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분계선 건너편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 '판문각'이 눈에 들어온다. 북측 관광객들이 남측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이승현 기자]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령부와 북측은 군사적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고 이미 발생한 충돌이 확대돼 긴장고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무장지대(DeMilitaized Zone, DMZ)안에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mistice Commission, MAC)’를 설치하고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을 운영하도록 했다.

군사분계선 상에 자리 잡고 있는 JSA의 또 다른 이름이 ‘판문점’이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예전 이곳에는 개성-장단-서울로 통하는 도로가 있었는데 임진강의 지류인 사천강이 흐르는 이곳을 지나려면 강을 건너야만 했다.

사람들이 통나무와 널빤지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했다고 해서 그 다리를 ‘판문교’라고 했으며, 물이 불어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면 며칠씩 묵을 수밖에 없게 되다보니 생긴 주막은 ‘판문점(널문가게)’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고 조선시대 발행된 한 책에 비슷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판문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사이트는 설명했다.

일부에서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였으며, 1951년부터 시작된 정전협정 당시 중국 측을 배려해 고유지명을 한자로 표기했다는 주장도 있다.

오래된 마을인 판문점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휴전을 결정한 담판장으로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했다. 민족의 분단을 만천하에 공표한 비운의 장소였지만 지금은 정전상태를 벗어나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는 희망의 장소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당초 정전회담은 개성에서 시작하였으나 유엔군 측의 요구에 의해 1951년 10월 25일부터는 판문점으로 옮겨 진행됐다. 회담이 진행된 장소는 지금의 판문점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미터 바깥이었는데 북측 DMZ 구역 안이었다. 당시에는 초가집 4채와 회담장으로 쓰인 가건물 2채, 그리고 막사 건물 3채가 있었다고 한다.

북측 매체들이 ‘정치상식’으로 소개한 ‘판문점’ 항목에서는 이곳을 ‘판문점 구 회의장구역’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정전협정 조인식이 진행된 건물이 있으며, “정전담판이 진행된 회의장에는 우리 측(북측) 수석대표와 성원들이 미군 측 수석대표와 그 성원들과 마주앉아 담판하던 탁과 의자들이 그대로 놓여있다”고 한다.

▲ 정전협정 조인장. 현재 북측에서 평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이승현 기자]

전 유엔사 특별고문으로 『JSA-판문점(1953~1994)』의 저자인 이문항은 저서에서 “나라의 허리를 자르는 군사분계선을 정전협정 지도 제1도에 그리는 과정에서 휴전협정 회의가 열렸고 그 때 협정 조인이 이루어졌던 (구)판문점이 군사분계선 북측 DMZ 안에 위치한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유엔사가 군정위 회의장소를 군사분계선 상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함에 따라 북측도 할 수 없이 이에 동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때 유엔사가 선택한 곳이 (구)판문점에서 동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군사분계선상의 ‘간만동’이었고, 이곳은 지금까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불리고 있다.

북측에서 ‘판문점 신회의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지금의 판문점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장 건물 3채를 중심으로 남측에서 운영하는 ‘자유의 집’·‘평화의 집’과 북측에서 운영하는 ‘판문각’·‘통일각’ 등 4채의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3개의 회의장 건물 그 중에서도 정 중앙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장 가운데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를 가로지르는 마이크 선은 군사분계선과 정확히 겹친다. 그래도 이곳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일하게 상대방 지역으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은 여기까지. 회의장 안에서는 창밖 북한군 경계병을 사진 찍기 바쁘고 창밖 병사는 눈을 부라리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게 아쉽다.

▲ 파란색 건물 3채가 군사분계선 위에 위치한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장이다. 북측 판문각이 내려다 보고 있다. [사진-이승현 기자]

판문점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북측 ‘판문각’과 회의장 건너 80미터 맞은편에 있는 남측 ‘자유의 집’에는 매일 각각 300여명에서 1,000여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망원경을 통해 건너편을 보노라니 저쪽에서도 같은 용무로 망원경을 집는 손길들이 바쁘다.

민족의 분단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소 불편하다.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 세계와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런데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까 분명히 알겠다. 북측 판문각의 위치가 남측 자유의 집 보다 높다.

시야를 바꿔보니 북측 매체에서 “2층으로 된 ‘판문각’은 날아가는 학처럼 시원하게 건립되었는데 거기에서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땅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 실감이 난다.

여기에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판문점이 겪게 되는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풀이해 볼 수 있는 비밀이 숨어있다.

