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목수정 옮김, 자발적 복종, 생각정원 펴냄, 2015년 2월. [자료사진 - 통일뉴스]

“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된다. 나라가 그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짓만 안 하면 된다.(중략) 민중은 흔히 자발적으로 굴종을 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노예가 될지 자유인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민중 자신이다. 자유를 버리고 멍에를 짊어지며 잘 정비된 법률 하에 권력의 보호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근심과 압제, 불의 그리고 오직 독재자 한 사람만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본문 46~47쪽)

결국 6.15 기념행사가 올해도 반반 쪼개져 치러졌다. 열다섯 돌이라는, 그리고 광복 70주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올해, 끝내 남북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평화와 화해, 통일을 노래할 수 있기를 염원했던, 그것을 위해 부단히 땀을 흘렸던, 많은 이들의 가슴이 무너졌다. 무안해졌고, 서글퍼졌다. 다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남북 모두 칠십년 세월동안 압슬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굴종과 순응이라는 기둥에 묶여, 불신과 증오를 깔아놓은 자리에 무릎 꿇려 그 위에 천근만근 분단이라는 돌을 얹는 형벌. 동족 간 피비린내 나는 지옥을 만든 것도 부족해, 칠십년이나 갈라져 살아온, 그 지독한 노둔함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칠십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동안 섬이나 매한가지인 채로 살아온 우리는 어느 새 옹춘마니가 되어버렸고, 청맹과니가 되어버렸다. 그리곤 오히려 시퍼렇게 분단의 현실을 바라보고 분노했던 이들을 아갈잡이해버렸다. 염치도 양심도 없는 그런 이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분단체제를 애써 유지하며 그 안에서 온갖 추잡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이 부와 권세를 누렸고, 누리고 있다. 푸독사마냥 힘없는 이들을 찍어 누르고, 그들을 착취하며 호위 호식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분단으로 인해 목숨 줄을 유지하는 두억시니 그 자체였다.

자발적 복종은 흔히 ‘먹고 살기 위해’라는 변명과 공존한다. 이웃의 고통에 눈감고, 동포의 굶주림에 눈감을 수 있는 그 뻔뻔함과 치졸함은 ‘어찌 되었든 나는 살아야 한다’는 구차함으로 합리화된다. 이는 저자가 살았던 16세기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여기에 우리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적어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만조백관들은 지극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는 국민들보다 더 땀을 흘려야 지당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은 갈수록 쉽지 않다. 입으로는 통일을 떠들고, 대박을 외치지만, 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단체제의 지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두 만무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일제 치하 독립투쟁을 했던 이들이 동가식서가숙하며 눈물겨운 삶을 이어간 것처럼, 지금 이 땅에서 분단체제의 균열을 내고, 남북의 모든 생명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땀 흘리는 이들은 치열하게 분단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그들은 기어이 자발적 복종을 거부한다.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유인의 굴곡진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메르스 사태는 진정 국면이 아니라 오히려 전 방위적인 확산을 두려워해야 할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 이상 비난하기조차 지겨운 정부의 무능력에 국민들은 이제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손을 깨끗이 씻으면 메르스 따위는 두려울 게 없다는 대통령의 말씀(!)은 순식간에 메르스로 생명을 잃은 분들을 죄다 비위생적인, 몰상식한 이들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 앞에 신하들은 국궁사배를 해대기 바쁠 뿐이다.

굴종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무릎을 꿇는 것이다. 스스로 인정하여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칠십년 분단이 오로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끄러워 마땅할 일이다.

은폐와 거짓으로 점철된 정부의 메르스 대응 앞에 많은 국민들이 정당한 비판과 함께, 자발적 순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분단시대를 무비판적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비정상을 비정상이라고 되 뇌일 수 있는 용기가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불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결국 굴종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즐거운 수학여행을 지켜주지 못한 나라, 전염병 하나로 온 국민이 서로를 ‘슈퍼 전파자’인 양 두려워하게 만든 나라. 그런 나라가 감히 ‘통일 대박’을 떠들고, 그 어떤 통일을 위한 ‘프로세스’를 떠들었다는 자체에서, 우습다 못해 서글퍼지는 지금이다.

정부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시민들의 두려움을 단지 와언으로 치부해 오히려 처벌하겠다는 뻔뻔함과 대통령의 침묵과 유체이탈 화법에 신물이 난 시민들의 두목답답함이 오가고 있다. 그 와중에 은근슬쩍 멍첨지를 총리로 앉히려는 몰염치까지 보인다. 세간의 와언을 처벌하겠다는 것도, 하자뿐인 이를 총리로 끝내 앉히겠다는 것도, 항상 그 명분은 사회적 질서 유지를 속히 확립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사회적 질서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질서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현실의 권력층은 항상 그들 세력의 욕구를 강요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질서를 주장한다. 문제의 앞뒤 순서가 바뀐 것이다. 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본문 149쪽)

기억해야 한다. 부당하게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그들만의 사회적 질서를 위해, 지난 칠십년 간 지겹게도 우려먹은 것이 바로 ‘북한’이었음을. 국정원 댓글 조작의 변명도 ‘종북 세력의 댓글 공작을 방해하기 위한 보안적 공작’이 아니었나.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이 전과 같을 수 없듯, 이제 메르스 이후의 대한민국 역시 그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조금이나마 새로운 희망이 담겨 있으리라 믿고 있다. 집권자의 우렁잇속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시민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차별하며 기생하는 수많은 이 시대의 ‘갑’들 앞에, 이 땅의 ‘각다귀’들 앞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시민들이 자발적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제 이러한 자각과 함께, 분단시대에 대한 자발적 복종 역시 끝내야 할 때가 왔다. 메르스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메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악한 탄저균 사태에 대해 정부는 입을 다물고 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속국입니다, 당당히 외치는 것만 같아, 처참하다.

자발적 복종을 끝장낼 수 있는 것은 통렬한 자각뿐이다. 난 노예가 아니라는, 그리고 분단은 지극한 비정상이자 불의라는 자각. 물론 이대로 살 것인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심할 것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남북 모두에 시원한 단비를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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