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치첸이트사에서 만난 쿠쿨칸의 피라미드. [사진-임영태]

치첸이트사 행 고속버스를 타다

6월 14일 일요일 아침 7시, 우리는 숙소 주위를 돌아본 뒤 터미널 앞에서 환전을 했다. 미화 1달러에 멕시코화 18.4페소. 7시 30분, 호텔로 가서 두 분 짐을 숙소 2층 우리 방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 숙소 3층에 방이 빈다고 해서 전날 밤 예약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방의 체크아웃은 12시나 되어서야 하겠지만 우리는 8시 30분이면 마야 유적지가 있는 치첸이트사(chichen itza) 행 버스를 타야한다. 우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유적지 구경을 끝내고 돌아올 것이다.

아침 식사는 터미널 앞에 있는 가게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음료수로 간단히 해결했다. 패스트푸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배는 채워두어야 했다. 모두들 느끼한 멕시코 현지음식보다는 그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위해 샌드위치와 바나나, 사과, 물 등을 준비했다. 여행 가이드 책자에서는 치첸이트사에는 레스토랑이 하나밖에 없고,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했던 것이다.

▲ 우리를 태우고 갈 아데오(ADO) 고속버스. [사진-임영태]

 

▲ 고속버스와 실내모습. [사진-임영태]

8시 45분 치첸이트사 행 아데오(ADO) 버스에 탑승했다. 치첸이트사는 칸쿤에서 205킬로미터 남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버스로 3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 ADO버스는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시설도 좋았다. 버스 안에는 화장실도 있었지만 나는 사용해 보지는 못했다.

전날 마지막에 표를 끊은 탓에 우리 좌석은 제일 뒤쪽 바로 화장실 옆이었다. 그러나 냄새 같은 것은 전혀 나지 않았다. 멕시코는 장거리를 뛰는 고속버스 노선이 발달해 있고, 버스 시설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감이 갔다. 버스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고, 밤을 새워 달려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좌석도 편안했다.

버스는 터미널을 출발한 뒤 북쪽(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남서쪽이었음)을 향해 달렸다. 칸쿤에서 메리다 가는 일방통행 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추월하는 차도 없고 오는 차도 가는 차도 거의 없어서 한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에 이 길에 ‘대통령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길옆은 열대 숲이다. 밀림 속에 길이 쭉 뻗어 있다. 하지만 차 안에서는 그 열대 숲이 어떤 모양인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반대편 차선도 볼 수가  없게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심하다.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폭우가 그냥 쏟아져 내린다. 흔히 말하듯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다. 차들이 별로 없기에 망정이지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처럼 통행량이 많으면 교통사교 위험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든다.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이 대표가 걱정을 한다. “비가 이렇게 오면 이거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내가 말한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곳은 또 다를지 모르지요.”1시간쯤 달리니 이정표가 보이고 교차점이 나타났다. 버스는 유카탄 반도의 중심 도시인 메리다 방향으로 계속 달린다. 고속도로를 1시간가량 더 달린 뒤 교차점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다. 국도라고 하지만 도로가 쭉 뻗어 있고 포장도 잘 돼 있다. 그래도 주위를 지나는 차량과 마차 때문에 속도는 60킬로 이하를 유지했다.

잠시 뒤 시골마을이 나타났다. 우리의 작은 읍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발라돌리도(Valladolido)라고 하는 곳이었다. 그곳 버스 터미널에서 잠시 쉬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에도 가고 터미널 주변 거리도 간단히 둘러보았다. 사진도 한 장 찍었다. 10분 뒤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계속 국도를 달렸다. 길은 고속도로와 크게 차이가 없다. 다시 1시간쯤 달렸을까? 드디어 치첸이트사다. 출발한 지 3시간 정도 걸려서 11시 50분경 치첸이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곳곳에 대형 관광버스와 아데오 버스, 승용차가 주자해 있다. 이미 비는 그친 상태다. 비가 내린 뒤여서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지만 날씨는 덜 무더웠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표를 샀다. 1인당 220페소(한국돈 17,600원).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체첸이샤의 입장료가 이렇게 비싼 것은 유카탄 주정부와 국립인류문화연구소에서 2중으로 입장료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주1)

