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의 분기점, 8월 5일과 15일

▲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일행이 5일 방북해 8일 돌아왔다. 귀환 직후 김포공항에서 이희호 여사가 도착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8월 5일과 8월 15일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인 이희호 여사 일행이 5일 방북했고, 비슷한 시각 정부는 통일부장관 명의의 회담 제의를 담은 서신을 북측에 전달하려 했지만 북측이 응하지 않았다. 같은날 철원 백마고지역에서 열린 경원선 남측 구간 철도복원 기공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축사를 했지만 초청한 북측 고위급 인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전날에는 비무장지대에서 지뢰폭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는 8일 귀환 성명에서 “민간 신분인 저는 이번 방북에 어떠한 공식 업무도 부여받지 않았다”고 말했고, 동행했던 백낙청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은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그분의 성명을 지지하며, 찬찬히 읽어보시면 뼈있는 대목도 없지 않다”고 ‘뼈있는 촌평’을 보탰다. 결국 정부가 통일부장관 명의의 편지를 보내려다 거절당한 사실이 폭로됐고, “북에서 이런 남쪽 당국의 처사는 자신들이 초청한 이 이사장에 대한 모욕이고 이는 곧 최고 존엄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정부가 굉장히 서툴렀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공식 축사에서 “경원선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통해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민족사의 대전환을 이루는 철길이 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북한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지난 6월 유라시아 철도운송을 총괄하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의 제43차 장관회의에서 한국의 정회원 가입 투표는 북한의 반대와 중국의 기권으로 무산됐고, 이날 기공식에 초청받은 북측은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관계 개선 없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실크로드 익스프레스’도 모두 ‘장밋빛 구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 광복70주년 준비위원회가 15일 대학로에서 주최한 '광복 70돌 기념 민족통일대회'에서는 북측의 호응이 없어 남북 공동호소문이 발표되지 못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후 정부나 민간이 입만 열면 거론했던 광복 70주년 8.15민족공동행사는 단 한건의 공동행사도 성사되지 못했다. 나아가 관례적인 공동문건 채택에도 북측이 응하지 않아 ‘광복 70돌,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는 15일 ‘광복 70돌 기념 민족통일대회’에서 공동호소문을 발표하지 못했다. 통일부는 천도교 외에 남북 공동문건이 채택된 곳은 없다고 확인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참석한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조국통일기원 8.15남북불교도 동시법회’는 ‘남북공동발원문’을 공란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15일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건국 67주년’을 들고 나왔는가 하면, “지금 북한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숙청을 강행하고 있고, 북한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는 등 북한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역겹다”고 맹비난했다. “우리에 대한 참을수 없는 정치적 도발이며 극단한 대결선언, 전쟁선언”이라는 것.

‘전략적 인내’와 ‘갈길 가기’

▲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중앙경축식'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제안을 내놓지 않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처럼 8월 5일과 8월 15일을 지나면서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 개선은 더 이상 바라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들이 쏟아지고 있다. 더구나 지난 4일 비무장지대에서 지뢰폭발 사고를 북한 소행으로 단정한 군은 10일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을 시작하고 북한도 이에 맞대응 방송을 시작했다. 탈북자단체들도 공개적인 대북전단 살포를 재개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18일부터 ‘2015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합동 군사연습’이 시작됐고, 28일 끝날 예정이다.

“8월 달력을 뜯어버리고 싶다”는 어느 당국자의 푸념처럼 월초부터 시작된 악몽같은 현실은 월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날로 격화되고 있는 남북간 공방 수위는 이제 물리적 충돌을 우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실상 남측의 확성기 방송 재개와 대북전단 공개적 살포 재개는 UFG 훈련기간이 아니었더라면 북측의 물리적 반격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군사력이 전개된 팽팽한 군사적 긴장 상황 탓에 오히려 사소한 충돌이 방지되고 있는 역설을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한 당국자는 “이미 지난 6월경부터 북한은 남북관계에 전혀 응해오지 않고 있다”며 “10월 10일 당창건 기념일 행사로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인공위성 발사와 핵실험이라는 자체 프로그램 대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했다. 실제로 북한 리동일 외무성 대변인은 지난 6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기자회견에서 “인공위성은 국제사회의 축복 속에서 주권 존엄과 국가적 자긍심으로 계속 발사될 것”이라 예고하고 핵실험에 대해서도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미국은 협상카드를 내놓지 못한 채 ‘전략적 인내’라는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마저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할 동력을 잃고 ‘전략적 인내’로 접어들 경우 당분간 한미일 군사동맹이 북한을 옥죄고 중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동북아의 신냉전 구조가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전의 카드는 없나?

▲ 지난해 2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 이후 남북 간에 의미있는 고위급 대화가 끊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고위급회담에서 남측 수석대표인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오른쪽)과 북측 단장인 원동연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물론 막다른 지점에 내몰릴 때에 반전의 카드도 보다 절박하게 모색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DMZ 세계평화공원’과 ‘남북 철도도로 연결’, ‘이산가족 생사확인’ 등을 제시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북한에게 만나서 협의하자고만 할 것이 아니라 ‘금강산 관광 재개할 테니 추석 이산가족 상봉하자’라든지 구체적으로 제안해야 북쪽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북측은 남측의 거듭된 남북 고위급회담 제안에 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15일 조계사에서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대한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 본부장인 지홍 스님은 홍 장관 면전에서 “올해를 남북관계 개선의 획기적 전환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남북 간 특사교환을 포함한 고위급 대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홍 장관은 앞서 지난달 22일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옛날식 민간 브로커, 이건 안하는 것이고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은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15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조국통일기원 8.15남북불교도 동시법회’에서 불교계는 '남북 특사교환을 포함한 고위급 대화'를 촉구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창복 광복70돌 준비위원회 상임대표와 홍용표 통일부 장관,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일각에서는 9월 3일 중국 전승절 행사가 남북관계를 일거에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국제적 위신을 높인 바 있는 중국은 전승절을 계기로 남북의 지도자를 초청함으로써 다시한번 외교적 승리를 거둘 기회를 거머쥐려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참석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이고, 문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참석 여부이다. 지금까지의 북중관계나 북한의 행보로 미루어 보아 김 1위원장의 참석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또 있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험악한 상황에서는 설사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 하더라도 반가운 악수를 나눌 분위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 역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기 위해서는 9월 3일 이전에 현재의 대치국면을 전환시키는 사전 정지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비공식 접촉을 통해서 남북관계 전반에 관한 큰틀에서의 합의가 없으면 어렵다”며 “민간 채널이나 정부의 특사가 만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임기가 절반을 지난 시점과 맞물려 8월 5일과 15일 분기점을 거치면서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남북관계는 ‘0’을 기록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 현실화되고 있다. 보수정권 하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라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일지 모르지만 역으로 보수정권이야말로 색깔론에 휩싸일 부담없이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5년 미국 공화당 조지 부시 행정부 당시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 해법을 담은 ‘9.19공동성명’이 채택된 전례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여권 핵심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조만간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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