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가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추하지 않게, 개나 돼지와 다르게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보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개와 돼지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우리가 개, 돼지와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표현상의 문제로 항상 개와 돼지에겐 미안하게 생각한다.

▲ 강수돌, 『팔꿈치 사회』, 갈라파고스, 2013.4.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이다. 아주 예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적도 있다. 당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멍청한 머리로 인해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적어도 그때의 느낌은 남아있다. 여느 그렇고 그런, 한심한 교수와는 다른 분이라는 점. 강수돌 교수는 삶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매우 힘이 센 분이다.

그가 책을 펴낼 때마다 가능하면 챙겨두고 읽으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전부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은 간결하고, 거짓이 없으며,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기에, 나에겐 고마운 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책, 그런 글, 사실 찾기 그리 쉽지 않다.

‘팔꿈치 사회’는 독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표현이라 한다. 팔꿈치로 옆 사람을 누르고 앞으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경쟁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자타가 공인하는 팔꿈치 사회다. 아예 그 팔꿈치에 날카로운 창이나 칼을 덧붙인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우리는 경쟁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사물을 인식하고 아주 초보적이나마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치열한 레이스에 돌입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무한경쟁의 도가니에 빨려 들어가 제일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젊음의 시절을 고통과 좌절, 분노의 시간으로 보낸다. 도대체 언제 주어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사실 그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는, ‘개인의 안정’을 위해, 젊음을 빼앗긴다.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질 것은 없다. 또 다시 경쟁, 또 경쟁. 그러다 낙오되면, 철저히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일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게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연대와 공감보다는, 이기주의와 온갖 속임수가 우대 받고 칭송 받는 시대. 사기꾼의 시대, 협잡의 시대, 불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밑바탕에는 경쟁이라는 룰이 자리 잡고 있다.

강수돌 교수는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조차 협동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경쟁(Competition)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함께 추구하는 것, 그것은 결코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직접 행동하고 있는 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잔인하고 무의미하고 결국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경쟁에 인생 전체를 갖다 바치며, 기계의 부속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정답은 명확하다. 자신의 몸집을 끝없이 불리기 위해 자본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자의반 타의반 끌려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별 의미가 없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의 과정이나 결과는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경고한다. 인간이 없는 사회, 즉 우리 모두가 사라진 사회에서,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극소수의 기득권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모습.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의 경쟁이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연대의 본능, 협동의 본능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서로 도우며 연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는 비정상적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살아온 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고작 몇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경쟁은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경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과연 이것이 불멸의 존재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본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미미한 존재는 물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이미 경제적 성장의 한계는 뚜렷하다. 애초 무한성장이란 것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 당연히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손해를 보는 대상이, 피해를 입는 대상이 저개발 국가인지, 아니면 자연 그 자체,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인지, 그것만 다를 뿐이다. 잘난 경제학자들이 떠드는 것 중 그나마 유효한 것 하나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 그것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어마어마한 전염병으로 이미 수 십 년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 대신 이익을 얻은 것은 그들에 비해 극소수에 불과한 몇몇 이익집단, 기업가 그리고 자본의 주인들일 뿐이다. IMF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송두리째 바뀌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세월호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여전히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 바로 그 이유에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치명적인 병균이 자리 잡고 있다.

무책임이 당연한 사회, 몰상식, 몰염치한 사회에서 애초 세월호의 진상을 밝히라는 호소는 허무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세월호 비극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권력을 누리며, 오히려 유가족들을 탄압하고 모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참혹한 현실 속에는 무한경쟁, 경쟁사회라는 비정상적 시스템이 근원적으로 깔려 있다. 이를 깨부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세월호를 바다 속에서 꺼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더 이상 피라미드형의 사다리 질서가 아닌, 모두가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는 ‘원탁형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을 외치는, 전혀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 집단들의 광기와 무지를 보며, 이러한 기형적 뒤틀림의 근원 속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그것이 변태적으로 진화하여 지금의 경쟁 논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거기에 자본이라는 악마가 다시 붙고, 추악한 욕망이 붙고, 권력이 사적으로 이용하고...

체념하고 싶은 세상이다. 배우 김부선 씨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 행사와 투쟁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며, ‘대한민국, 졌다 졌어’라고 한탄했다. 나도 GG를 누르고 싶다. 이미 나라임을, 공동체임을 포기한 모습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누를 수 없다. 이 지긋지긋하고 애틋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여전히 난 모두가 둘러앉아 함께 밥을 나눠 먹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밥 한 번 먹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책, 함께 나눠야 할 책이다. 세상도 어서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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