▲ 칸쿤에서 치첸이트사 가는 길(구글지도). [사진-임영태]

 

▲ 치첸이트사 유적지 입구. [사진-임영태]

 

세계 7대 불가사의와 대면하다

‘치첸이트사’는 마야어로 “우물가에 사는 이트사족의 집”이란 뜻으로, 유카탄 최대의 ‘세노테’(성스러운 우물)가 있던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치첸이트사는 피라미드와 볼 경기장, 전사의 신전, 솜판틀리, 제단, 천문대, 시장 등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대한 도시로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다. 마야족의 하나인 이트사족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해 6세기경부터는 번성했다. 9세기경에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10세기경 톨텍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한다.

치첸이트사 유적지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마야문명의 랜드마크인 ‘쿠클칸의 피라미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에 비하면 초라하다’는 평가가 적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오티우아칸에서 만난 태양의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언뜻 보아도 정교함이나 예술적 감각은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규모의 측면보다는 이 피라미드의 중요성은 과학성에서 찾아진다. 9세기 초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는 동서남북으로 크게 놓인 계단이 인상적이다. 사방이 각각 91개로 된 4면의 계단에 정상 계단 하나를 더하면 365개가 된다고 한다. 1년을 의미하는 숫자다. 마야족은 500년 무렵에 이미 1년을 365일로 계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손뼉을 치면 그 울림이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반향되어 들리는 것도 신기한 일 가운데 하나다. 치첸이트사는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2007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됐다.

마야인들은 금속기구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런 건축물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문자 체계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는 마야의 높은 건축 기술과 수학, 천문학, 과학기술 수준을 한눈에 보여준다. 이 건축물은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처럼 중심축이 북동과 남서쪽으로 기울었는데, 태양이 정확히 정동쪽에서 뜨고 지는 날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쿠쿨칸(kukulkan)의 머리 부분에는 모서리 그림자가 피라미드 한쪽 끝 부분에 있는 뱀 머리 모양 조각에 연결되어 있다. 해가 뜨면 그 그림자가 마치 뱀이 꿈틀대며 하강하는 모습이 연출된다는 곳이다.

▲ 치첸이트사에서 만난 쿠쿨칸의 피라미드의 아래에서 올려다 본 모습. [사진-임영태]

 

▲ 치첸이트사에서 만난 쿠쿨칸의 피라미드의 측면 모습.[사진-임영태]

 

▲ 치첸이트사에서 만난 쿠쿨칸의 피라미드의 뒷면 모습.[사진-임영태]


전사의 신전과 공놀이 경기장 그리고 천문대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좌측에는 인신공희 장소인 ‘전사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래쪽으로 돌기둥이 줄지어 섰는데 아직 그 용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모두 합하면 천여 개나 된다는 수많은 돌기둥은 그 횡과 열이 정확이 맞아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신전 상단 중앙에는 누운 사람 모습의 ‘착몰상(Sculpture of Chaac Mool)’이 있다고 하는 데,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착몰상은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도 보았다. 그곳에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올려놓았다고 전해진다.

전사의 신전 옆에는 1천여개의 돌기둥이 남아 있는 기둥 신전과 아픈 사람들을 정화하거나 의식을 치르기 전 사용했던 증기탕 자리와 시장터가 남아 있다.

