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동, 나는 시인이다, 바이북스, 2011년 3월.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멋진, 아니 이제 더 깊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 워 Z>(World War Z/2013)라는 영화가 있다. 공포영화의 단골객인 좀비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당시 꽤 흥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 외곽에서 높디높은 장벽을, 그야말로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시내로 넘어가는 좀비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좀비와 지구인(!)과의 목숨을 건 사투가 주된 줄거리이다. 나는 좀비 소설, 좀비 영화를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배제와 차별, 억압과 불평등이, 다름 아닌 좀비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어쩐지 나의 가설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어느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이웃들을,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닌 ‘타인’, 배제해야 할 그 ‘무엇’으로 규정해 버린다. 어쩜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탈북인 등 모두를 대한민국 내부의 ‘좀비’로 규정하여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끔이면서도 또 자주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꼭 그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극심한 정신적·물리적 폭력으로 대하는 정부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볼 때, 나는 과연 그들이 유가족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지금 메르스와 관련된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잘못과 책임은 정작 누구에게 있는지 헤아릴 생각도 않고, 길거리에는 ‘좀비’를 피하고자 하는 군중들뿐이다. 마스크가 상식을 가릴 수는 없을 텐데, ‘나라도 살고 보자’는 또 다른 폭력이 제2의 피해자들을 낳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영화에서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다름 아닌 한국이 지목된다. 때문에 주인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향한다. 다름 아닌 평택의 미군 기지다. 참 의미심장하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이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북의 상황은 어떤지 묻는다. 그 대답이 기가 막히다. 북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왜냐고? 모든 인민들의 이를 뽑아 버렸거든.”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나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북에 대한 미국의, 서구의 뿌리 깊은 적대감과 조롱이다. 이미 북은 미국의 ‘사랑스러운’ 주적이 된 지 오래다. 백악관을 북의 특수부대가 점령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부터, 최근 김정은 위원장을 풍자한 영화 등에서 볼 수 있듯, 마치 북이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국가라도 되는 것 마냥 떠든다. 구 소련, 이라크, 쿠바, 시리아, 아프간 등등 과거 미국의 주적들이 사라지거나 그 힘을 잃은 후, 다행스럽게도 미국이 발견한 주적은 ‘북’이었다. 이를 북 지도부가 자랑스럽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서글프고 웃지 못 할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좀비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전 인민의 이를 뽑아버릴 수 있는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국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북의 전체주의? 독재? 폐쇄성? 무지? 억압? 차별?(어쩐지 미국에게도 해당되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어찌 되었든 긍정적인 면은 전혀 없을 것이다. 정작 탄저균과 같은 메르스보다 몇 배는 치명적인 균을 인위적으로 한반도에 들여온 이들이, 북을 이따위로 묘사한 것에 다만 분노를 느낄 뿐이다.

하지만 북의 보건의료 시스템, 의료체계가 현재 상당히 허약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남북의료협력이 잠시 이뤄졌던 시기에는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개선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버겁다. 결핵으로 인해 해마다 약 2,5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전문가는 실상 그보다 10배는 될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을 내놓는다.

