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20여일간에 걸쳐 멕시코와 쿠바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일행은 모두 네 명. 70대 초반의 전직 교수, 60대 초반의 현직 내과의 원장, 50대 후반의 인터넷 신문 대표, 그리고 50대 후반의 출판기획자인 필자다.

이번 여행에 대한 각자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변화하기 전의 쿠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또한 멕시코 고대문명 유적과 ‘멕시코 혁명’ 후예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쓸 생각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공원에서 휴식하고 있는 멕시코시티 시민들. 겉으로 보는 그들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멕시코 사회는 위기를 겪고 있다. [사진-임영태]

당시 매우 진보적인 케레타로 헌법

지난 회에 이어서 멕시코 혁명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마무리 짓도록 하자.

오브레곤 장군의 도움을 받아 카란사가 권력을 장악했다. 카란사는 혁명의 대의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그동안 피 흘린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는 데 멕시코 사회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사파타와 비야 등 급진적인 민중세력이 배제된 가운데 1917년 케레타로 제헌의회가 헌법을 마련했다.

케레타로 헌법은 민중적 대의를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헌법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노동권과 더불어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이지만 토지개혁이 보장되었고, 교회와 외국인의 토지와 자원 소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카란사는 그것조차도 제대로 실현할 의지가 없었다.

구지배세력의 발호, 부정선거와 정치적 억압의 증대, 지지부진한 토지개혁에 반발하며 사파타가 다시 반기를 들었다. 사파타는 ‘멕시코 시민 카란사’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으며 신뢰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카란사는 토지개혁은 하지도 않고, 디아스 치하의 카유디요들이 가졌던 농장을 빼앗아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카우디요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이며 “카란사는 자유선거도 실천하지 않고 단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혁명을 가장한 독재를 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카란사에게 사파타는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고, 두려운 존재였다. 카란사 정부는 사파타를 제거하기 위해 고육지계의 암살음모를 꾸몄다. 1919년 4월 10일, 투항을 가장한 코하르도 대령과 그 부하들에 의해 사파타가 암살되었다. 카란사 정부는 사파타의 의심을 제거하고 그에게 접근해 암살공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기부대를 몰살시키는 고육지계까지 동원해야 했다.

사파타의 암살에 성공하자 카란사 정부는 환호했으나 농민들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슬픈 이별’의 애도곡을 부르며 진정한 혁명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사파타의 육체는 이때 죽었으나 그의 정신은 75년 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과 함께 다시 부활하게 된다.
     

▲ 카란사. 그는 혁명의 대의보다는 자신의 대통령직에만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진-임영태]

 

▲ 사파타의 죽음. 카란사 정부는 환호했으나 농민들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슬픈 이별’을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진-임영태]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다

사파타의 암살 뒤 민중의 여망은 오브레곤에게로 향했다. 그는 카란사 아래서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비야와 사파타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카란사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오브레곤이 카란사의 정적으로 떠오르자 그를 제거하고 정치권력을 독점하려 했다. 그러자 다시 곳곳에서 혁명군이 봉기를 일으켰다. 멕시코시티를 탈출한 오브레곤이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승패는 간단히 나고 말았다. 카란사는 사파타가 암살당한 지 1년 만에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인디언 거주 지역에서 에레로가 이끌던 군대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오브레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멕시코 혁명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군벌을 중심으로 한 카우디요주의야말로 멕시코를 해치는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우디요주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가 확립되어야 하고, 그 출발점은 1917년에 제정된 케레타로 헌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농민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며, 국민에게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권이 이양되는 전통을 세우는 것. 이것이 혁명의 핵심 과제라고 본 것이다.

▲ 오브레곤. 멕시코 혁명의 제도화를 시작한 인물이다. [사진-임영태]

오브레곤은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망명과 진보적 교육 연구에 바친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전 국민에게 기초적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그는 멕시코 혁명 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교사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했다. 이때 교사들은 단순한 지식의 전파자가 아니라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는 혁명 전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함께 바스콘셀로스는 혁명을 잉태시킨 인종적, 지역적, 계급적 균열을 봉합하고 국민적 단합과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한 거대한 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이끌었다. 이러한 문화적 민족주의는 먼저 국민의 문맹퇴치운동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역사상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벽화운동으로, 나아가 인문주의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출판운동 확산되어 갔다.

우리가 전날 예술궁전에서 보았던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등의 벽화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 세 명의 거장은 각각 다른 화풍과 함께 멕시코 혁명과 역사에 대한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고 한다.