▲ 전사의 신전. [사진-임영태]

 

▲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만난 착몰상. 전사의 신전 중앙 상단에도 있는데,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 중간 형태를 보여준다. 그 배 위에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올려놓았다고 알려진다. [사진-임영태]

 

▲ 기둥 신전. [사진-임영태]

 

▲ 기둥 신전. 돌기둥만 1천여 개가 넘게 남아 있다. [사진-임영태]

마야 유적마다 발견된다는 고무로 만든 공놀이(스페인어로 ‘후에고 데 펠로타’라고 함) 경기장 전경도 놀랍다. 마야인들은 공놀이를 즐겨 곳곳에 이런 경기장을 만들었는데, 이곳 경기장이 마야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장 큰 경기장이라고 한다. 스콜이 신나게 쏟아진 다음 사방이 돌벽으로 쌓여 있는 이곳 경기장을 살펴보았다. 축구장보다는 작지만 어지간한 작은 야구장 규모는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도 멕시코 시골마을에서 ‘울라마’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공놀이는 손과 발을 쓰지 않고 허벅지와 엉덩이뼈 부분으로만 고무공을 쳐 보내 링에 넣는 경기다. ‘울레’라고 불리는 이 고무공은 축구공보다 약간 작은데 고무를 다져서 만들어 매우 단단하고 무거운데, 경기 도중 공의 속도와 무게감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적어도 10년 정도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니 놀랍다.

이 경기장 한쪽 벽면에 매달린 골대가 보인다. 이 경기에서 우승한 편의 주장은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하는 경기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패배한 쪽이 아니라, 승자 쪽이 제물로 바쳐졌을까? 그렇다면 누가 이기려고 기를 쓸 것인가?

하지만 당시 마야인의 사고로는 제물은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것이 바쳐져야 했고, 그래서 공놀이에 나서는 전사들은 경기에 승리해 영광스럽게 제단에 목숨을 바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사고로는 여전히 이해되기 힘든 일이지만 그 당시 그들의 사고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을 것이다. 역시 인간이 시대를 뛰어넘은 사고를 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경기장 옆 주변에는 인신공양에 쓰인 자들의 해골을 쌓아올렸던 ‘쏨판똘리나’를 비롯하여, 독수리와 재규어의 제단, 금성의 제단 등이 있다. 이곳이 도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 공놀이 경기장 모습. 오른쪽 벽에 공을 넣던 돌로 만든 링이 보인다. [사진-임영태]

 

▲ 경기장 외부 모습. [사진-임영태]

 

피라미드에서 남쪽으로 10여분쯤 걸어 들어간 숲속에서 마야의 천문대 ‘카라콜’을 만났다. 고대 마야인들이 태양과 달, 금성 등을 관측했던 둥근 돔 모양의 천문 관측대라고 한다. 10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도 이곳이 천문관측소라해도 믿길 정도로 단번에 느낌이 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경주의 첨성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지금의 천문대 건물이 생각날 정도로 주변의 석축물들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정밀한 천체관측 기록을 남긴 마야인은 근대 이전에 가장 정확한 달력을 제작했다고 한다.

▲ 천문대 유적 모습. [사진-임영태]

 

▲ 옆면에서 찍은 천문대 모습. [사진-임영태]

 

치첸이트사의 유적들을 보면 마야인들이 정확한 수학적 능력과 정교한 건축기술을 가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놀랍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이 같은 놀라운 축조물을 만든 이들은 왜 홀연히 이곳에서 사라졌던 것일까?

길을 잃고 호텔로 들어가다

우리들은 치첸이트사의 랜드마크인 ‘쿠쿨칸 피라미드’을 관람한 후 오른편 숲길을 따라 들어가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유적을 관람했다. 유적이 있는 곳마다 원주민 기념품 판매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다양한 모양의 탈과 재규어 소리는 내는 악기, 돌 신상, 모자, 나무조각품들 등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직접 나무를 깎아 가면(탈)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 노점상에서 우리는 재규어 울음소리가 나는 악기를 하나씩 기념물로 샀다.

