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고 있다. 기대했던 북측 선수단 및 응원단의 참가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정부가 그렇게도 부르짖는 광복 70주년이라는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한 번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언론이나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을 살펴보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창피하면서도 애매한 느낌이랄까. 스포츠 강국을 외치며 각종 국제대회 참가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북이 왜 광주대회 불참을 결정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었는데, 문득 북측 불참 결정 소식을 처음 접한 후 내가 보인 반응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 상황에서 북이 참가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물론 북측의 불참 원인이나 배경에 대한 나의 판단이나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들이 보였던, 그 중 특히나 싫어했던 모습을 어느 새 내 자신이 따라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 바 ‘후견지명’ ‘사후 확신의 경향’이었다. 큰 인재나 사고가 발생하면, 언론은 거의 어김없이 “예고된 인재” 등등을 떠들어댄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누적된 부정과 부패, 비합리성과 무사안일주의 등등을 원인으로 들며, 결국은 일어날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담, 그렇게 예견할 수 있었던 사고를 왜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나?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미리 막지 못했나? 마치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와 같은 건방짐인데, 그렇게 똑똑하면 왜 막지 못했느냔 말이다. 여기에 언론은 단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 사실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어느 새 내가 따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짝 부끄러움이 들었다. 만약 북측이 예정대로 광주대회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무어라 말했을까.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까. “나는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북이 대회 참석을 결정할 것이라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무책임하면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언론이 특히나 호들갑스러워 그렇지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진 않다.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이 우승을 할지, 총선이나 대선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북이 가까운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사실 이런 것들은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 역술인이 아닌 이상 정확히 예언하기 힘들다. 하물며 사건 사고는 말할 것도 없다. 신이 아닌 우리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매우 뛰어난 동물이기에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외친다. 이미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그 결과를 예측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민망한 일이다. 아울러 혹시나 어떤 결과로 인해 자신에게 튈지도 모르는 불똥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예측의 가능성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 아울러 한 번의 사고로 인해 교훈을 얻고 미래를 더욱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다면 적절한 수준의 뒷북은 유효하다. 아쉽게도 우리 정부, 우리 언론에서는 찾기 힘들지만 말이다.

 

▲ 강준만, 『감정 독재 –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인물과사상사, 2013.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강준만 교수는 나의 대학 시절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지식인이다. 그의 뛰어난 분석력과 예리한 인물 비평, 근면함으로 인해 갖춰진 해박함은 당시 어린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가 제시한 수많은 우리 사회의 의제들도 흥미로웠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읽는 잡지였고 그가 펴낸 많은 단행본들도 필독 리스트에 단골로 오르곤 했다. 그의 근면함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 책을 펴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꼼꼼하게 따지지 않고 곧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다. 실재 그렇게 마구잡이로 덤벼들어 문제해결은커녕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곤 하지 않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유사한 사례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물론 전임 정부가 애써 만들어 놓은 재난대비 매뉴얼을 뭉개버린 것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 원인을 정확히 찾지 못한 채, 꼼꼼한 분석과 성찰 없이 도출되는 해답은 대부분 어긋나기 마련이다.

저자는 우리가 현재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 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은 압도적으로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타인이나 바깥 세계에 대해선 이성에 호소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좀 우스운 모습이다.

왜 현 정부는 저리도 이해 불가한 행동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여당은 또 왜 저리도 비굴한 것인지, 야당은 그렇담 왜 저리 존재감이 없는지, 정치인들은 왜 하나같이 저리도 무능하고, 정치는 왜 언제나 24시간 불철주야 개판인지 등등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해버리면, 속된 말로 답 안 나오는 사태가 지속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당최 왜?’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론이다. 저자는 ‘왜’라는 질문에 대해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을 이론이 있을 때 더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론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긴 시야와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왜 해병대 출신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지(노력 정당화 효과), 왜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복권을 계속 사는지(몬테카를로의 오류), 왜 대학 입시제도는 대략 3년 10개월마다 바뀌는지(행동 편향), 왜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 행진을 했는지(다원적 무지 이론) 등 50개의 이론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 소개한다.

최근 어느 논객이 현 정부의 독선과 무능, 불통과 ‘정상의 비정상화’ 등에 대해 “지금 화내지 말자”고 표현한 바 있다. 지금 똑같이 반응하고 화를 내면 끝내 우리가 패배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감정으로 대응하면 당장은 속이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현실 세계에선 변화를 추동해내지 못한다는 간절함이 담긴 호소였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이론으로도 당최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쓴 것을 이젠 자신도 모르겠다고, 당당히 대통령과 같은 수준의 유체이탈인임을 선언한 예술가도 있고, 3권 분립이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에서 입법부를 그야말로 개무시한 대통령에 대해 오히려 석고대죄하고 몸 둘 바를 몰라 서성이는 여당 대표, 여당 원내대표도 있다. 여기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마냥 투명해, 존재 여부가 불분명한 야당도 있다. 이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은 여간해선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정의 식민지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왜’라고 물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마저 이윤창출에 활용하려는 자본에 맞서기 위해서, 또한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로 정신 건강을 지키고 보다 후회 없는 선택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책에 소개된 50가지의 이론들을 읽으며 나는 과연 이 중 몇 개의 이론 적용이 가능할지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인간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다. 설명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불가능하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이해가 얼핏 되다가도 당최 속을 모르겠다. 착한 것 같은 데 사악함이 번득인다. 아, 어렵다.

이런 어려운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 게다가 오랫동안 분단되어 살아온 절반 사회에서, 우리는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누구보다 더 필요할지 모른다. 북을 여전히 소멸시켜야 할 대상 혹은 영원한 패배자, 루저로 ‘감정’해 버리곤 하는 지금, 이런 감정 독재에 맞서기 보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성과 감정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그 안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공을 키우는 일,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되겠다.

‘자기이행적 예언’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미래에 관한 개인의 기대가 그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경향성이란다. 8월, 이희호 여사가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북측을 방문키로 하였다. 이번 방문이 반드시 잘 될 것이라는 자기최면이라도 걸어야 할 듯하다. 그럼 누가 알겠나, 정말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말이다. 체면 따지지 말고 최면이나 걸자. 분명 남북관계는 기어이 잘 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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