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지난 5월 18일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21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갓 만기 제대했다. 통역병으로 복무했던 터라 키리졸브(Key Resolve)와 을지프리덤가디언(Ulchi Freedom Guardian)로 상징되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세 차례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연합훈련은 전시 작전계획에 기반해 북한의 선제 도발과 전면전 확대에 대비해 한미 양국군이 함께 시행하는 정례적 훈련으로, 시행 즈음 북한과의 마찰의 불씨를 제공하곤 한다.

지난 세 번의 훈련을 통해 기자는 군내 ‘북괴’라는 표현의 일상화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000년 6.15 남북공동정상회담 이후 공식 국방문서에서 폐기된 ‘북괴’라는 용어는 간부들의 시시콜콜한 잡담, 실무 토의, 부대의 최고 통수권자인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발표 자료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남북간 신뢰 형성과 관계 발전을 위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야심차게 구상하는 한편 ‘북괴’라는 용어를 만연하게 사용하며 대북 군사훈련을 시행하는 모순 속에 허우적대고 있다. 물론 국방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해 용어 사용의 둔감화를 함부로 지탄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역설 속에 살고 있다는 생생한 방증임은 부정할 수 없다.

▲ 임동원, 『피스메이커』, 창비, 2015.6. [자료사진 - 통일뉴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렇듯 상이한 국방과 공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남북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젊은 날 육사 교단에서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전략론’을 강의하는 등 반공주의 첨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고,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하며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그런 그가 분단 70주년과 6.15 남북공동선언 15돌을 맞아 저서 <피스메이커>의 개정증보판을 출간했다. 그는 머리말을 통해 “초판이 출간된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중단된 안티테제의 시기”라며 “20여년간 계속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은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중단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불신과 대결을 일삼던 시대로 회귀했다”고 작금의 남북관계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서문을 읽고, ‘햇볕정책’의 입안자이자 다각적인 남북교류와 경협을 주도한 임 전 장관이 서재에 앉아 오늘날 대화의 연결고리가 끊긴 남북에 대한 근심으로 다시금 펜을 들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외교안보수석비서관,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 다양한 옷을 입었지만 지난 20여년간 오직 남북의 협력과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일관된 행보를 걸었다. 헌데 2010년 5.24 조치로 대변되는 대북압박정책 이후 남북관계는 지난 5년 동안 진전은커녕 국민의 정부 이전으로 퇴행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그의 실망감은 저서뿐만 아니라 강연과 언론 활동 등을 통해서도 익히 드러났다. 왕년에 구슬땀을 뻘뻘 흘려가며 기틀을 잘 다져놓은 집을 누가 산산히 부숴버렸다면 이런 기분일까.

남북 상호 체제를 인정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자주통일을 약조한 ‘6.15 남북공동선언’ 등 남북관계 개선의 이정표와 같은 중대한 현장 속에 항상 그가 있었다. 때문에 실무접촉과 물밑협상 중 겪은 우여곡절에 대한 가감 없는 술회는 더욱 실감나고 풍부한 비사로 몰입도는 한층 높아진다.

임 전 장관의 회고는 잔잔한 사자후와 같아 어조가 강경하지 않음에도 통일을 향한 우리 모두의 무심과 무지를 계책하는 울림이 있다. 비록 직접적인 책망은 없어도, 그는 대화와 협력을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종북몰이를 자행하는 일부 세력은 각성할 것을, 정권의 잘못된 대북정책 기조를 견제하고 실효적인 타개책을 도출하지 못한 현 야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은 대오각성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주장은 하나도 새롭거나 파격적이지 않다. ‘북한을 제재하고 굴복시키려 할 것이 하니라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포용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의 핵심적인 선결 과제임이 분명하지만,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과 병행해야 한다’, ‘붕괴 임박론 등의 막연한 기대에 기대지 말고 단계적인 통일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불과 10년 전 상식과도 같았던 이야기이자 남북당국이 웃는 얼굴로 합의한 각종 성명의 요체다.

하지만 장밋빛 과거는 이제 요원한 미래의 지향점으로 아득하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집권한 10년 동안 국정과 대북관계를 책임진 대다수의 관료들이 여전히 요직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퇴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 지난 9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1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한과 북한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통일이 필수적인 만큼, 국제사회의 인정과 성원을 받는 것 또한 중요하다. 미국과 같은 강력한 우방국의 남북통일을 향한 협력과 지지는 곧 순풍에 돛을 다는 격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을 향한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시선은 악화를 거듭하고 있다.

물론 북한이 국제사회의 비판 대상인 인권 유린 등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져야겠지만, 네오콘이 득세하던 부시 정권을 탈피했음에도 미국의 대북기조는 대화보다 압박에 무게를 두고 있다.

브래드 글로서맨 美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태펴양포럼 사무국장은 지난달 27일 기고문을 통해 오바마 정부의 미비한 대화 의지를 지적하며 “과거 클린턴 행정부가 주도한 ‘페리 프로세스’와 같은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새로운 대북정책을 입안해야 한다”고 밝혔다. ‘페리 프로세스’는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조정관이 작성한 포괄적 대북문제 해결책으로, 공교롭게도 ‘임동원 프로세스’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오바마 정권은 ‘관계 개선을 통한 비핵화’가 아닌 ‘비핵화를 통한 관계 개선’을 관철하려 함으로써 북미관계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손꼽히는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역시 지난 13일 뉴욕에서 열린 대중연설에서 미국의 위기대응 역량에 대해 역설하며 “북한은 전통적 위협”이라고 적대적인 언술을 선보였다.

회고록은 클린턴 행정부와의 협업뿐만 아니라 2001년 한미정상회담 당시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美 대통령의 도라산역 공동 방문을 제의하는 등 남북의 정착된 외교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임 전 장관의 분투를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당국과의 무수한 협의를 통해 북미관계 중재에 매진한 임 전 장관의 모습과 함께 오늘날 통일을 위한 효과적인 대미외교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임 전 장관은 글을 맺으며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10년 전에 이미 세간에 소개된 통일을 위한 필요조건들에 대한 상식적인 고찰이 다시금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북포용과 평화 체제로의 전환 등을 강조하며 그는 우리 사회가 단순히 남북의 평화를 지키는 ‘피스키퍼’에서 벗어나 이 책의 제목처럼 평화를 새롭게 만드는 ‘피스메이커’로 변모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오늘날 남북통일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과제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교류는 애석하게도 진척이 없다. 또한 통일에 대한 절박함은 상당히 희석됐고 반북정서는 날로 고조되고 있다.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학창시절 반공교육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청년들 역시 일베(일간베스트) 등의 공간을 통해 북한에 대한 반감과 조롱을 서슴없이 내뱉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가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듯, 멀리 보며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자세로 다가갈 수 밖에 없다. 느릿느릿 나아가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작금과 같이 퇴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남북통일에 있어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요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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