▲ 유적지의 기념품 노점상. [사진-임영태]

 

▲ 노점상의 다양한 기념품들. [사진-임영태]

 

▲  나무 가면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 그는 과연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을 벌고 있을까. [사진-임영태]

교수님과 원장님도 흙으로 구운 공예품과 가면상 등의 기념품을 몇 가지씩 샀다. 그런데 교수님이 이곳에서 산 기념품이 나중에 모두 부서지고 말았다. 흙으로 빗어 구운 멕시코 인형들이었는데 모두 목이 부러져 못 쓰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상인이 처음 부른 가격의 절반에 샀는데 그래서 그랬을까? 그걸 버리지도 못하고 끝까지 가져왔는데, 돈보다 기념과 추억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교수님은 기념품을 살 때 각기 다른 노점상으로부터 나누어 사려고 노력했다. 작은 액수일지라도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판매고를 올려주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쿠쿨칸의 피라미드, 천문대, 원주민 생활 거주지, 크고 작은 신전 축조물들을 보면서 마야 문명의 규모와 정교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외한인 우리들로서는 가이드의 설명 없이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유적지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지를 구경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새삼 가이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혹시 다시 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좀 더 사전 공부를 치밀하게 하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성스러운 우물. [사진-임영태]

 

▲ 숲속의 유적들. [사진-임영태]

 

▲ 유적들. [사진-임영태]

 

▲ 유적들. [사진-임영태]

 

▲ 유적지에서 만난 이구아나. [사진-임영태]

 

▲ 마야인 거주지 복원. [사진-임영태]

 

▲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 [사진-임영태]

 

▲ 치첸이트사 유적지 설명판. [사진-임영태]

 

그런데 이곳저곳을 헤매던 우리들은 유적지와 연결된 호텔로 들어서고 말았다. 유적지와 붙어 있는 호텔은 시설이 잘 돼 있었다. 곳곳에 방갈로와 음식점, 커피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비수기여서 그런지 대부분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호텔로 간 우리들은 어떻게 그곳에서 식사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식사는 호텔에 투숙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식사는 포기하고 맥주와 차를 한잔씩 마셨다. 차는 알코올이 들어간 칵테일 종류였는데 맛이 괜찮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아침에 준비해간 바나나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교수님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아이스크림은 먹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결국 안 되어서 실망이 더욱 컸다. 쉬면서 살펴보니 그 호텔에 유명 인사들이 많이 다녀갔다. 재클린 오나시스와 주니어 케네디도 방문했고, 이란의 팔레비 국왕과 숱한 미국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들도 다녀갔다.

숲 속에 위치한 호텔은 정말 휴식하기 안성마춤인 장소로 보였다. 하루쯤 투숙하면서 치첸이트사를 구경하면 유적지를 제대로 음미하며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비수기라서 방값도 싸다는 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돈도 돈이지만 이미 숙소가 정해져 있고, 짐이 그곳에 있어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발길을 돌릴 수밖에는.

▲ 유적지와 붙어 있는 호텔. [사진-임영태]

 

▲ 호텔에서 만난 공작새. 멋진 자태를 뽐냈으나 끝내 날개를 펴지는 않았다. [사진-임영태]

 

▲ 호텔 안의 방갈로 시설. [사진-임영태]


멕시코 스콜과 대면하다

호텔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유적지 구경할 시간이 얼마 안 남게 되었다. 우리의 발길도 바빠졌다. 우리는 호텔에서 다시 유적지로 들어왔다. 유적지를 대충 한 바퀴 돌아서 본래의 자리, 즉 쿠쿨칸의 피라미드가 있던 곳으로 왔고, 그 주변의 주요 축조물들을 돌아보았다. 전사의 신전, 천개의 기둥돌, 금성의 제단을 돌아보고 있는데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기념물을 파는 상인들은 이미 그 낌새를 채고 단속을 시작한다. 천막 아래의 물건들을 덮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도 마음이 바빠진다.

돌아가야 할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남겨두었을 무렵,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둥소리만 들리더니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쳤다. 사람들이 처마와 건물 아래로 피신했다. 나는 배낭에서 비닐 비옷을 꺼내 입었다. 세찬 빗속에서도 즐겁게 비를 맞고 있는 청춘들이 있다. 마음으로는 나도 저 빗줄기 아래 저렇게 서서 비를 맞아 보고 싶다.

