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라디오에서 어느 경제평론가가,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관료들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해 설명한 바 있다. 먼저 불필요하고 과도한 비밀주의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꼴값도 이런 꼴값이 없다. 툭하면 국가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에 공개할 수 없다고 하지만, 국가가 아닌 자신들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숨기려 한다는 것을 이제 시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하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은 오류가 없다, 틀릴 수 없다는 강력한 믿음에 근거한 엘리트주의다. 이 역시 헛소리다. 만약 우리 정부 관료들이 그토록 뛰어났다면, 그토록 대단한 양반들이라면 세월호의 비극도, 메르스 사태도, 국정원 해킹 사태 따위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오만함, 시민을 자신들의 아래로 보는 건방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우리 관료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하다면 도무지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별 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성과인양 과대 홍보하고 자랑질하는 것이 정부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치적으로, 성과로 자자손손 남을 것들을 숨길 리 없다. 결국 이들은 형편없는 실력을 숨기기 위해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참으로 몸살이 날 정도로 창피했던 것은 대한민국 관료들의, 지식인들의, 언론들의, 정치인들의 그리고 이제는 슬프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체화되어있는 지긋지긋한 사대주의다. 외국인의 시선, 외국인의 평가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이 뭐 한마디 칭찬이라도 하면 그게 마냥 좋아 개새끼마냥 꼬리치며 애교부리는 작태는 아마도 우리와 일본이 톱을 이루지 않을까.

최근 여당의 대표라는 이가 미국에 건너가 그들 앞에서 큰절을 올린 바 있다. 대한민국은 예의를 아는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던가. 그건 예의가 아니라 노예가 주인에게 굴종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우리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주한미군사령관을 업고 한없이 밝은 미소를 만방에 보여준 인물이었으니, 종주국에 가서는 오죽 황송했을까 싶긴 하다. 하해와 같은 영광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자리도 한 번 해먹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지독한 노예근성과 사대주의로 말미암아 그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가혹하다. 박노자 교수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날카롭게 드러내자 보수 진영은 물론 일부 진보 진영에서도 강하게 반발했다. 그가 귀화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파란 눈의 이방인이 감히 우리를 씹었다는 감정은 ‘아몰랑’식 매도로 이어졌다.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알기에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비난이 이어진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는 일정 정도의 상식과 교양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더 심각하다.

 

▲ 다니엘 튜더 지음 송정화 옮김,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 문학동네, 2015.6. [자료사진 - 통일뉴스]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 가능하다. 정부와 집권 여당은 물론 아마 야당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질 것이다. 어쩜 야당이 더 괘씸해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야당 비판에 할애되었으니 말이다. 능히 받아야 할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도 큰 능력인데, 현재 우리 야당은 그런 능력 따위 개한테나 줘버렸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피로하다. 역시 지독한 무력감 때문이다. 정상화, 희망, 변화, 꿈, 혁신, 창조, 정의, 상식 따위의 말들이 범람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그 단어들과는 매우 상반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희망적이지도 않기에 주문처럼, 웅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더 비참하고, 더 창피하다.

저자는 특파원이란 위치에서 바라본 한국사회 그리고 이른 바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만나며 느낀 감정을 솔직히 풀어낸다. 어쩜 외부인이기에 가능한 비판과 지적질이다. 온갖 부패와 어이없는 엘리트 의식, 그것이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 상황이 민주주의의 퇴보와 회복 불가능한 몰락을 가져온다면? 그땐 상황이 달라진다.

사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정치는 진정한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진보도 보수도 아니면서 기이하게 고착화돼 양분된 좌우 진영논리는 정작 유권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모든 종류의 의제를 집어삼킨다.’ 물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표면적으로 다른 정당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연 어떠한 차별성을 느낄 수 있는가. 대북정책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난 그렇게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다. 두 정당 모두 재벌에 관대하고, 기형적 의미의 시장옹호주의자들이다. 복지에 대한 인식도 둘 다 형편없다.

게다가 표현의 자유 역시 점점 더 심하게 훼손되어간다. 저자는 다른 국가에서는 이미 사문화되었거나 존재하더라도 형법으로 분류되지 않는 명예훼손죄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가 기이하다. 이는 시민과 언론에게 재갈을 물리는 효과를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략 살펴보면 명예 따위는 이미 없는 인간들이 꼭 명예훼손으로 타인을 고발한다. 꼴값이다.

