가격을 불렀지만 우리가 공항에서 87꾹에 바꿨다고 말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내주었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암거래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는 달러도 환전하고, 외국인이 사용하는 쿡(CUC)을 내국인 화폐 모네다(CUP)로 교환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지화폐인 모데다로 망고와 바나나를 얼마간 샀다. CUC와 CUP의 비율은 1대 24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불과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복수박만한 크기의 망고 2개를 샀으며, 바나나도 상당히 큰 덩어리를 엄청 싼 가격에 샀다. 우리가 한국에서 보통 바나나 한 덩이에 4, 5천원을 주고 산다면, 그 시장에서 우리가 산 바나나 값은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4, 5백원 정도였을 것이다. 10분의 1 가격인 셈이다.

▲  투어 버스에서 본 아바나 시내. 신도시다. [사진-임영태]

 

▲ 투어 버스에서 본 아바나 시내 여러 모습. [사진-임영태]

 

▲ 투어 버스에서 본 아바나 시내. 노점상들이 즐비해 있다. [사진-임영태]

 

▲ 투어 버스에서 본 아바나 시내. 아바나에는 이처럼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이 많다.[사진-임영태]

 

▲ 투어 버스에서 본 아바나 시내 건물. 아파트와 비슷하다. [사진-임영태]

 

▲ 농민시장 모습. [사진-임영태]

 

▲ 농민시장에서 파는 과일들. 고구마, 호박, 토마토, 망고, 파파야, 바나나, 파인애플, 수박, 팥, 콩, 마늘, 생강, 파프리카, 양배추, 옥수수, 양파, 당근, 오이, 마늘쫑 등등 쿠바에서 나오는 과일과 채소는 거의 다 있는 듯했다. [사진-임영태]

동네 식당과 열대성 스콜 체험

농민 시장 구경을 한 뒤 점심 점심식사 할 곳을 찾았다. 다시 시장 옆에서 환전상과 연결시켜준 그 노인에게 식당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식당 바로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식당까지 걸어가는 데 최소한 200미터는 넘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그냥 대략 손짓으로 방향만 알려주었을 텐데 말이다.

쿠바에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매우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올라(안녕하세요)!’하고 한 마디만 건네면 금방 환하게 미소 지으며 ‘올라’라고 답한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인사를 하면 반드시 답변해 준다.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쿠바인들은 뭘 물어보면 그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경찰관들도 매우 친절했다. 우리 숙소가 있던 올드 아바나에는 경찰관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많고 밤늦게까지 술집이 문을 열기 때문인 듯 했다. 한번은 우리가 골목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경찰관에게 물었더니 그 역시 손짓으로만 가르쳐주지 않고 직접 앞장서서 그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쿠바에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아직 때가 묻지 않았고 순박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쿠바에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상륙해도 이들의 순박함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자본이 들어오고 시장경제가 본격화되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아마 이들도 변하겠지?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이기적인 인간으로.

노인이 안내하는 곳을 따라가니 동네 가정집 옆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막 식당에 들어서는데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열대성 스콜이다. 비는 무섭게 쏟아 붙는다. 그 바람에 비가 들이쳐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실내로 들어가야 했다. 실내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서 시원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날 무렵 비는 뚝 그쳤다. 언제 비가 왔나 싶게 하늘이 쨍쨍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생선요리와 쌀밥, 팥죽, 스파게티 등을 시켰다. 맥주도 3병. 여기서는 물 대신 맥주를 먹는 게 차라리 낫다. 정말이지 쿠바 물맛이 너무 없다. 멕시코 물맛도 별로였지만 쿠바와 비교하면 정말 양반이었다. 솔직히 말해 쿠바 물맛은 밍밍함을 넘어서 느끼할 지경이다. 시원하면 그래도 나은데 미지근한 물은 정말 먹기 싫다. 할 수 없이 맥주를 마시든지 음료수를 먹는다. 물값이나 맥주값이나 그게 그거다. 오히려 물값이 더 비싼 데도 많다. 점심 식사비용은 꾹(CUC)으로 지불했다. 흔히 하는 말로 ‘착한 가격’이었다. 맥주를 포함한 네 사람의 식사비용이 20꾹(25,000원)이 채 안 됐다.