쏟아지는 비를 보는 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래, 이렇게 무더운데 한줄기 비라도 쏟아져야지. 그래야 사람이든 식물이든 살아갈 수 있는 게지. 이런 생각이 든다. 비가 그친 다음 아직 돌아보지 못한 유적들을 열심히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하늘도 맑아졌다. 구름도 보기 좋다. 주변 경관이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다.

▲ 비가 오기 전 치첸이트사 경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사진-임영태]

 

▲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 멋진 하늘과 구름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임영태]

 

▲ 폭우가 쏟아지는 치첸이트사. 드디어 소나기가 퍼붓고 관광객이 모두 처마로 대피한 상황. 하지만 노점상은 피를 홀딱 맞았다. [사진-임영태]

 

▲ 폭우 속의 청춘들. [사진-임영태]

 

▲ 비 갠 뒤의 치첸이트사. [사진-임영태]

 

▲ 비가 그친 뒤 유적지의 꽃나무가 더욱 아름답다. [사진-임영태]

 

▲  비 갠 뒤 아름다운 경치. [사진-임영태]

돌아오는 길. 폭우 때문에 옷이 젖어서 버스 안은 냉방으로 추운 느낌이 들었다. 얇은 점퍼를 꺼내 덮고서 한숨 잤다. 칸쿤에 와보니 시내가 온통 물바다로 변해 있다. 비바람에 가로등과 신호등이 부서지고, 관리자들이 그걸 손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터미널 앞에는 나무도 한 그루 넘어져 있다. 마치 허리케인이라도 몰아친 것 같은 모양새다. 터미널 바로 앞 도로는 강처럼 물이 흘러간다.

숙소에도 비가 들이쳐 방안이 빗물로 흥건하다. 아차, 캐리어를 바닥에 눕혀 놓았다. 이거 어쩌지? 생각하며 보았더니 다행히 캐리어 안은 젖지 않았다. 옷이 젖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한국에서 가져와서 이곳에서 쓸까 싶어 꺼내놓은 돗자리만 젖었다.

저녁 식사는 다시 ‘중국성’에서 했다. 볶음밥과 세트 메뉴 하나를 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식사를 못한다. 그래도 나는 잘 먹는다. 두 분 숙소는 전날 이야기가 되어서 우리가 있는 까사의 3층으로 결정됐지만 걱정이다. 교수님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다. 숙소도 불편해하고, 식사도 거의 못하신다. 원장님이 아무래도 내일은 호텔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말씀한다. 밤에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적당한 곳에 예약하기로 했다. 칸쿤에서 맞은 위기는 어제로 끝난 게 아니었다.

칸쿤 시내는 완전히 물폭탄을 맞은 모양새다. 민박집 주인 말로는 한 달 만에 내린 비가 폭우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도 가물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다음날 날씨가 멀쩡해져서 쨍쨍하게 햇볕이 내려쬈다. 우리는 전혀 예상 못했다. 비 때문인지 와이파이도 불안하다. 그래도 시원한 맥주 한잔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우리는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날씨 걱정을 하면서. 

▲ 다음날 아침 버스터미널 앞에서 본 비바람으로 부러진 나뭇가지. [사진-임영태]

 

---------------------
<주>

1)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2013년 1월 기준으로는 한화 10,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마추픽추나 페트라 같은 다른 불가사의 유적지에 비해 상당히 싼 편이었다.(김동주,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63회”, <오마이뉴스>, 2014.10.4) 그렇다면 2년 만에 80%나 입장료가 오른 셈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전에는 주정부와 인류문화연구소 둘 중 한 곳에서만 입장료를 받았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상대적으로 싼 입장료를 현실화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일까? 어쨌든 수입을 올려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겠지만 그대로 너무 급하게 가격을 올렸다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