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산’이라는 이름을 얻고 ‘목멱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나라의 제사를 지내며 ‘목멱산(木覓山)’으로도 불린 산. 바로 서울의 한 가운데 궁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남산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광복70주년 특별기획전으로 7일부터 11월 1일(일)까지 ‘<남산의 힘>展’을 1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파란 많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치욕과 공포의 흔적을 갖고 있는 남산이 점차 바뀌고 있는 변화를 250 여점의 역사자료를 망라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남산이 겪어온 시대는 크게 ▴1부 목멱, 한양의 안산, ▴2부 식민통치의 현장,  ▴3부 국민교육장 남산, ▴4부 돌아온 남산으로 구분된다.

▲ 정선, <목멱산도>(백납병풍), 18세기, 고려대학교박물관. [사진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1부. 남산이 한양의 내사산 중 하나로 한양의 수호산이자 친근한 앞산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남산은 조선 초기부터 국사당과 와룡묘, 남관왕묘 등이 자리잡고 있었고 또한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관리들의 계회 등 풍류의 장소로도 각광 받았다. 사도세자가 쓴 <남관왕묘비명>을 비롯하여, 겸재 정선의 <목멱산도>(백납병풍), 김홍도의 <남소영도>, 김윤겸의 <천우각 금오계첩> 등 쟁쟁한 조선화가들의 필치로 남겨져 있는 남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 <조선신궁전경도>, 일제강점기, 민족문제연구소. [사진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2부 ‘식민통치의 현장’에서는 남산에 박혀있는 치욕의 역사가 펼쳐진다. 1880년대부터 일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 주둔지인 ‘왜성대(남산 북쪽일대)’ 지역에 일본공사관, 통감부, 통감관저 등을 설치했다.

전망이 좋은 남산 회현자락에 일제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의 대지를 조성, 조선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개조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를 짓기도 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인들의 진술서>, 197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진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3부. 1945년 해방 이후 남산은 좌익 집회가 주로 열리는 무대이기도 하고 조선신궁 자리엔 건국 대통령의 초대형 동상이 세워지고 국회의사당 부지조성 공사가 진행되는 등 이념의 무대였다.

1960년대 남산은 장충동에 들어선 ‘자유센터’, 산 중턱의 동상들, 산 아래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잡은 ‘반공의 산’이었고 특히 41개동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정보부는 ‘중정’이고 그 자체가 ‘남산’으로 불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 김봄, <남산>, 2010, 서울시립미술관. [사진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4부. 1990년대 들어 남산에서 안기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떠나갔고 경관을 훼손했던 외인아파트가 폭파‧철거되었다.

지금은 자연환경 복원과 시민 휴식공간 조성을 위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의 기억을 위해 안기부터를 인권기념관이나 평화의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시 마지막 부분은 시민공모 사진 전시로 꾸며지는 ‘추억 속의 남산’ 코너. 지난 5~6월 시민 공모로 모은 사진 30점을 선정해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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