식사 후 차를 타러 가던 중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아니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단정 지어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가게로 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것을 시켰다.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알고 보니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엄청 단 맛이 강한 크림케익(빵)이었다. 한 입 먹어보고 모두들 고개를 젓는다. 나는 비교적 단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식후인데다가 너무 더워서 더 이상 먹을 엄두를 못 냈다. 그래도 나는 그걸 어떻게 해서라도 다 먹을 요량으로 비닐봉지에 넣어서 숙소로 가져왔다. 하지만 숙소 냉장고에 넣어둔 그 케익은 결국 다 먹지 못했다.

다시 투어버스를 타고 시내투어를 계속했다. 버스가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때 길 건너 사거리 코너에 있던 경찰관 한 명이 신호를 위반하고 길을 건너온 오토바이를 잡는다. 오토바이 뒤에는 아줌마가 타고 있다.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차 위에서 바라보니까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오토바이 운전자가 공세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결국 그가 이겼다. 경찰관이 포기하고 돌아서 간다.

경찰관은 신호위반 벌금을 물리려고 했을까? 운전자가 우기니까 경찰이 포기했을까? 이거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아니야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 나도 20년 전 교통신호 위반에 걸렸다가 좀 봐달라고 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지. 하지만 우기면 어김없이 보복성 징벌이 가해지는 게 우리나라 경찰의 행태다. 쿠바에서는 좀 다를까? 아니면 쿠바의 그 오토바이 운전자도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혹시 뇌물(돈)을 줬나?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호가 바뀌면서 버스가 다시 달린다.

▲ 우리를 식당까지 안내해 준 노인. [사진-임영태]

 

▲ 우리가 점심을 먹은 동네 식당. 생각보다 아주 깔끔하고 맛도, 가격도 좋았다. [사진-임영태]

 

▲  신호에 걸린 오토바이 운전자와 실랑이 하는 경찰. [사진-임영태]


아바나 시내에서 만난 인상적인 공동묘지

시내버스 투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대한 공동묘지 구역이다. 투어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도 계속될 만큼 공동묘지의 규모가 컸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는 그 전체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버스 위에서 아무리 전체를 보려고 해도 도저히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대체 저 공동묘지가 어떻게 조성된 것이며 누구를 묻었는지 궁금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아마도 가톨릭에서 조성한 공동묘지를 혁명 후에도 그냥 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쿠바 여행 전 아바나에 먼저 왔던 선배로부터 이 공동묘지 이야기는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거대한 공동묘지가 아바나에 있다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결코 선배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았더니 공동묘지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아바나 시내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이 공동묘지는 ‘세멘테리오 콜론’묘지. 세계 4대 공동묘지의 하나인 세멘테리오 콜론 묘지의 면적은 135에이커. 1에이커는 약 1224평이므로 16만평이 넘는 엄청난 크기다. 여기에 200만 개가 넘는 묘가 들어서 있다고 한다. 그러니 투어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달려야 다 볼 수 있을 지경이었던 것.

이 묘지는 크기뿐만 아니라 내부가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묘지를 장식한 조각상들이 예술품 못지않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공동묘지가 아니라 거대한 조각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 묘지는 관광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지역이 되었고, 그 때문에 쿠바 정부는 묘지 입장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투어버스를 타고 가면서 볼 때는 가톨릭이나 가톨릭 공원묘지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전직 대통령의 묘소도 있고,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술집 ‘플로리디타 바’에서 근무한 바텐더의 묘소도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공동묘지의 가운데쯤에 있는 쿠바의 초대 대통령 세스페데스의 묘지보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흑인 바텐더의 묘가 더 화려하다는 것.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 화려한 묘지 주인공은 헤밍웨이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50년대는 헤밍웨이의 전성시대였는데, 그는 이 시절 아바나에 있는 별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는 1953년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무대와 주인공은 모두 쿠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

이 무렵 헤밍웨이의 아바나 단골 술집 중에 ‘플로리디타’라는 바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이 바의 구석 자리에 자주 앉아서, 자신이 낚은 고기 자랑을 신나게 하면서 칵테일을 마시곤 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에서 일하던 늙은 흑인 바텐더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 흑인 바텐더가 단골손님 헤밍웨이를 위하여 새로운 칵테일을 하나 개발했는데, 그게 바로 다이키리(Daiquiris)이다. 이 칵테일은 얼음을 갈아 만든 빙설에 럼과 사탕수수즙, 레몬을 넣고 만들었는데, 이걸 맛본 헤밍웨이는 그때부터 다이키리만 마셨다고.