‘나무자르기사건’-‘판문점 도끼만행사건’

▲ '돌아오지 않는 다리' [사진-이승현 기자]

먼저, 이문항 전 유엔사 특별고문이 정전협정을 진행하면서 판문점 위치를 변경한데 대해 술회한 데에서 주목할 점은 “유엔사측이 선정한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미국 공병장교의 무관심으로 높은 지대를 모두 북측에 내주게 되어 북측이 유엔사 측을 내려다보는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전 고문에 따르면, “유엔사측은 판문점 회의장 서쪽 끝 언덕진 곳에 제5관측소를 짓고 북측에서 판문점 회담장소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과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그 다리 앞에 구축한 유엔사 제3초소를 늘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제5관측소를 건립하자 북측은 이를 ‘도발적인 시설’이라고 비난까지 했다.”

그는 이처럼 이미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있던 차에, 미군들이 자신들의 제5관측소에서 북측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관측하는 데 방해가 되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강행하면서 북측 경비병들과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라고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또 끔찍한 사고로 인해 전쟁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긴 했지만 미군은 이 사건을 ‘Tree Cutting Incident(나무자르기사건)’이라고 불렀다고 소개했다.

이 사건 전까지 판문점 내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 쌍방 경비요원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각각 경비구역을 분할했으며 지금까지 상대측 지역으로는 임의로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장 옆으로 '소떼 방북'을 했다. [자료사진]

군사적 충돌의 위기가 조성되기도 했고 북측 주민이나 공산권 외국인들이 귀순해 온 사례도 간혹 있었다. 임수경 전대협 대표의 귀환길도 판문점이었다. 그러나 탈 냉전시대에 들어와 판문점의 기능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판문점 군정위 회의장 오른쪽을 돌아 북측 지역으로 들어갔다.

특히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높아지는데 따라 인적 왕래와 접촉, 회담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관계 발전이 답보상태를 넘어 오히려 대결 국면으로 빠져드는 듯한 우려가 없지 않지만 한번 열린 교류·협력관계를 쉽게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판문점이 더 이상 전쟁과 분단을 기억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기약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판문점 역사>

판문점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이행을 위해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정전협정 기구들이 위치한 특수지역이다.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2km, 그리고 개성에서는 동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측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이고 북측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이다.

판문점에는 군사분계선 위에 동서 800m, 남북 400m의 정방형 공동경비구역(JSA)이 설치돼 있으며,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한군이, 남쪽은 유엔군사령부가 각각 관할하고 있다.

이 지역의 경비업무는 정전협정 이래 유엔사가 맡아오고 있었으나 2004년 11월 1일부터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다.

판문점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분단의 상징인 동시에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협력의 장소이기도 하다.

1971년 남북이산가족문제 협의를 위해 남북적십자 사이의 접촉이 시작된 이래 판문점 ‘중감위회의실’, 남측 ‘자유의 집’, ‘평화의 집’과 북측 ‘판문각’, ‘통일각’을 오가며 남북 당국간 회담, 군사회담 등 여러 분야의 회담이 개최되고 있다.

□ 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최종 서명해 발효된 한국전쟁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이 협정에 의해 남북 사이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설정됐으며, 판문점에 군사정전위원회아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설치됐다. 지금까지 이 정전협정 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협정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본회담이 시작됐으며, 그해 10월 25일부터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했다. 포로송환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장기간 휴회했던 정전회담은 1953년 6월 8일 포로교환 협정을 체결, 그해 7월 27일 최종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렀다.

북은 1990년대 들어와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취해 1994년 5월 군정위 북측 대표단을 철수시키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으며, 1995년 5월에는 판문점 중감위 사무실 폐쇄 발표를 했다.

1995년에는 ‘판문점대표부’명의의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1996년에는 한반도에서의 무장충돌과 전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평화협정 체결 전이라도 군정위를 대신하는 ‘북미 군사기구’를 조직하자고 제안하는 등 정전협정 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강화해 나가면서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 군사분계선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은 휴전과 함께 대치하고 있는 교전 당사자간에 전투 등 적대행위를 정지키시고 병력을 분리하기 위해 설정하는 기준선이다.

대체로 휴전이 성립된 정전협정에 근거한 남북한 간 군사적 경계선으로 판문점 내에서도 남북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서쪽으로는 한강 하구의 교동도에서 동쪽은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km에 달한다.

군사분계선은 남북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이지만 그 위에는 철책선도 없고 높게 쌓아올린 담도 없다. 다만 일정한 거리마다 군사분계선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을 뿐이다.

□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고 정전협정 위반 사건을 협의·처리하기 위한 기구로 설치됐으며, 북측과 유엔사 5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1991년 유엔군측이 그 직전 연도에 한·미 국방장관 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국군 장성을 군정위 유엔군측 수석대표로 임명하자 북측은 이에 반발하여 군정위에서 철수하고 1994년 5월 군정위 대표단을 대신하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1953년 7월 27일부터 1994년 6월 6일까지 510회의 회의를 개최했으며, 지금은 판문점 대표부와 연락관 회의형태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권한과 관련된 규정 중 중요한 것은 군정위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군사분계선을 통과할 수 없고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이 규정 때문에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간에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작업도 먼저 유엔사와 북한군 간에 비무장지대 일부를 개방하여 남북이 관할하는 구역으로 한다는 합의를 한 후 이를 바탕으로 남북 간에 ‘남북 관리구역 설정과 남과 북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 작업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합의서’를 채택하고서야 진행되었다.