디에고 리베라는 ‘민중주의 미학’에 입각한 공식 역사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민족사와 당대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을,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는 당대 유행하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 민족사를 각각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관점은 멕시코의 역사 해석의 흐름과도 통한다. 리베라는 주류적 멕시코 학파의 역사 해석, 오로스코는 비판적 수정주의의 역사 해석, 시케이로스는 정통적 마르크주의의 역사 해석과 유사하다는 것.(주1)

이들의 벽화는 예술궁전뿐만 아니라 대통령궁, 교육부, 멕시코 국립자치대(UNAM), 과달라하라의 오스피시오 카바나스, 산 일데폰소 박물관 등 멕시코 곳곳에 그려져 있지만, 우리는 겨우 한 두 곳만 보았을 뿐이다.     

▲ 호세 바스콘셀로스. 멕시코 혁명정신을 교육으로 연결시킨 철학자이자 교육자. [사진-임영태]

 

▲ 과달라하라의 오스피시오 카바나스에 있는 벽화그림. [사진-임영태]

 

▲ 과달라하라의 오스피시오 카바나스에 있는 벽화그림. [사진-임영태]

 

▲ 산 일데폰소 박물관 벽화 원경. [사진-임영태]

 

▲ 산 일데폰소 박물관의 벽화. [사진-임영태]

 

▲ 산 일데폰소 박물관의 벽화. [사진-임영태]

 

▲ 산 일데폰소 박물관의 벽화. [사진-임영태]

오브레곤은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멕시코지역노동자협의회(CROM)를 포섭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 모로네스는 정부와의 협력을 통한 노동자의 권익 향상 쪽을 선택했다. 반면 오브레곤 정부는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가 주도하는 급진적인 노조들과 가톨릭 계열 노조들의 파업활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탄압하는 이중성을 나타냈다. 급진세력은 배제하고 온건세력은 제도권내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었다. 반면, 오브레곤은 토지 개혁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는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식으로 혁명의 요구를 제도화하려 했고, 그 때문에 그의 정책은 좌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혁명의 제도화를 종결짓다

오브레곤의 다음에 대통령이 된 카예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지만 기여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민족혁명당’을 조직한 일이다. 그는 1928년 국회에서 ‘이제 카우디요주의는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할 것이며, 개인적 충성심에 따른 정치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혁명당’내에 군부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총이 아니라 말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군대는 직업화․전문화시켰다. 이후 멕시코에서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군부의 비정상적인 정치개입, 즉 군부쿠데타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멕시코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는 혁명의 제도화가 이룬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였다.

▲ 카예스. 멕시코 혁명에서 소련의 스탈린에 비교되는 인물. [사진-임영태]

그러나 멕시코 혁명을 제도적으로 종결지은 것은 카예스가 아니라 라사르 카르데나스였다. 1934년 대통령이 된 그는 먼저, 혁명의 가장 주된 과제였던 토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농장주가 되어버린 과거 혁명의 주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카예스를 비롯한 한때 혁명의 주체였으나 이제는 반혁명세력이 되어버린 인간들과 싸우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반발하자 내각에서 쫓아내고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쫓아내 버렸다. 카예스를 비롯한 카우디요가 된 과거의 혁명주체들이 소유한 농장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또한 카르데나스는 노동조직의 다양성도 도모했다. 모로네스가 지배하는 ‘멕시코지역노동자협회’를 배제하고 그 대신 새로운 전국노동자조직인 ‘멕시코노동총연맹’(CTM)의 결성을 지원했다. 카르데나스 정부 아래서 이 조직은 급성장했고, 향후 멕시코 정치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카르데나스는 마지막으로 외국계 자본의 국유화 문제에도 손을 댔다. 1938년 3월 18일 멕시코 석유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영․미 석유자본은 영국과 미국 정부에 군사 개입을 요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앞 둔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은 섣부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미국의 코앞에 독일 동맹국을 출현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협상과 대화로 이 문제를 풀기로 결정했다.

멕시코 민중과 노조의 지지 시위가 정부에 큰 힘이 되었다. 국유화 발표 뒤 수십만 명의 군중이 ‘멕시코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소칼로 광장에서 대규모 지지 집회가 개최됐다. 정부와 그토록 사이가 나쁜 가톨릭교회조차도 전적으로 지지하며 기도회를 열었을 지경이다. 1942년 4월 2일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석유와 토지, 혁명전쟁의 배상금 문제가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은 완결되었다.  