소문이 나자 미국 관광객이 쿠바의 플로리디타 바로 몰려들었다. 미국인 부호들은 다이키리 한 잔 마셔보지 못하면 쿠바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들은 흑인 노인이 직접 만든 다이키리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섰고, 그 바람에 바 주인보다 가난한 흑인 바텐더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다이키리 한 잔 값은 50센트였지만 팁으로 열 배, 스무 배의 돈을 받았던 것.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흑인 바텐더는 플로리디타 바를 사고 그 옆에 있는 식당까지 사버렸다. 그러니까 세멘테리오 콜론 공동묘지의 대통령 묘 옆에 있는 크고 화려한 묘의 주인이 바로 이 흑인 바텐더의 묘라는 것이다.

그러나 콜론 묘지의 조각들이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소박한 조각마다 다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소방관이 오기 전 불을 끄다 죽은 31명의 용감한 주민이 조각된 것도 있고, 가슴 아픈 모자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한다.(주1) 인간 세상을 살다가 사람들의 무덤에는 저마다 작은 사연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내용들을 접하고 나니 그 공동묘지에 한번 들어가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서울시내 한 복판에 이처럼 거대한 공동묘지가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장례문화도 다르고 묘지 모습도 다르기에 쿠바인들은 묘지라기보다는 공원처럼 대하며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라면 장례문화가 문제가 아니라 시내 요지에 있는 땅을 개발하지 않고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개발업자들의 손에 의해 묘지는 변두리나 한적한 시골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고 말았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토지가 국가소유이니 그렇게 비싼 땅이라고 해도 마구잡이로 개발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주의 쿠바는 그랬더라도 만일 100년쯤 흘러 쿠바가 자본주의로 바뀐다면 그때도 그 묘지는 그대로 있을까? 하긴 쿠바는 우리나라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으니 상황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 쿠바 시내투어에서 본 거대한 공동묘지 입구 건물. [사진-임영태]

 

▲ 공동묘지에 있는 교회. [사진-임영태]

 

▲ 시내투어에서 본 거대한 공동묘지 모습. [사진-임영태]

 

▲ 잘 정돈된 묘지. [사진-임영태]

 

▲ 세계 4대 공동묘지의 하나인 세멘테리오 콜론 묘지의 면적은 135에이커. 16만평이 넘는 이 묘지에 200만 개가 넘는 묘가 들어서 있다고 한다.[사진-임영태]


쿠바가 자본주의에 익숙해지려면

우리가 투어버스를 타고 중앙공원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 뒤 환전소를 찾았다. 숙박비도 지불해야 하고 시내 관광을 하면서 들어가야 할 돈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신용카드가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모두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환전소를 찾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헤맸다. 여기저기서 물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나중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다닐 때는 곳곳에 환전소가 보이더니 막상 이렇게 찾으려고 하면 도무지 안 보인다. 한참을 헤매다가 센트로 아바나 지역에서 가까스로 은행을 한곳 찾았다.

그런데 환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직원들의 일처리가 세월아 네월아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돈 바꿔주는 직원의 실력이 우리나라의 중학생 수준이다. 직원은 각기 다른 단위의 화폐를 넣은 봉투에서 돈을 꺼낸 다음 일일이 봉투에 적어 놓은 액수를 지우고 다시 써넣는다. 계산기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계산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아마도 우리는 환전소에서 거의 한 시간은 소모했을 것이다.

