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의한 권력이 저지른, 그리고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꼭꼭 숨겨둔 추악한 거짓이나 부정일 수도 있고,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매장되어 버리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우리들의 뒤틀린 욕망이다. 차마 이목이 두려워, 아닌 척, 상관없는 척하지만, 끝내 악취를 풍기며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 안의 괴물. 그것은 이 시대를 자연스레 타락의 길로 이끈다.

때문에 박노자는 우리에게 불편한 존재다. 그를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이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 지식인 사회가, 우리의 정신세계가 어느 정도로 천박하고 또한 획일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을 꿰뚫어본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 박노자, 『비굴의 시대』, 한겨레출판, 2014.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학 시절 만난 그의 글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아니 애초부터 정상적인 때가 있었는지, 자괴감과 수치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위선과 폭력이 일상화되어버린 살풍경이 새삼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당신’이 아니었고, 때문에 몸 둘 바를 끝내 찾지 못했다.

박노자는 소위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자처하는, 인정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반대라 불리고, 자처하고, 인정받는 일부에게도 그리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 그들이 박노자를 불편해 하였던 것은 ‘북’에 대한 그의 인식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결코 제대로 된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는 더더욱 멀었다. 때문에 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우습게도 이 땅의 일부 진보들의 분노를 사는 결과를 낳았다. 슬픈 모습이었다.

자신과, 혹은 자신의 진영과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주장을 펼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또한 불온시하는 모습은, 진보라 불리는 이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보수진영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런 모습이 나에겐 생경했고, 그런 진보 세력들에 대한 실망감이 조금씩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썩게 마련이다. 죽게 마련이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책에서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라 표현한다. 지나침이 없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비굴’은 자연스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어 버린다. 냉소의 시대를 지나 비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른 바 기득권 세력들은 오랜 시간동안 민중을 철저히 개인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겨졌다. 사적 욕망의 추구를 찬양하였고 적극 장려하였다. 아울러 그를 위해 남을 짓밟는 것 역시 장려되었다. 이젠 더 이상 이기주의와 몰염치가 죄악이 아닌 시대다. 박노자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 역시 지나침이 없다.

어느 한 분야라도 썩지 않은 곳이 없다. 최근 신경숙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듯, 사뭇 고매함을 뽐내는 문화예술계 스포츠계도 이미 충분히 타락했다.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권력’없이 몸 담아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라도 펼쳐지면, 각자 자신들의 영역이 더 썩었고 희망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만 잘 살게 되면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까지도 관심 밖이 되어버린 모습. 비굴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책은 그의 눈을 통해 나타난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순과 불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지독하게 작동하고 있는 전근대적 습성까지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울러 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에도 눈길을 돌린다. 급격히 자본에게 ‘인간’과 ‘자유’를 빼앗긴 세계. 이젠 인간 없는 세계, 인간 없는 번영이 더 이상 상상의 그것이 아님을 그는 말한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흐름의 확산은 결국 인간의 주변화, 그것의 장기화와 상시화를 초래하고야 만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여전하다. 그는 남과 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유지하며, 지금껏 ‘자기들만의’ 세상을 유지해왔다고 말한다. 그 사이 양 국가의 인민들, 시민들은 고통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고, 결국 남쪽은 지독한 이기주의와 보신주의,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북한은? 그의 눈엔 여전히 왕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과 남을 ‘왕족 사회와 귀족 사회’로 표현하는 그의 눈빛엔 남북은 일란성 쌍둥이 체제일 뿐이다. “남북한은 한반도가 성취한 근대성의 빛(문맹 퇴치)과 어둠(전 사회병영화)을 동시에 공유한다. 그만큼 서로 돕고 상처를 보듬어주는데 지원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을까?”라는 말은 남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벗어나 진정한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

아울러 그는 “통일로 가는 문은 우리가 북한을 또 하나의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정상의 비정상화’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굳이 우울한 내용의 책을 읽으려 하냐고. 우울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책이라도 즐겁게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슬픈 영화는 어쩐지 보기 두렵듯, 나 역시 즐겁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낀 몇 안 되는 교훈 중 하나는, 혼자 즐겁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고, 그마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함께 즐거워야 참으로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의 더러움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눈물겨운 이웃들과 어깨걸이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지 않고, 대들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있어야, 그나마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 야매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래야 정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비굴의 시대에 모두 다 혁명투사가 되라고 선동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비굴하고 잔혹한 시대를 철저히 응시하고 결연한 목격자가 되어 연대하는 길. 그곳에서 희망은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그 무슨 ‘병행 전략’이라느니, ‘전략적 모호성’이라느니 떠들지 말자는 것이다. 말과 행동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상대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대응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주먹을 날린 후, 상대에게 화해의 장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코미디다. 지금 우리 정부가 북에게 그런 우스운 꼴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가뭄과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늘과 땅과 이웃들에게 덜 부끄럽고, 덜 해를 끼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워 아이를 쳐다볼 수 없는 지금이다. 가뭄과 역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 살기 어려워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우리, 희망을 놓지는 말자.

“그러나 우리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껏 외치고 힘껏 연대하면 된다. 사회는 보수화되더라도 진리는 그대로 진리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왜곡하고, 장기적 차원에서는 다수를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빈곤으로 빠뜨리며 결국 위기, 공황, 전쟁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다. 나는 그냥 저들이 내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파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화된 사회의 경제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악화되어 다수의 삶이 망가져가는 대로 연대와 투쟁의 폭을 계속 넓히면 된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6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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