▲ 멕시코 혁명의 종결자 카르데나스. 그는 대통령선거운동을 혁명운동처럼 한 인물이다. 모든 과정을 혁명이념의 전파, 선전 과정으로 파악했으며,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외국자본에도 손을 댔다. [사진-임영태]


혁명비용과 국가 정체성의 확립

혁명기념관 내부에는 혁명 과정에서 당한 민중의 고통스런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과 민중’, ‘혁명과 민중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혁명은 민중을 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아무리 혁명이라는 대의 아래 진행된다하더라도 전쟁이 민중에게 주는 고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멕시코 혁명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10년 동안 엄청난 폭력과 파괴, 물리적 대결을 수반하면서 혁명전쟁, 내전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혁명전쟁’과정에서 150만에서 200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희생되었다. 멕시코 인구 8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은 꼴이었다. 적어도 한 가구당 1명은 죽은 셈이다.

멕시코 혁명이 이처럼 인명피해를 많이 낳은 것은 마데로의 1차 혁명과 달리 카란사의 2차 혁명부터는 내전의 형태로 진행된 데다가 복수극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마데로를 살해하고 혁명을 찬탈한 자를 살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혁명군을 지배했으며 그 결과 무자비한 살해극이 자행되었다. 마데로에서 시작해 오로스코, 사파타, 앙헬리스, 카란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거 암살되거나 처형되었다. 혁명 지도자들이 암살, 처형, 학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혁명의 제물이 되었으니 일반 병사와 민중의 목숨이 어떠했겠는가?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었다.

거기다가 재산 피해의 규모도 엄청났다. 정부군이나 혁명군이나 모두 점령지역의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군대 징발은 기본이고, 목장의 소들은 북쪽 미국으로 실려가 무기와 교환되었다. 부유한 자나 성직자는 군대가 요구한 액수를 내놓을 때까지 잡혀 있었고, 성의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총살당하기 십상이었다. 카란사가 처음 시작하고 나중에는 전국으로 퍼진 화폐 발행은 멕시코 경제를 사실상 완전히 마비시켰다.

멕시코 혁명은 당시 멕시코 경제의 주축이었던 농업을 거의 초토화했다. 처음 수확기에는 움직이지 않던 혁명군도 나중에는 수확기, 파종기를 가리지 않고 움직였으며, 농작물을 불태우기 일쑤였다. 부대들의 초토화 작전은 멕시코 전역을 황무지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혁명군과 정부군 모두 민중의 재산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혁명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다. 특히 여성들은 남편과 아들, 연인을 잃었고, 점령군의 성적노리개가 됐으며 무참하게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교육의 희생도 막대했다. 교사들은 지휘관으로 참가했고, 어린 학생들도 장총을 매고 혁명에 참가했다. 1910년경 1만6천개였던 초등학교 수는 1920년에는 1만1천개로, 학생 수는 88만 명에서 74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멕시코는 재탄생했다. 혁명을 통해 멕시코라는 근대국가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멕시코는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내부 식민지 국가였다. 디아스의 충실한 부하였던 우에르타조차도 민중을 식민지인 대하듯 했다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혼혈인 메스티소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라는 백인인 크리오요(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을 거치면서 멕시코 사회의 주도권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메스티소에게 넘어갔다. 멕시코는 혁명을 거치면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메스티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혁명을 통해 비로소 멕시코는 백인의 마초주의, 남성성과 인디오의 모성성, 생명력이 융합된 메스티소의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을 통해 사회적 이동도 극대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 아니었다면 결코 밟아보지도 못했을 땅을 전쟁 때문에 알게 되었다. 계급과 계층간 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디아스 시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분상승이 이루어졌다. 사파타나 오브레곤, 비야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혁명에서 지배연합을 형성한 지휘관의 대부분은 백인 대농장주 출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 민중의 자식이거나 소자산계급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1920년대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카란사가 아니라 오브레곤의 편에 선 이유의 하나는 여기에 있었다.

▲ 멕시코 혁명과 민중. [사진-임영태]

 

▲ 멕시코 혁명기념관에서 만난 그림. [사진-임영태]

 

▲ 전쟁과 민중. [사진-임영태]

 

▲ 멕시코 혁명과 아이들의 교육. [사진-임영태]

 

▲ 혁명과 여성. [사진-임영태]

 
멕시코 혁명의 정신은 어디로 갔나?