좌파와 종북이 엄연히 다름에도 싸잡아 종북좌파라는 해괴한 말들을 뱉어내고, 이를 이용한 색깔 공세로 반대파들을 공격하는 한국의 보수 진영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툭하면 군사 기밀을 유출하고, 남북정상회담록과 같은 국가적 기밀 사항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종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기들에게 유리하다면 그 어떤 국가 기밀이라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을 무리들이란 걸 이미 증명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어떤 삽질을 하고, 유권자에 대한 그 어떤 배신행위를 한다 해도 이들의 지지율은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조금 과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후, 이를 보기 좋게 파기한 이들에게도, 노령층 유권자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 반응하여 지지한다. 묻지마 지지, 아몰랑 지지다. 나도 미스터리인데, 저자의 눈에는 얼마나 신기하게 보일까?

아울러 영미권 시장옹호주의자들의 시각에는 우리 재벌들 역시 기형적이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 우선주의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기회가 생겨도 대기업이 차지하고, 그들의 독주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박살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가능하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이비’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정부가 허가해주는 독과점 혜택을 누려왔고, 막대한 규모의 정부 계약을 따내고, 국민의 혈세로 제공되는 전기 사용료의 보조금을 받아 돈을 벌어왔음에도, 정작 사회에 기여하라는 목소리에는 사회주의 어쩌구 하며 저항한다. 이는 시장옹호주의자가 아닌 그냥 도둑이 아닌가.

국가자본부의, 정실자본주의가 한국 재벌의 모습이다. 아, 갑자기 기억난다. 메르스 사태 때 삼성병원 관계자는 이렇게 떠들었다. “설사 국가가 뚫린다 해도 삼성은 뚫리지 않는다”. 이미 권력은 넘어가 버렸다.

이밖에도 저자는 우리 정치의 발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야당이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떤 삽질을 하고, 헛발질을 해도 현 여당에 대한 지지율은 기본적으로 탄탄하다. 묻지마 투표가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당은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고, 어설픈 네거티브 전략을 그만 사용해야 한다. 욕하는 것도 계속 들으면 지겹다.

‘너나 잘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차기 대선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새정치민주연합이 분리 되거나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시민들이 야당에 대해 분노하고 또한 불신하고 있는지는 알아서 판단하셔야 할 듯하다. 그걸 모르면 영영 패배자로 살 수밖에.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나 하면서 말이다.

이른 바 삐딱한 서양 좌파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우리가 바로 그 사회에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저자는 더 신기했나보다. 어떻게 그토록 눈부신 발전과 성장을 이뤄낸 나라가 지금 이따위로 엉망인데, 왜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거지? 물론 이야기한다, 우리도. 다만 그 지겨운 희망고문과 무력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뭘 해도 안 되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웅을 기다리지는 말자. 영웅 따위는 없다. 개나 줘버려라. 저자는 안철수 신드롬과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구세주는 없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을 때”라고 말한다. 안철수 개인에 대한 비난은 물론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열광하다 또 너무 쉽게 경멸한다. 한낱 연예인이라면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지닌 사람이라면? 난리난다. 우리는 지난 5년 한바탕 난리를 치렀고, 지금도 난리 중이다.

“욕하는 건 쉽지, 답을 내놓아야 진정 의미 있는 것 아냐?”라고 떠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요즘엔 욕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단순히 점잖은 척, 자신은 양반인 척, 입 다물고 있는 것 또한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홀로 모두까기 운동을 하다, 한 두 명이 모이고, 집단 모두까기 운동을 하다보면, 문득 정답이 떠오를지 모른다. 또 당장 지혜가 나오지 않으면 어떠랴. 일단 욕먹을 것은 먹어야 하고, 욕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 미치도록 힘겨운 이 세상에서 그나마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법이다.

세상에 넘치는 것이 개자식이고, 양아치이고, 점잖은 척 나 몰라라 하는 더 나쁜 종자들이다. 그런 저랩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저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솔직담백한 한국 모두까기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충분하다. 그는 모국인 영국의 실패를 꼽으며 우리가 같은 실패의 길을 걷지 말기를 충고한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할 때는 솔직히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제안 쉽지 않다.

이젠 좀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보자. 창피하게 큰절하고 업고 놀자 따위 하지 말자.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관례라 받아들이지 말자. 정치인의 공약 파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미친놈들을, 도둑놈들을 사랑하지 말자. 내가 낸 세금으로 거들먹거리며 군림하려 하는 건방진 공무원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 잘라 버리자, 그런 것들은. 그리고 엘리트라 자처하며 혈세를 낭비하는 것들을 찾아내 반드시 학교로 보내자. 마지막으로….

돈 푼이나 받겠다고 한국으로 기어들어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한국을 찬양하는 외국 것들보다는 진정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적질과 비판을 하는, 그런 외국인들을 고맙게 여기자. 외국에서 아무리 코리아 넘버원이라고 외쳐도, 다 필요 없다. 바로 우리가, 시민이, 이웃이,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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