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디에고 리베라 박물관에서 만난 것

혁명기념관을 나온 뒤 우리는 ‘디에고 무랄(벽화) 박물관’을 찾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박물관은 그곳에서 불과 15분 내의 거리에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1시간 이상을 헤맸다. 그 바람에 더운 날씨에 모두들 몸이 지쳤다. 고생 끝에 찾아낸 박물관은 전날 우리가 지나갔던 알라메다 공원 한 귀퉁이에 있었다. 저절로 ‘이런∼’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약도를 봐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찾고 보니 바로 여긴 걸 그렇게 헤매다니….

▲ 디에고 리베라 무랄 박물관. [사진-임영태]

힘들 게 찾아간 그곳에는 실망스럽게도 리베라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채운 긴 벽화다. 그림은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멕시코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어서 볼거리가 많았다. 이 그림 한 점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쪽 벽 전체를 꽉 채운 대작이다. 벽화에 자신과 프리다 칼로까지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고 이채롭다. 리베라의 넘치는 기운과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지기보다는 성찰과 풍자의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시케이로스, 오로스코와 함께 멕시코 혁명 정신과 역사 해석의 한 흐름을 대변하는 거장이다. 그는 ‘민중주의 미학’에 기초하면서도 멕시코 혁명에 대한 정통적 해석과 일치하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젊은 시절 유럽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큐비즘운동에도 가담했으나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온 뒤 마야, 아티카 등의 멕시코 고대문명을 탐구하였다. 그는 멕시코 혁명 정신에 공감하면서 멕시코 민중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민중화를 그리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대중들이 접촉할 수 있는 대형 벽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 박물관의 벽화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입장료 외에 사진 찍는 포토 비용을 5페소씩 내라고 한다. 그 비용을 지불한 우리는 더 열심히 찍었다. 멀리서 전체 그림을 찍어도 보고, 부분부분 나누어서도 찍어 본다. 본전 찾아야지. 솔직히 이런 생각도 있었지만, 또 다른 생각도 있었다. 이 그림 하나로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으니, 좀 자세히 찍어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야기도 좀 풀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것 같다. 너무 지루하기도 할 것 같고.

▲ 디에고 리베라 무랄 박물관 벽화. 단 한 점뿐인 벽화가 한쪽 벽면 전체를 꽉 채우고 있다. [사진-임영태]

 

▲ 벽화에는 멕시코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등장한다. 이 한 점의 그림으로도 한 권의 책이 가능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지경이다. [사진-임영태]

 

▲ 벽화의 한 모습. [사진-임영태]

 

▲ 벽화의 다른 면 모습. [사진-임영태]

리베라는 칼로를 사랑했을까?

박물관 벽화에는 멕시코의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어른이 된 다음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는 프리다 칼로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칼로는 리베라의 바람기에 질려 이혼했으나 이듬해 그와 다시 결혼했다.

벽화에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했던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리베라는 그렇게도 바람을 피우며 칼로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그녀를 사랑했던 것일까? 글쎄,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리베라만 알 일이다. 하지만 벽화에서 칼로가 가장 예쁘게 그려진 것은 꼭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사진을 보아도 칼로는 예쁜 얼굴이다. 10대 시절의 교통사고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지는 못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서울에서 마침 프리다 칼로 그림전이 열리고 있었다. 시간 때문에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꼭 한 번 보고 싶다. 마침 서울시립미술관에 ‘광복70주년기념 북한프로젝트’를 구경하러 갔다가 프리다 칼로 미술전을 소개하는 팜플렛을 보게 됐다. 거기에는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이다”라는 그녀의 이야기 적혀 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도 보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칼로가 리베로를 만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리베라는 정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인물이다. 칼로의 그림을 그리게 만든 밑바탕에 리베로가 자리 잡고 있다. 리베라에 대한 애증과 동지애가 칼로의 그림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칼로의 독보적인 예술세계가 형성되었다. 멕시코 전통과 인디오 여성의 생명력을 간직한 그런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칼로와 결혼하고도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찾았던 리베라를 어떻게 봐야 할까? 원장님은 “짐승 같은 인물”이라는 말로 그의 속성을 표현한다. 달리 적당한 표현이 안 떠오를 만큼 그의 기질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리베라는 일반인이 갖지 못한 미친 듯한 열정과 에너지, 영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광기에 가까운 그 무엇이 있었기에 그렇게 많은 그림을, 엄청난 대작들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천재 예술가의 광기는 주변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을 때에는 훌륭한 유산도 남겨주기도 한다. 예술적인 천재의 경우, 뛰어난 직관과 예지뿐만 아니라 보통 인간과 다른 차원의 정열과 욕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리베라도 그런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마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특히 칼로에게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기에 가까운 그 엄청난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대작들을 남겨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예술가의 광기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발현될 수도 있지만 정치가, 군인의 그것은 파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단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광기가 미친 영향은 자못 엄청나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정치야말로 정말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나쁜 정치가는 주변사람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대중 전체를 고통에 빠뜨리고 국가를 망가뜨릴 수 있다. 리베라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몸은 한국을 떠나 있어도 생각까지 그곳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사진-임영태]

 