때문에 북은 외부로부터의 전염병 유입을 막기 위해 더 고심할 수밖에 없다. 에볼라 창궐 당시 북의 조치에서도 알 수 있듯, 일단 철저한 차단이 급선무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정부는 그 첫 단계를 태만하여 지금 이 꼴이 난 것 아닌가. 때문에 앞으로 당분간 북은 남쪽으로부터의 그 어떤 유입, 방문을 차단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보기에 이미 우리는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 충남 보령 개화 예술공원에 있는 김규동 시비.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울하다. 6·15의 뜨거운 상봉이 불투명해진 지금, 때 아닌 외부 질병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광복 70주년이라는 명분도 이미 빛이 바랬다. 아마도 북은 남측의 대통령이 6·15공동선언 15주년 기간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우리의 ‘진정성’을 파악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남북관계 개선에 의지를 거듭 표명한 대통령이 정작 6.15선언 15돌에는 미국으로 가버리는 상황. 어느 천치가, 어느 반편이가 진정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남북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어만 가고 있는 와중에, 김규동 시인이 떠올랐다. 책은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 펴낸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상 문집이다.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 시인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다 1948년 홀로 월남했다. 그리고 1950년대 초 박인환, 김경린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하여, 당시 전통 보수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 인물이다. 시인 김정환은 김규동 시인의 시를 “숱한 ‘민중시’들과 정반대로 시 순정 자체를 심화, 통일의 열망조차 순정의 극치로 전화했다”고 평가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죽어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어쩜 희떱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나름의 시를 쓰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어리석은 모든 몸짓도, 때론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까지도 모두 한 구절 한 구절 시가 되어 흘러가는 것. 그마저 서럽게 턱턱 막히더라도, 그럼에도 터져 나오는 것. 나는 그것이 시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참으로 서러운 시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김규동 시인은 평생 ‘살기 위해’ 시를 써내려갔다. 스스로 “혼돈과 무질서, 허위와 광기의 시대를 용케도 시라는 무기가 있어 그나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시는 존재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시인일 수 있어 행복했”다는 김규동 시인. 그는 시대의 아픔과 불의에 눈 감지 않았던, 약자와 가려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대를 배반하지 않은 선비’였다.

아울러 그는 전쟁으로 헤어진 어머님을 눈 감는 날까지 그리워했던, 실향민이었다. 고향집 앞 느릅나무를 생전에 꼭 한 번 다시 보기를 바랐던, 아름드리 그 나무에 기대어 그리운 고향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던, 천하의 ‘불효자’였다.

“울고 다시 헤어지는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분단의 슬픔과 비극을 두 번 겪어보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저는 금강산에 갈 생각을 못합니다” 이 구절에서 어쩔 수 없는 울컥함에 잠시 머뭇거렸다. 과연 시인의 이 처절한 하소연 앞에 남북의 권력자 중 그 누가 감히 당당할 수 있을까. 지금도 서러운 눈을 감고 있는 이산가족들 앞에, 도대체 그 어떤 고귀한 명분으로 변명 따위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시인은 전쟁의 참상과 도시문명의 삐뚤어짐을 비판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잠시 동안일 뿐이라 믿었던 이별이 영영 이별이 되어버린 분단의 아픔 앞에서 한없이 목 놓아 울었던, 그 피울음을 원고지에 꾹꾹 담아냈던 ‘분단 시대의 시인’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 사람의 감정과 추억, 사랑과 우정마저 금액으로 계산하고, 예측하고, 평가하는 시대. 감정을 팔고 사는 추레한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분단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통일과 남북화해의 노력마저, 계산기를 두드리고, 굳이 ‘대박’을 이야기해야 그나마 귀 기울이는 이 시대는 분명, 김규동 시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이산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아주 부지런히, 오랫동안 말이다.

아울러 그럼에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속울음을 눌러가며 걸어온 이들에게, 차가운 소주 한 잔에 비친, 그대의 뜨거운 눈 속에 비친 서러운 이 땅을 위해 오늘도 평화와 통일의 시를 써내려가는 모든 이들에게, 몸둘 바 없는 고마움을 가져야 마땅하다.

메르스도, 에볼라도 그 어떤 것도 지금 한반도의 분명한 잘못됨을 합리화할 순 없다. 이 땅에 살았던 김규동 시인은, 딱 그이만으로 족하다. 이제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를 말해야 한다. 서러움 대신, 눈물 대신, 어울림과 함께 걸어감을 노래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를 돌려주어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그야말로 빈껍데기로 만들고 있는 이 시대에, 내가 바라는 한 가지이다.

삼팔선 넘어올 때 딱 3년만 남쪽에서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벌써 수십 년이 지나갔지 뭐예요. “어머니, 3년만 있다 올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불효자식도 이런 불효자식이 없을 거예요. 왜 말들 하잖아요. 기쁜 일이 있으면 마누라를 찾고 슬픈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생각한다고요. 제가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그립습니다.(4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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