갑자기 쿠바가 경제개방을 본격화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회계 공부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직원들에게 암산능력이나 복식부기 따위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계산기나 컴퓨터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환전소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숙소 바로 옆에도 은행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환전을 해보니 일사천리로 금방 해결되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그날 그 직원이 다른 일을 보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환전 후 센트로 아바나에서 올드 아바나로 이어지는 시내를 구경했다. 날씨도 덥고 물맛도 그렇고 해서 그런지 모두들 지쳐있다. 그때 교수님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을 수가 없다. 커피나 음료수,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길거리의 작은 가게들은 종종 보이는데 그놈의 아이스크림 가게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걸 찾다가 마침내 짜증이 나려고 한다.

우리들은 결국 아이스크림을 포기하고 그냥 길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센트로 아바나에서 올드 아바나로 이어지는 거리 가운데 가장 번화한 오비스뽀 거리를 걸었다. 우리의 명동거리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렇게 화려한 번화가가 아니라 하나의 긴 골목길일 뿐이다. 중앙공원에서 비에하 광장까지 연결되어 있는 긴 골목길로 대략 2킬로미터쯤 될까? 그 골목 좌우에 상점과 오래된 유명 건물들이 즐비하게 있다.

상점 몇 군데에 들렀으나 물건도 별로 없고 먹을 만한 간식거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주스를 한잔 사먹었다. 생과일주스인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가루주스를 탄 맹탕이다. 1꾹을 줬는데 완전히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내를 구경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더 이상 이렇게 대책 없이 돌아다니다가는 모두들 탈진할 지경으로 날씨가 더웠다. 숙소에 돌아오니 주인아저씨가 반색을 하며 우리를 맞아준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금방 망고주스 4잔을 내온다. 아, 맛있는 망고주스다. 약간 미지근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한잔 쭉 들이켜고 나니 살만하다.

▲ 센트로 아바나의 이모저모. [사진-임영태]

 

▲ 센트로 아바나의 이모저모. [사진-임영태]

 

▲ 서울의 명동거리 격인 아바나의 오비스뽀 거리. [사진-임영태]

 

▲ 오비스뽀 거리에서 기념품을 파는 쿠바 여인들. [사진-임영태]

 

▲ 오비스뽀 거리 선물 가게 모습. 체 게바라는어디에나 있다. [사진-임영태]

 

▲ 기념품 가게. [사진-임영태]

말레꼰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간단히 샤워를 하고 한숨 돌린 다음, 우리는 마이클이 일하는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말레꼰 해변에 위치한 맥주집이라고 한다. 우리는 마이클이 그려준 약도를 보고 걸어서 찾아갔다.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50분 이상을 걸었다. 우리가 집을 나서고 얼마 뒤부터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변가를 따라 갔기 때문에 종종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다. 식당에 가는 동안 한낮처럼 날씨가 쨍쨍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우리가 이런데 70대의 교수님은 말해 무엇할까.

▲ 우리는  바닷가에 접해 있는 마이클이 근무하는 맥주집에 가서 긴 파이프형 피처를 시켰다. [사진-임영태]

마이클이 근무하는 맥주집은 바로 바닷가에 접해 있었다. 아니 바다위에 서 있는 건물 위에 떠 있었다. 배처럼 지은 건물에 있는 대형 맥주집이었던 것. 중앙에는 홀이 마련되어 있어 춤도 출 수 있게 돼 있었다. 홀 근처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인 모양이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긴 파이프형 피처를 시켰다. 2500CC짜리. 랍스타 요리 2개를 안주로 시켰다. 마이클을 생각해 매상도 올려야 하고, 또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약간 그럴 듯한 걸로 시켰다. 랍스타는 그다지 크지 않다. 이 대표는 랍스타를 꼭 먹어야 한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기대만큼의 맛은 아니었다. 생맥주 맛은 좋았다. 그곳에서 즐겁게 환담하며 맥주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 동안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 말레꼰 해변의 이 모습 저 모습. [사진-임영태]

 

▲ 저녁이 되자 말레꼰 해변에 나와 휴식을 취하는 아바나 시민들. [사진-임영태]

 

▲ 우리가 지나가자 "올라" 하며 인사를 건네는 쿠바인들. [사진-임영태]

 

▲ 말레꼰 해변 선착장. [사진-임영태]

 

▲ 말레꼰 해변의 연인. [사진-임영태]

우리는 숙소로 돌아올 때도 걸어서 왔다. 오는 길에 여기저기 올드 아바나의 밤거리와 골목길, 광장과 건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걷기로 했다. 아무래도 교수님이 힘들었을 텐데 별로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저녁이어서 선선한 때문에 몸은 지쳐도 견딜 만 했던 것 같다.