▲ 1968년 대학살 46주년을 기념 시위에 나선 멕시코 학생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기억과의 투쟁은 반복적인 학습과 교육을 필요로 한다. [사진-임영태]

그렇다면 혁명을 통해 형성된 멕시코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잘 지켜지고 있을까? 혁명의 제도화는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혁명기념관 농성장에서 그 답을 이미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멕시코는 너무나 심각한 사회적 격차와 갈등 존재하는 분열된 사회가 되었다. 멕시코에서 혁명 정신과 이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면 멕시코 혁명의 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혁명의 유산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혁명의 완성자로 불리는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물러나고 30년이 지난 뒤인 1970년 경제학자 알론소 아길라는 “혁명의 조국 멕시코에 약 2백만 명의 무토지 농민과 3백만 명의 미교육 아동들, 1천만 명의 문맹자가 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2년 전인 1968년에는 멕시코 정부가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면서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에 발포하여 5백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참사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1917년 헌법의 적용, 표현의 자유, 노동조합의 자유, 자유선거의 보장을 주장했을 뿐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지식인들은 “드디어 혁명이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멕시코 혁명은 그렇게 첫 번째 죽음을 맞았다. 토지개혁으로 본래 모습을 찾은 공동농장 에히도는 끊임없이 분해되어 다시 대지주가 소유하는 대농장으로 변모했고,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은 대도시 주변으로 몰려들어 거대한 빈민가를 형성했다. 우리가 걸었던 멕시코시티라는 세계적인 대도시도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리고 또 다시 외국 자본이 멕시코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멕시코 혁명의 두 번째 죽음은 살리나스 대통령에 의해 일어났다. 1988년 사실상 개표 부정으로 당선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전면적인 경제 개혁과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기에 이르렀던 것. 이 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혁명 이후 만들어진 에히도 공동농장을 민영화했다. 이로써 혁명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고 앙상한 뼈다귀, 해골만 남게 되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 1994년 신자유주의 정책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항의하며 봉기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사진-임영태]

멕시코 혁명은 제도혁명당(PRI)으로 종합되었다. 멕시코 혁명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세력을 하나로 결집한 정당이 바로 제도혁명당이었던 것. 이를 통해 멕시코 혁명은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제도혁명당은 멕시코혁명 이후부터 70년 이상 장기집권하면서 혁명의 대의를 잃어버렸으며 부패하고 타락한 정당이 되고 말았다. 결국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잠시 동안 우파인 국민행동당(PAN)에게 권력을 빼앗겼다.(주2) 이로써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여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했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와는 또 다른 형태의 국가-당 체제가 허물어졌다.

그런데 제도혁명당은 2012년 대선에서 페냐 니에토를 내세워 정권을 탈환했다. 니에토는 국민행동당 집권기간 동안의 문제점을 파고들었고, 그럴 듯한 공약과 깔끔한 이미지를 활용한 홍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집권한 제도혁명당 정부도 여전히 멕시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있고, 멕시코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멕시코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집권당인 제도혁명당(PRI) 뿐만 아니라 국민행동당(PAN)과 민주혁명당(PRD)에도 적지 않다. 제도혁명당은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고 결산한 조직으로 만들어졌으나 70년 이상의 장기집권 과정에서 혁명정신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2000년부터 12년간 집권한 국민행동당(PAN)은 멕시코 혁명 초기 자유주의적 헌정주의의 기초를 세운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우파지만 그들도 결코 제도혁명당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민주혁명당(PRD)은 멕시코 혁명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유산을 정착시킨 카르데나스의 유산을 계승한다고 하고 있지만,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모든 정당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념적 지향성과 상관없이 멕시코 혁명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멕시코의 기존정당들은 현실 세계의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 집단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던 날 멕시코 혁명의 농민반란을 계승하여 봉기한 사파티스타민족해방전선은 ‘이제 그만!’을 외치며 봉기했으나 그들도 멕시코를 새롭게 개조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들은 멕시코 혁명의 민중적 전통인 사파타와 판초 비야의 유산을 계승하려 하지만 멕시코 정치 현실에서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지금 멕시코는 온갖 모순들이 농축되어 ‘멕시코 혁명’이라는 폭발을 불러왔던 100년 전과 유사한 상황이 되고 있다. 멕시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역사는 되풀이 되는 걸까? 멕시코 혁명의 유산은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민중이 또 다시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며 그 힘을 보여줄 수 있을까?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
<주>

1)  이성형, 「멕시코 벽화운동의 정치적 의미: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의 비교분석」, 《국제․지역 연구》 11권 2호(2002년 여름) 참고

2) ‘마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칼데론 정부(2006~2012년 집권)도 국민행동당 소속이었다. 멕시코는 지금 6년 단임의 대통령제 국가다. 70년 이상 장기집권한 제도혁명당도 이 전통만은 철저히 지켰다. 그 때문에 멕시코는 군부의 정치개입이 전혀 없었고, 6년 단임제의 형식적 민주주의도 파괴되지 않고 잘 이어져오고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