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부가 지겨웠던 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연도를 외워야 하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왕의 이름들과 사건, 지명들을 외워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단기간에 외워서 단답식으로 치르는 시험도 역사공부를 싫어하게 된 배경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난생처음 북의 역사를 공부하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재미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의 반쪽인 남한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전공자들의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말이죠.

한홍구 교수님은 존경해마지 않는 분입니다. 비록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진 못했지만,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또한 대중 강연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교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 한홍구, 『한홍구와 함께 걷다』, 검둥소, 2009.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은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역사기행’의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안내서입니다.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우리의 슬픔과 좌절, 환호와 희망이 살아 숨 쉬는 곳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복잡한 심정까지. 책을 통해 깨달은 사실들을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절, 이후 동족 간의 가슴 아픈 전쟁, 또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역사.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민족입니다. 아울러 여전히 분단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여전히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증오와 분노의 몸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희망을 만들어냅니다.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환호와 외침. 불의를 향해 던지는 뜨거운 함성은 그 아무리 폭압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이내 끌어내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한반도에서 살아냈습니다.

한홍구 교수의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은 이 땅의 많은 터들이 곧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전쟁을 기념하는 세계 유일의 치욕스러운 장소인 전쟁기념관, 일본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안식처이자 역사의 장이기도 한 나눔의 집, 근대 국가가 만들어 놓은 강요된 애국심의 현장 국립현충원,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경복궁,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밖에도 강화도, 국립4·19민주묘지, 남산과 명동성당, 광장,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등 많은 사연과 굴곡을 안고 있는 곳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망각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자, 혹은 권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남겨지고 기억되고, 호명되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네,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끝까지 안고 가는 것, 힘들고 지치는 일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변절자는 누구인지, 누가 자신의 탈을 바꿔가며 구차한 삶을 이어갔는지, 어떤 이들이 진정한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 했는지, 이 모든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역사와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부지런한 만큼, 딱 그만큼 우리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정에 한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지름길을 살짝 전해주고 있습니다.

책에는 가슴 저리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역사는 이다지도 눈물과 한이 많은 것일까요. 하지만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책을 통해, 허접스러운 뉴라이트가 아닌 이 땅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어갔는지를, 4·19혁명의 주역이 대학생이 아닌 초등학교, 중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6월 항쟁의 밑거름에는 집을 철거당한 빈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장기농성을 위해 준비한 쌀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박정희가 더럽게 못 쓰는 붓글씨로 얼마나 많은 역사 유적과 유적지에 낙서를 해놨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역사를 이끌어 왔는지,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아내와 함께, 언젠간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들고 꼭 소박한 ‘역사기행’을 하고 싶습니다.

아, 책에 실린 김수영 시인의 시가 여전히 저에게 와 닿습니다. 곧 이 시를 부를 날이 올까요. 4·19혁명 이후 시인이 쓴 시입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우리는 매일 매일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며 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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