숙소에 들러 교수님은 쉬고, 세 사람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날씨가 더워서 나는 부채를 부치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쿠바 여인이 나에게 말을 건다. 처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으나 곧 그녀가 내 부채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 부채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 부채는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서울의 신길역 지하철 노점상에서 3천원을 주고 한 접이식 부채였다. 그냥 주어도 크게 아까울 것은 없었지만 선뜻 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날씨도 어지간히 더워 길거리에서는 부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쿠바의 그 여인은 거의 30미터 가량을 따라오면서 내 부채에 관심을 보였으나 나는 끝내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부채는 여행 끝까지 사용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사용했으나 이 글을 쓸 때쯤엔 거의 수명이 다 돼 가는 상태다. 지금도 이 부채를 보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 오비스뽀 거리의 한 술집에서 시킨 모히또. 럼주에 허브와 레몬 향, 그리고 설탕이 들어간 맛이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한다. [사진-임영태]

 

▲ 쿠바인들은 음악만 나오면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사진-임영태]

우리는 오비스뽀 거리를 헤매다 음악이 나오는 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모히또를 한잔씩 마셨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이 별로다. 럼주에 허브와 레몬 향, 그리고 설탕이 들어간 맛이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예상에 못 미치는 맛이다. 이곳 사람들은 칵테일을 좋아하지만 안주와 함께 마시는 소주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는 잘 안 맞는다. 차라리 맥주를 마시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맥주를 시켰지만 맥주가 없단다. 왜 맥주가 없을까? 오늘의 공급물량이 다 떨어져서 그런가? 우리는 결국 11시 좀 못 미쳐서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문자를 보내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 핸드폰이 용량이 부족하다고 계속 메시지가 뜬다. 이것저것 지우며 가까스로 정리한다. 핸드폰에도 사진이 많이 저장돼 있는데 할 수 없이 일부를 지워야 했다.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으니 어디 다른 곳에 저장할 방법도 없고, 안타깝다. 핸드폰 용량이 4기가밖에 안 돼서 제한적이다.

글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가운데 꼭 필요한 것도 여러 장 지운 게 있다. 아쉽다. 최근에도 나는 진안 마이산에 가서 사진을 잔뜩 찍었는데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 일부를 지우려다가 사진을 몽땅 다 날리고 말았다. 자책 했으나 소용이 없다. 빨리 용량이 큰 놈으로 핸드폰을 바꿔야 되겠다.

한편, 나는 사진기 배터리가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칸쿤에서 건전지를 많이 사왔지만 ‘그래도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돌아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물 한 병 사기 위해 쇼를 해야 했다. 아이스크림 사 먹을 곳도 없다. 간식거리 사 먹을 데도 없다. 낮에 거리에서 식사할 곳도 마땅치가 않다. 상점은 있지만 물건이 별로 없다. 물과 맥주도 어디서 파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이클에게 물어도 제대로 안내를 못해준다.

이제 겨우 하루를 지냈지만 쿠바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쿠바의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배급체계나 생필품 공급은? 국영부문과 사적부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자유시장, 암시장, 국영경제, 그리고 공산당의 역할은? 공산당원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는 쿠바 여행을 통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부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동안 획득한 간접지식과 경험, 느낌으로 내 생각을 일정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 저녁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만난 거리 풍경. [사진-임영태]

 

▲ 군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소년이 쉬고 있는 우리 일행 주변을 맴맴 돌고 있다. [사진-임영태]

 

▲ 체 게바라는 벽에도 있다. [사진-임영태]

 

▲ 선술집. 아바나는 밤이 되면 술집들이 붐비기 시작한다. [사진-임영태]

 

▲ 아바나 아르마스 광장. [사진-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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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콜론 공동묘지와 관련된 내용은 “도용복의 라틴기행 <2> 아름다운 묘지, 아바나의 콜론”, <국제신문>, 2013.1.24(인터넷검색-2015.8.12) 참고하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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