▲ 리베라 벽화 속의 칼로와 리베라. 여기서 프리다 칼로가 가장 예쁘게 그려져 있다. 왜일까? [사진-임영태]

 

▲ 칼로의 그림. 상처입은 사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사진-임영태]

 

▲ 예술궁전의 벽화. 예술가의 광기는 예술로 승화될 수 있으나 정치가의 그것은 파괴만 낳을 뿐이다. [사진-임영태]

멕시코에서 만난 한국의 맛

우리는 리베라 박물관을 나와 기념품 상점이 모여 있는 전통시장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테오티우아칸 유적지에 함께 갔던 홍 목사님을 박물관에서 만나 그의 안내를 받았다. 길거리를 걷는데 멕시코의 뜨거운 햇살이 머리에 내려 쪼인다. 차들이 내품는 매연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직 아스팔트의 열기가 심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지만 더운 날씨에 몸이 지친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길거리에서 만난 풍경. [사진-임영태]

인내의 한계점 가까이 도달할 무렵 쉬어 가기로 결정했다. 교수님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맥도널드 햄버그 가게가 보였다. 아이스크림도 팔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10페소, 8페소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있는 실내에서 쉬고 나니 조금 힘이 난다.

기념품 가게가 있는 시장에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도 피할 겸 기념품도 살 겸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은세공품, 돌세공품, 전통문양의 천 등 다양한 기념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념품은 주로 100페소(8천원)에서 150페소(1만2천원) 내외가 주종을 이루었다. 우리들은 몇 가지 기념품을 골랐다.

▲ 기념품 가게의 기념품들. [사진-임영태]

 

▲ 다양한 기념품들. [사진-임영태]

 

▲ 귀엽고 다양한 해골 모양의 기념품들. 멕시코인들에게 해골은 죽음의 상징이 아닌 부활에 대한 열망에 가깝다. [사진-임영태]

 

▲ 마야달력 모양의 기념품들. [사진-임영태]

 

▲ 멕시코 원주민들을 형상화한 기념품들. [사진-임영태]

역시 기념품점 곳곳에서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가장 많은 곳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다.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는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기념품에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500페소짜리 화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왜일까? 나는 생각한다. 마초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인간으로 살기 위해 투쟁하다 살다간 그의 삶에 대한 애도, 찬사, 헌사가 아닐까?

메스티소는 남성성, 마초를 상징하는 백인과 여성성, 생명을 상징하는 인디오의 혼혈로 생겨났다. 리베라가 백인의 마초이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칼로는 인디오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멕시코인들은 마초를 상징하는 리베라보다도 어머니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칼로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그림. [사진-임영태]

기념품을 구입한 뒤 멕시코시티 한인촌으로 향했다. 한국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고, 한국인들도 사는 곳이다. 곳곳에 한국어 간판들이 보인다. 그 중 ‘청하’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한국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 백반, 비빔밥, 불백, 제육볶음, 냉면 등등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음식들이 그대로 다 있다. 밑반찬도 우리가 먹는 그대로 나온다. 파전도 하나 시켰다.

한국에서 먹는 식사 못지않은 성찬에다 전통 한국의 맛이 살아있다. 된장은 약간 싱거웠지만 나머지는 맛이 괜찮았다. 파전에 맥주를 곁들여 한 잔했다. 식사비용으로 1,200페소 정도를 지불했다. 한화로 9만원이 좀 넘는 돈이다. 5명이 맥주까지 마셨는데도 그 정도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싼 것도 아니다. 멕시코 물가를 생각하면.

▲ 멕시코시티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한식 성찬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사진-임영태]

우리가 멕시코에 있는 동안 코파아메리카 컵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는 동안 멕시코와 볼리비아 전이 TV로 생중계 되기 시작했다. 결과는 0대 0 무승부. 축구에 관심이 많은 우리들은 열심히 축구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오랫동안 산 홍 목사님도 축구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전히 마라도나가 최고라고 한다. 심지어 그를 따르는 종교가 있을 정도라고. 그는 아무리 해도 메시는 마라도나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꼭 그런가? 나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재능이라는 면에서만 보면 마라도나가 메시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메시의 재능과 업적도 그에 못지않다. 그 또한 축구천재임에 틀림없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 코파아메리카 결승전 중계를 보게 됐다. 결과는 연장전까지 갔지만 무승부였다. 승부차기에서 칠레가 아르헨티나를 꺾고 최초로 우승컵을 안았다. 브라질 월드컵에 이어 메시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메시는 월드컵, 코파아메리카컵 같은 큰 대회 우승컵을 한 번도 아르헨티나에 안겨주지 못했다. 준우승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마라도나에 열광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코파아메리카 대회에서 사상 처음 우승을 차지한 칠레의 환호. [사진-임영태]

 

▲  우승컵 앞을 지나는 메시. 메시의 불운은 계속되고 있다. [사진-임영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우버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헤어짐은 아쉬움을 남긴다. 교수님이 그에게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동안의 후의에 감사하며 헤어졌다. 숙소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맥주와 건전지, 간식거리, 쌀 등을 사왔다. 쌀은 일본품종의 1kg 포장이었는데 생산지는 어딘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가격으로 보아서는 일본산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생산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옥상에서 멕시코시티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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