□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북측과 유엔사의 정전협정 이행과 준수를 중립적 입장에서 감독하기 위한 기구로 설치됐으며, 한국전쟁에 전투원을 참가시키지 않은 국가들로 쌍방이 2개국씩 선정하여, 총 4개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대표 4명으로 구성되었다.

중감위는 국경 외부로부터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의 반입과 군사인원의 들어오는 것을 감시하게 되어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북측은 정전협정 무력화 차원에서 중감위 철수를 요구,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1995년에는 폴란드 대표단이 판문점에서 철수했다. 현재 스위스와 스웨덴 대표는 매일 회의를 하며, 폴란드 대표단은 이후 본국에서 활동을 계속하면서 매년 한국을 방문, 중감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JSA 경비대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을 경비하고, 비무장지대 내 대성동 마을의 민사행정 및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이다. 이 부대의 기지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때 희생된 미군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보니파스 캠프(Camp Bonifas)’로 명명됐다.

▲ 판문점 내 주요 시설. [사진출처-통일부]
□ 군정위·중감위 회의실
정전협정 이행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회의 장소.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한 파란 지붕의 건물.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해 있지만 일단 회의실에 들어서면 분계선은 적용되지 않는다. 상대측으로 나가는 문을 열지 않는 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회담이 열리지 않는 평상시에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는데, 서로가 미리 상대측에 통보해 출입문을 잠궈 놓도록 한다고 한다. 세 동의 건물 중 가운데가 중감위 회의장.

□ 판문점 연락사무소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회담 제1차 예비회담 합의에 따라 9월 22일 처음으로 판문점 남북 양측 관할지역에 있는 ‘자유의 집’과 ‘통일각’에 ‘남북적십자회담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1992년 2월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그해 5월 부속 합의서를 체결, 남북 당국간 ‘남북연락사무소’를 ‘자유의 집’과 ‘통일각’에 설치했다.

현재 북측 연락사무소는 판문각 2층에 있다.

남북사이에 제기되는 제반 연락업무를 수행하고 남북 합의사항 이행과 관련한 실무협의 등 연락사무소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1971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 연락사무소 개설 당시부터 ‘자유의 집’과 ‘판문각’사이에 직통전화 회선 2회선을 개설한 이래 지금은 판문점 지역 내 5회선을 비롯해 총 33회선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평양 간 21회선이 각종 회담 지원을 위해 설치돼 있으며 서울과 개성 경협 사무소에도 3회선이 운영 중이다. 이밖에 항공관제와 해사당국간 협의를 위해 각각 2회선이 인천-평양, 서울-평양에 설치돼 있다.

□ 자유의 집
판문점 남측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간 연락 업무를 수행하는 ‘남북적십자연락사무소’, ‘남북연락사무소’가 있다. 각종 남북회담, 접촉, 교류 시 이를 지원하는 시설로 활용된다.

□ 판문각
판문점 북측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정위·중감위 회의실을 사이에 두고 80m 앞에 남측 자유의 집과 마주 보고 있다. 북측의 연락사무소가 있는 곳이다.

북측 경비병 지휘소로 사용되며, 판문점 대표부와 적십자연락대표부 등이 있고 군사정전회담이나 남북회담의 대표 대기실로도 쓰이고 있다.

평상시에는 판문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8월 15일 무렵에 진행하는 범민족 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 평화의 집
판문점 남측 지역에 있으며, 남북간의 주요 회담 개최 장소로 사용된다. 자유의 집으로부터 남서쪽으로 130여미터 떨어져 있다.

□ 통일각
판문점 북측 지역에 위치. 남측 지역에 있는 ‘평화의 집’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개최된 주요 남북회담이나 접촉은 대부분 이곳에서 개최됐다. 통일각은 판문각에서 서북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 공동일직실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간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는 유엔사의 공동일직장교들이 근무하는 곳.

□ 돌아오지 않는 다리
한국전쟁 직후 남북간 포로교환이 이루어진 곳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불린다.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출입하는 다리로 사용했으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폐쇄된 후 활용되지 않고 있다. 다리로부터 남쪽 구역 100m 앞에 당시 미루나무 가지치기에 참가했다 희생당한 미군 장교 2명의 추모비가 있다.

□ 72시간 다리
1976년 8월 18일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되면서 북측이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히게 되자 새로운 통로로 만든 다리. 다리 건설에 72시간이 걸렸다고 해서 ‘72시간 다리’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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